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너머…… 우리 영지의 가축들이 전부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마력 오염지대의 물을 마신 양들과 소들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가축들이 전부 죽으면, 올겨울을 버틸 우유도 가죽도 없습니다! 제발…… 제발 가축들을 살려주십시오!"
목동의 비명에 안도감으로 가득 차던 광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에일린의 시선이 언덕 너머,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로 향했다.
성채 외곽을 타고 내려오는 칼바람이 뺨을 스쳤다. 늦가을의 끝자락, 얼어붙은 대지 위로 흩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불길한 검은 이채가 언덕 너머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정화 마들렌의 달콤함에 취해 눈물을 흘리던 영민들이 다시금 절망에 젖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가축들까지 오염되었다면, 이번 겨울은 정말 끝이야." "남부 상단이 곡물마저 끊었는데, 가축들이 다 죽으면 가죽 옷 한 벌도 못 만들고 얼어 죽을 게 뻔해."
사방에서 엄습하는 절망의 속삭임 속에서, 에일린의 눈앞에 선명한 푸른빛의 베이킹 장부가 펼쳐졌다.
[ 경고: 베르하르트 영지 내 생태계 오염도 급증! ] [ 가축 마력 감염도: 85% ] [ 잔여 정화 시간: 3시간 ] [ 주의: 가축 집단 폐사 시 영민 호감도 급락 및 영지 재정 적자폭 120% 증가. 시한부 페널티 강제 발동 예정. ]
눈앞이 아찔해졌다. 겨우 마비 통증을 잠재우고 수명을 보름 늘려놓았는데, 여기서 가축들이 폐사하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타인의 미움을 사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와, 다시 끔찍한 통증 속에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전생의 트라우마가 에일린의 숨통을 조였다.
"에일린."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에일린의 어깨를 붙잡았다. 리하르트였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차갑고 이성적이었다.
"물러서라. 광증에 걸린 가축은 마수나 다름없다. 기사단을 보내 처리하겠다."
"안 돼요, 오라버니!"
에일린이 급히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가축들을 전부 죽이면 이번 겨울을 버틸 방법이 없어요. 우유도, 치즈도, 따뜻한 가죽도요. 제가…… 제가 고칠 수 있어요."
"미쳤어? 저 많은 짐승을 네가 무슨 수로 고쳐!"
뒤늦게 달려온 레온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은 걱정과 짜증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레온이 거칠게 에일린의 앞을 막아서며 언덕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에일린의 시선이 레온의 목덜미로 향했다. 그의 셔츠 깃 사이로 살짝 삐져나온, 반쯤 깨진 붉은 정화석 펜던트가 가늘게 진동하고 있었다. 에일린이 발산하는 베이킹 마력의 파동에 반응하듯, 정화석의 파편이 웅웅거리며 붉은빛을 뿜어냈다.
'잠깐만.'
에일린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영감이 스쳤다.
5화에서 부서진 정화석의 파동을 역이용해 정화 성능을 증폭시키는 공식을 정립했었다. 정화석은 마력을 빨아들이고 방출하는 성질이 있다. 그렇다면 이 부서진 정화석의 진동 파동을 빵의 마력과 공명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빵을 일일이 먹일 시간이 없다면, 정화석의 파동으로 빵의 마력 흡수 속도를 극대화해서 광범위하게 퍼뜨리면 돼!'
"레온, 그 펜던트 잠시만 빌려줘!"
"하아? 이걸 왜……."
"빨리! 가축들을 살릴 방법이 생각났단 말이야!"
에일린의 단호한 기세에 눌린 레온이 투덜거리며 목에서 펜던트를 풀어 던지듯 건넸다. 깨진 정화석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자, 에일린은 곧장 간이 조리대로 달려갔다.
시간이 없었다. 에일린은 화덕에 불을 지피고, 슈바르츠발트의 독성 밀가루를 아낌없이 보울에 쏟아부었다. 정화석의 파동을 융합하기 위해서는 극도로 부드럽고 수분감이 많은 반죽이 필요했다.
