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매연 같은 검은 연기가 에일린의 발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대지 밑바닥에 고여 있던 썩은 마력이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가녀린 종아리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성채 외곽의 황량한 들판을 휩쓸고 지나가며, 마른 풀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쓸쓸한 소리를 냈다.
"에일린!"
리하르트의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서릿발 같은 검날이 허공을 갈랐다. 검은 연기를 베어 내려는 몸짓이었지만, 형체 없는 마력의 독기는 검날을 비웃듯 에일린의 무릎까지 타고 올라왔다. 얼음장 같은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감각에 에일린은 입술을 짓씹었다. 아픔을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쥐자, 눈앞에 붉은빛의 반투명한 글자들이 어지럽게 명멸하기 시작했다.
[ ! 경고 : 영지 재정 적자 지속 및 영민 호감도 저하 우려 ] [ 시한부 페널티 발동 대기 중 : 인과율 통증 수치 85% ] [ 남은 수명 : 48시간 ]
전신이 굳어 들어가는 지독한 구속감이 심장을 압박했다. 여기서 물러서면 정말 끝이었다. 남부의 다투아 상단이 식량줄을 틀어쥐고 북부를 말려 죽이려는 지금, 이 죽음의 땅 슈바르츠발트를 개간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에일린은 덜덜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버텼다. 가문의 살인귀들이라 불리는 이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쓸모없는 소모품으로 분류되어 당장 버려질 터였다.
그때였다. 에일린의 뒤편에서 초조하게 발을 구르던 레온의 목덜미에서 이질적인 빛이 뿜어져 나왔다.
파지직!
그의 목에 걸려 있던, 모서리가 거칠게 깨진 장난감 같은 정화석 펜던트가 기괴한 소음을 내며 진동했다. 평소라면 미약한 빛만 내뿜던 푸른 돌이 에일린의 마력과 반응하자마자 붉은 스파크를 튀기며 제멋대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주위의 마력 기류가 급격하게 뒤틀리며 에일린의 발목을 묶은 검은 연기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어라……?'
에일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레온의 정화석 펜던트가 발산하는 불규칙한 진동 파형이 눈앞의 베이킹 장부 위로 고스란히 겹쳐 보였다.
[ 돌발 감지 : 부서진 정화석의 왜곡된 파동 파악 ] [ 분석 수치 : 파동 주파수 420Hz (일반 정화석의 12배 증폭 상태) ]
에일린은 머릿속의 계산기를 빠르게 두드렸다. 깨진 틈새가 마력의 흐름을 방해하는 낙오물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균열이 마력을 좁은 통로로 압축하여 방출하는 노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화석의 파동을 제빵용 마력과 결합한다면, 독성을 밀어내는 힘을 기하급수적으로 키울 수 있었다.
"레온, 그 펜던트 꽉 쥐고 있어! 절대 놓지 마!"
"하, 하지만 이게 갑자기 뜨거워져서……!"
레온이 당황해하면서도 펜던트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에일린은 손바닥을 대지 위로 뻗었다. 손끝에서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온화한 백색 마력이 레온의 펜던트에서 뻗어 나온 붉은 파동과 맞물렸다. 톱니바퀴가 딱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두 마력이 융합되어 거대한 동심원을 그리며 지면으로 쾅, 소리를 내며 내리꽂혔다.
휘이이이잉!
순간, 썩은 냄새를 풍기던 검은 아지랑이가 순식간에 하얀 안개로 변해 흩어졌다. 차가운 흙바닥에 스며든 온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에일린의 발밑을 시작으로 반경 수십 미터의 대지가 기적처럼 요동쳤다.
시커멓게 죽어 있던 진흙이 순식간에 촉촉하고 부드러운 갈색 토양으로 변했다. 그 위로 정화의 파동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다 자란 황금빛 보리 이삭들이 환영처럼 돋아나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늦가을의 삭막한 풍경 속에 홀연히 나타난 눈부신 황금빛 물결이었다.
"이건……."
리하르트의 검끝이 힘없이 내려앉았다. 그의 냉혹한 회색 눈동자에 처음으로 깊은 경악이 들어찼다. 기사들 역시 무기를 쥔 채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비록 몇 초 뒤 황금빛 보리밭의 환영은 아지랑이처럼 스러졌지만, 그들이 딛고 선 땅은 더는 썩은 악취를 풍기지 않는 비옥한 흙으로 변해 있었다.
"말도 안 돼. 슈바르츠발트의 오염을…… 고작 손짓 한 번으로 정화했다고?"
리하르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일린은 흘러내린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싱긋 웃었다.
"환영은 사라졌지만, 이 땅에 묻혀 있던 야생 밀들의 독성은 완전히 빠져나갔어요. 이제 저 검은 이삭들을 전부 수확해 주세요. 영지를 살릴 진짜 정화 빵을 구울 테니까요."
***
성채의 넓은 주방은 순식간에 후끈한 열기로 가득 찼다.
에일린은 슈바르츠발트에서 수확해 온 검은 이삭을 탈곡해 얻은 밀가루를 작업대 위에 쏟아부었다. 정화석의 파동을 거친 밀가루는 검은빛이 가시고 부드러운 미색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량의 마력 잔재가 남아 있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제빵이 불가능했다.
