성채 외곽에 칼바람이 부는 늦가을의 끝자락, 차가운 바람은 성벽 틈새로 스며들어 웅웅거리는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정원의 마른 나뭇가지들이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서로 부딪치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는 밤이었다.
연회장의 촛불들이 일제히 일렁이다가 꺼진 어둠 속에서, 비비안 다투아의 구두굽 소리만이 대리석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때렸다. 그녀의 오만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공작 전하, 그리고 무엄한 가짜 공녀님. 축제는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비비안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녀의 뒤로 늘어선 황실 검열단 소속 시종들이 붉은 인장이 찍힌 문서를 높이 치켜들었다.
연회장 내부의 온도가 순식간에 급강하했다. 에일린은 가슴께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전생에 쓸모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차갑게 버려졌던 기억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발끝을 타고 올라오는 듯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비비안 다투아. 무엄하게도 베르하르트의 성채에서 감히 소란을 피우는구나."
디트리히 공작의 묵직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의 안광이 어둠 속에서 맹수처럼 번뜩였다. 하지만 비비안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채, 오히려 눈을 가늘게 뜨며 에일린을 손가락질했다.
"소란이라니요, 공작 전하. 저는 제국의 법을 집행하러 온 것입니다. 슈바르츠발트의 독성 밀은 황실령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는 금지 품목입니다. 그런데 저 가짜 공녀가 영민들에게 무허가 식량을 배포하여 황실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독이 든 빵으로 영민들을 기만하고 가문의 배를 불리려 한 죄, 결코 가볍지 않지요."
비비안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그녀는 북부의 식량줄을 쥐고 흔들던 다투아 상단의 권력을 과시하듯 턱을 높이 쳐들었다. 황실 검열단을 대동한 이상, 베르하르트 공작가라 할지라도 이 법적인 올가미를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라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이 빵들은 전부 압수될 것이며, 저 계집은 황실 재판소로 압송될 것입니다!"
비비안의 고함 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에일린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골랐다. 가슴속에서 세차게 뛰던 심장 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눈앞에 떠오른 '영지 회생의 베이킹 장부'가 푸른빛을 발하며 현재 가문의 재정 상태와 영민들의 호감도 수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영민 호감도: 98%] [영지 재정 상태: 흑자 전환 완료]
이 단단한 수치들이 에일린의 등 뒤를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더 이상 예전처럼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을 에일린이 아니었다.
에일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비안의 기세등등한 시선이 에일린에게 닿았다. 에일린은 품속에서 소중하게 보관해 두었던 두꺼운 양장 가죽 서류철을 꺼내 들었다.
"기만이라니요, 다투아 영애. 제 빵이 무허가 식량이라는 말씀은 큰 오해입니다."
에일린의 목소리는 잔잔하지만 연회장 구석구석까지 명확하게 퍼져나갔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슈바르츠발트의 밀을 사사로이 유통한 것은 명백한 위법……."
"이것을 보시지요."
에일린은 서류철을 펼쳐 비비안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황실 검열단의 단장이 움찔하며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 서류의 맨 윗장에는 제국 약사 협회와 황실 직속 마법 학회의 거대한 금빛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황실 위생 검증서와 마력 정화 효능 인증서입니다. 제국 법전 제14조 3항에 의거하여, 마력 오염을 정화하는 명백한 효능이 입증된 가공식품은 특수 구호 식량으로 분류되어 황실의 즉각적인 유통 허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사흘 전에 대리인을 통해 황도에 정식 등록을 마쳤지요."
"우, 위생 검증서라고……? 그럴 리가 없다! 그 썩은 땅에서 자란 밀로 만든 빵이 어떻게 위생 허가를 받는단 말이냐!"