노랗게 그을린 버터를 듬뿍 넣고, 신선한 달걀노른자와 달콤한 꿀을 아낌없이 섞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향이 공기 중으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에일린은 숨을 가다듬고, 자신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마력을 반죽에 불어넣었다. 동시에, 다른 한 손에 쥔 깨진 정화석을 반죽 바로 위에서 미세하게 흔들었다.
*웅웅웅-*
정화석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붉은 마력의 파동이 푸른 베이킹 마력과 얽히며 반죽 속으로 급속도로 흡수되어 갔다.
[ 시스템 알림: 부서진 정화석 융합 공식 가동! ] [ 정화 마력 밀도 및 흡수 속도 500% 증폭! ]
화덕 안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마들렌은 이전보다 훨씬 강렬한 생명의 기운을 뿜어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구름처럼 부드러운, 황금빛의 정화 마들렌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향긋한 버터의 풍미와 코끝을 찌르는 레몬 제스트의 상큼한 향, 그리고 은은하게 퍼지는 달콤한 꿀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세 가지 향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냄새에, 절망에 빠져 있던 영민들이 침을 삼켰다.
"리하르트 오라버니, 기사들에게 이 마들렌을 잘게 부수어 언덕 위 식수원에 뿌리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레온, 넌 나와 함께 가자."
"내가 왜 가야 하는데!"
"네 펜던트의 진동이 필요하니까!"
에일린은 구워진 마들렌 가루를 커다란 자루에 담아 레온의 손을 잡고 언덕을 향해 달렸다. 리하르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소공녀의 말대로 한다. 즉시 마들렌 가루를 식수원 상류에 살포해라!"
언덕 위, 넓은 목초지는 아수라장이었다. 눈이 붉게 뒤집힌 양들과 소들이 끄르륵거리는 괴성을 지르며 서로를 들이받고 있었다. 입가에는 검은 타액이 흘러내렸고, 대지에서는 검은 마력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레온, 펜던트를 쥐고 내 마력에 집중해!"
에일린이 레온의 손을 꼭 잡았다. 차가운 그의 손이 에일린의 온기에 움찔했다.
"귀찮게 진짜……."
레온이 툴툴대면서도 펜던트를 꽉 쥐고 눈을 감았다. 에일린은 그의 손을 통해 정화석의 공명 파동을 이끌어냈다.
*치이이이익!*
동시에 기사들이 식수원 상류에 뿌린 마들렌 가루가 물에 녹아들며, 정화석의 파동을 타고 목초지 전체로 정화의 파도가 해일처럼 밀려 나갔다. 공기 중으로 흩뿌려진 달콤하고 고소한 버터 향기가 광증에 미쳐 날뛰던 가축들의 콧방귀 속으로 스며들었다.
"우우웅……."
식수원의 물을 한 모금 마신 거대한 황소가 가장 먼저 다리를 부르르 떨더니, 이내 붉은 안광이 사라지고 순한 눈망울을 되찾았다. 뒤이어 양들이 차례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검은 마력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토해내진 마력은 땅에 닿자마자 황금빛 마들렌 가루의 정화력에 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검게 썩어가던 목초지의 흙이 본래의 건강한 갈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눈에 들어왔다.
[ 퀘스트 완료: 생태계 오염 정화 성공! ] [ 슈바르츠발트 독성 밀가루 정화 효율 극대화 성공! ] [ 영민 호감도: 95% 돌파! ] [ 영지 손익분기점 최초 돌파! 흑자 전환 달성! ]
에일린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수치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 시스템 정산 및 보상 지급 ] - 영지 최초 흑자 전환 성공으로 인한 생명력 회복. - 영민 호감도 극대화 보너스 적용. [ 남은 수명 연장: +100일 ]
"백 일……."
에일린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전신을 짓누르던 시한부의 공포가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한 온기가 차올랐다.
"야, 에일린! 괜찮아?"
레온이 당황한 얼굴로 무릎을 꿇으며 에일린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에일린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응, 괜찮아. 우리 해냈어, 레온."
언덕 아래에서 지켜보던 영민들이 함성을 지르며 언덕을 향해 뛰어 올라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더 이상 공포도, 절망도 없었다. 오직 에일린을 향한 깊은 존경과 감사의 눈물만이 가득했다.
***
사흘 뒤, 베르하르트 공작성 중앙 연회장.
성 내부를 장식한 화려한 촛대들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커다란 벽난로에서는 참나무 장작이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올라 온기를 더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연회장 안만큼은 봄날처럼 따스했다.
길게 늘어선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에일린이 주도하여 구축한 '효능성 식량 공급망(The Bread Line)'을 통해 탄생한 결과물들이 가득했다.
정화된 슈바르츠발트의 밀로 구워낸 폭신한 우유 식빵, 갓 구워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한 바게트, 그리고 정화석 공명법으로 대량 생산된 달콤한 마들렌까지. 테이블 한편에는 정화된 목초지에서 생산된 신선하고 걸쭉한 우유와 고소한 치즈가 은식기에 담겨 빛나고 있었다.
"수백 장의 납품 계약서입니다, 소공녀님."
영지의 수석 회계관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서류 뭉치를 에일린 앞에 내려놓았다.
"남부 다투아 상단이 식량 줄을 쥐고 흔들 때는 영지가 파산할 위기였으나, 소공녀님께서 구축하신 정화 식량 공급망 덕분에 영지 내 모든 가계가 안정되었습니다. 슈바르츠발트의 밀을 수확해 정화 빵으로 가공하여 전방 영민들에게 보급하고, 남은 잉여 생산물을 인근 영지에 독점 판매한 결과…… 이번 달 재정은 역사상 유례없는 '대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에일린은 가만히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붉은색 적자로 가득했던 장부가 이제는 선명한 푸른색 흑자 수치로 가득 차 있었다. 영민들의 호감도는 98%에 달했고, 시스템이 보증하는 수명은 백 일에서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과도한 자기희생으로 몸을 부숴가며 일했던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아무리 헌신해도 버림받았었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자신이 증명해낸 성과가, 그리고 따뜻한 빵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테이블 상석에 앉아 있던 공작, 디트리히 폰 베르하르트가 잔을 들어 올렸다. 피도 눈물도 없다고 알려진 북부의 지배자가, 에일린을 향해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베르하르트의 이름을 잇는 자들은 오직 가치로만 자신을 증명한다."
디트리히의 묵직한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에일린, 너는 이 영지 전체를 살려냄으로써 네 가치를 완벽하게 입증했다. 이제 이 영지의 모든 식량 유통권과 재정 관리 권한을 정식으로 네게 위임하겠다. 너는 베르하르트의 자랑스러운 막내딸이자, 영지의 구원자다."
"아버님……."
에일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늘 차갑게 감시의 눈초리를 보내던 리하르트 역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잔을 채웠다.
"네가 구운 빵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이 영지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지. 고맙다, 에일린."
"흥, 내가 펜던트를 빌려줘서 성공한 거니까 내 공도 잊지 마라."
레온이 볼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손은 슬그머니 에일린의 접시에 가장 잘 구워진 고기 요리를 덜어주고 있었다.
에일린은 잔을 들어 올렸다. 따뜻한 포도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며 몸을 덥혔다. 드디어 이 차가운 북부에서 버림받지 않을 진짜 보금자리를 찾았다는 실감이 가슴을 꽉 채웠다.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앙!*
견고한 연회장의 이중 목문이 거칠게 열리며, 들이닥친 칼바람이 연회장의 촛불들을 일제히 흔들어 꺼뜨렸다.
어둠과 정적 속에서, 구두굽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화려한 털코트를 걸치고,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지은 비비안 다투아가 기세등등하게 연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뒤에는 황실 검열단의 붉은 인장이 찍힌 문서를 든 시종들이 가득 서 있었다.
비비안이 에일린을 향해 오만한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공작 전하, 그리고 무엄한 가짜 공녀님. 축제는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