비비안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그녀는 검열단 단장의 손에 들린 서류를 거칠게 빼앗아 눈을 부릅뜨고 읽어 내려갔다. 서류에 적힌 수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독성 물질 검출량: 0.00%] [마력 정화율: 94.7%] [종합 판정: 제국 최고 등급 특수 정화 식량 승인]
에일린이 구운 빵은 단순한 빵이 아니었다. 부서진 정화석의 파동을 베이킹 마력과 융합하여 정화 성능을 수십 배로 증폭시킨 '정화석 파동 융합 베이킹'의 결과물이었다. 겉은 눈부시게 하얗고 속은 구름처럼 부드러운 식빵을 오븐에서 구워낼 때, 고소하고 짭조름한 버터의 풍미와 함께 은은하게 퍼지는 알싸한 정화 향취는 이미 영민들의 몸속에 쌓인 마력 독소를 깨끗이 씻어낸 지 오래였다. 그 완벽한 정화 데이터가 황실 학회의 공인을 받아 문서로 증명되어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비비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가문의 권세를 믿고 데려온 황실 검열단원들은 이미 서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제국 최고 등급의 정화 식량으로 공인받은 물건을 무단으로 압수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황실로부터 영지 구호 사업 방해죄로 처벌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투아 영애."
에일린은 비비안의 귓가에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서류철 깊숙이 숨겨진 또 다른 쪽지를 살짝 건드렸다. 그것은 성채 서재에서 발견했던, 비비안이 남부 곡물을 독점하고 북부를 고사시키기 위해 작성했던 불법 곡물 계약 초안 쪽지였다.
"남부에서 들여오던 곡물 통행세를 불법으로 조작하신 장부 초안도 제가 가지고 있답니다. 황실 검열단분들께서 이곳에 오신 김에, 그 건도 함께 조사해 달라고 요청하면 어떻게 될까요?"
비비안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완벽한 덫을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신이 놓은 덫에 목이 조여오는 형국이었다.
"너…… 너 같은 천한 계집이 감히 나를……!"
"돌아가세요, 비비안 영애. 더 이상 베르하르트의 영토에서 소란을 피우신다면, 저도 제 권리를 지키기 위해 법적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일린의 단호한 태도에 비비안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구두를 히스테릭하게 구르며 몸을 돌렸다.
"두고 보자, 에일린……! 이 수모는 반드시 갚아주마!"
비비안과 검열단 무리가 썰물처럼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들어오던 칼바람이 잦아들고, 연회장에는 다시 평화로운 정적이 찾아왔다.
에일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이 풀린 다리를 겨우 지탱했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레온이 다가왔다.
"흥, 제법이네. 저 여우 같은 년 코를 싹 납작하게 만들어 주다니."
레온이 츤츤거리며 팔짱을 꼈지만, 그의 눈빛에는 에일린을 향한 깊은 신뢰와 자랑스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에일린은 그런 레온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였다. 에일린의 눈앞에 떠오른 베이킹 장부의 지도 화면에서 붉은색 경고등이 격렬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위험: 성채 뒤편 광산 깊은 침전 구역의 마력 오염도 급증!] [현재 수치: 89% -> 91% (상승 중)] [경고: 대량의 고체 오염원이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방치 시 대규모 마력 폭주 발생 가능.]
에일린의 미간이 좁아졌다. 비비안의 위협은 물리쳤지만, 영지의 고질적인 마력 오염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성채 뒤편의 광산은 영지의 생존과 직결된 광물이 묻힌 곳이자, 가장 깊은 마력 오염이 누적된 위험 지대였다.
"무슨 일이지, 에일린?"
리하르트가 그녀의 굳어진 표정을 캐치하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광산 깊은 곳에……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마력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치솟고 있어요. 지금 당장 확인해 봐야 해요."
"내가 동행하겠다."
리하르트의 묵직한 대답에 레온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 내 몸은 이제 멀쩡하니까 방해는 안 될 거야."
세 사람은 즉시 성채 뒤편의 광산으로 향했다. 횃불을 들고 어둡고 축축한 광산 내부로 걸어 들어갈수록, 공기 중에 섞인 비릿하고 무거운 마력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동굴 벽면에는 검붉은 마력 결정들이 기괴한 형태로 돋아나 있었다.
장부의 빛나는 안내선을 따라 깊은 침전 구역에 도달했을 때, 에일린은 걸음을 멈추었다. 흙먼지가 가득한 벽면 구석, 유독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오는 틈새가 있었다.
"저기예요."
에일린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리하르트와 레온이 횃불을 비추어 주었다. 단단한 흙을 헤치고 드러난 것은 먼지투성이의 오래된 고대 단지였다. 그 단지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신비롭고 영롱한 푸른빛을 발하는 고농축 결정체 침전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이템 획득: 고대 마력 결정체 침전물 단지] [설명: 고대의 강력한 정화 마력이 응축된 물질. 베이킹에 첨가 시 정화 효과를 10배 이상 증폭시킵니다.]
"이건…… 엄청난 정화 에너지가 느껴지는군."
리하르트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에일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결정체만 있다면 슈바르츠발트의 대지 정화 속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터였다.
바로 그때였다.
에일린의 옆에 서 있던 레온의 목걸이가 갑자기 푸른색 빛을 뿜어내며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레온의 목에 걸린 부서진 정화석 펜던트였다.
"앗, 이게 왜 이러지?"
레온이 당황하며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펜던트에서 뻗어 나온 마력의 파동이 에일린의 손끝에 닿아 있는 고대 결정체, 그리고 에일린이 품고 있는 베이킹 마력과 융합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에일린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한 가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아……! 부서진 정화석의 파동이 내 베이킹 마력과 공명할 때 마력 흡수가 가속되던 원리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부서진 정화석은 불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주변의 마력을 격렬하게 빨아들이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에일린의 따뜻하고 순수한 정화 베이킹 마력이 그 불완전한 파동과 맞물리면서, 주변의 독성 마력을 급속도로 흡수하여 소멸시키는 일종의 '마력 진공청소기' 같은 정화 공식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1화에서부터 레온의 목에 걸려 있던 그 부서진 정화석 펜던트가, 에일린의 마력에 오작동하듯 반응했던 이유가 비로소 완벽하게 해명되는 순간이었다.
"레온, 그 펜던트 덕분이야. 덕분에 정화 마력의 공식을 완벽하게 이해했어."
에일린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자, 레온은 뺨을 긁적이며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내,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
하지만 고대 결정체를 찾아낸 기쁨과 공식을 정립한 성취감도 잠시, 에일린은 비비안이 남긴 경고와 황실의 잠재적인 압박을 떠올리며 다시 어깨를 작게 움츠렸다. 전생의 트라우마가 불쑥 고개를 들며, 만약 자신이 이 영지를 완전히 구하지 못하면 다시 버림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런 에일린의 떨림을 감지한 리하르트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에일린의 가냘픈 어깨를 묵직하게 감싸 쥐었다.
"에일린."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더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 너는 이미 우리 가문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한 존재다."
리하르트의 눈빛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단단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너를 위협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황실이든 그 누구든 간에 내 검이 먼저 그들의 목을 벨 것이다. 감히 너를 건드릴 해충들은 내가 전부 처단할 테니, 너는 오직 네가 가고자 하는 길만을 바라보아라."
"오빠……."
에일린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전생의 차가운 고독 속에서 그토록 갈망했던 무조건적인 내 편이, 진짜 가족이 지금 자신의 곁에 있었다.
따뜻한 유대감이 광산의 차가운 한기를 녹여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궁-!*
발밑의 대지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광산 지하 깊은 막장 아래쪽에서, 마치 거대한 괴물이 깨어난 듯한 불길한 진동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앗! 에일린, 조심해!"
레온이 에일린의 팔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동시에, 저 멀리 어둠이 가득했던 지하 깊은 막장의 틈새에서 시뻘겋다 못해 검붉은 빛을 띠는 고농도의 마력 가스가 대지진과 함께 공중으로 무섭게 분출되기 시작했다. 뿜어져 나오는 가스의 열기가 광산 내부를 순식간에 지옥 같은 열기로 채워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