[ 베이킹 장부 기동 : 영지 정화 특산 마들렌 레시피 ] [ 필수 단계 : 마력 잔재를 가두기 위한 고온 버터 태우기 (헤이즐넛 버터 공정) ]
에일린은 냄비에 차가운 버터를 가득 담고 불 위에 올렸다. 불길이 냄비 바닥을 달구자, 고체 상태의 노란 버터가 서서히 녹아내리며 투명한 액체로 변했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버터 속의 수분이 날아가며 하얀 거품이 거칠게 일어났다. 에일린은 주걱을 쥐고 냄비 바닥을 쉴 새 없이 저었다. 버터 속의 고형분이 타들어 가며 점차 짙은 호박색에서 낙엽 같은 갈색으로 변해 갔다.
방 안 가득 구운 헤이즐넛의 고소하고 묵직한 후각적 자극이 퍼져 나갔다. 버터가 타들어 가며 내뿜는 향은 단순한 버터 냄새가 아니었다.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쌉싸름하고, 코끝을 간지럽히는 깊고 아늑한 냄새였다. 에일린은 가장 알맞은 갈색빛이 감도는 순간 냄비를 불에서 내렸다.
"여기에 정화 수치를 더 높여야 해."
달콤하고 상큼한 향을 더하기 위해 노란 오렌지의 껍질을 얇게 갈아 넣었다. 오렌지 제스트가 뜨거운 버터와 만나자 싱그러운 시트러스 향이 가미되어 코를 찌르는 마력의 텁텁함을 완벽하게 지워 버렸다.
볼에 정화된 밀가루와 설탕, 그리고 신선한 달걀을 넣고 거품기로 빠르게 섞었다. 서서히 농도가 잡히며 윤기가 흐르는 반죽에, 한 김 식힌 갈색 헤이즐넛 버터를 천천히 흘려 넣었다. 반죽이 버터를 머금으며 매끄럽고 찰진 크림색으로 변해 갔다.
"에일린, 정말 이걸 먹을 수 있는 거야?"
문가에 기대어 주방 안을 훔쳐보던 레온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의 코끝은 이미 고소한 빵 냄새에 완벽히 사로잡혀 있었다.
"당연하지. 잘 봐, 이제부터 진짜 마법이 일어날 테니까."
에일린은 조개껍데기 모양의 철판 틀에 반죽을 조심스럽게 짜 넣었다. 화덕의 온도는 장부가 지시하는 대로 정확히 맞추어져 있었다. 철판을 화덕 깊숙이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반죽은 빠르게 부풀어 올랐다. 조개 모양의 가장자리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며 중심부가 볼록하게 솟아올랐다. 통통하게 차오른 마들렌의 배꼽은 잘 구워졌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잠시 후, 화덕 문을 열자 가두어져 있던 향이 폭발하듯 뿜어 나왔다. 깊고 달콤한 캐러멜 향과 상큼한 오렌지 향이 결합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매혹적인 향취였다.
[ 베이킹 장부 갱신 ] [ 영지 정화 특산 마들렌 완성 ] [ 정화 등급 : 극상 (A+) ] [ 기대 효능 : 중증 마력 오염 95% 즉각 완화 ]
"완성이에요."
에일린은 갓 구워져 나와 만지면 바스러질 듯 부드러운 마들렌을 바구니에 가득 담았다. 겉은 가볍게 구워져 바삭한 질감이 살아 있었고, 속은 수분을 머금어 폭신하고 촉촉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마들렌 바구니를 들고 성문 밖으로 향했다.
성문 앞 광장에는 남부의 곡물 봉쇄로 인해 사흘간 제대로 먹지 못한 영민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의 안색은 흙빛이었고, 특히 어린아이들은 마력 오염의 여파로 눈동자가 점차 탁한 회색빛으로 변해가며 기운 없이 늘어져 있었다.
"배고파요, 엄마……."
누더기를 걸친 어린 자매가 서로를 껴안은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들의 눈가에는 이미 마력의 검은 반점이 돋아나기 시작해, 이대로 두면 사흘도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리하르트가 에일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직 안전성이 확실하지 않다. 영민들을 상대로 실험을 하겠다는 건가?"
"실험이 아니에요, 오라버니. 이건 확신이에요."
에일린은 리하르트의 차가운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치며, 바구니에서 따끈따끈한 마들렌 한 개를 집어 들었다. 오렌지 향과 고소한 버터 향이 바람을 타고 광장 전체로 퍼지자, 죽은 듯 누워 있던 영민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에일린은 어린 자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안녕? 아주 맛있는 과자를 가져왔는데, 한번 먹어 볼래?"
"그거…… 독약 아니에요? 슈바르츠발트의 밀로 만든 건 다 미치게 만든다고 들었는데……."
언니로 보이는 작은 소녀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에일린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마들렌을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어 보였다.
"보렴, 아주 안전하고 달콤하단다. 따뜻할 때 먹어야 가장 맛있어."
향긋한 버터 냄새에 이기지 못한 동생 아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통통한 조개 모양의 마들렌을 조심스럽게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아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앗……!"
바삭한 첫 입을 지나, 씹을 때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부드러운 식감과 함께 진한 달콤함이 혀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버터의 고소한 풍미와 오렌지의 상큼함이 입안을 가득 채우자, 아이의 메마른 입술에 붉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아이의 눈가에 돋아나 있던 기괴한 검은 반점들이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흐릿하고 탁했던 회색 눈동자가 서서히 걷히더니, 마치 가을 하늘처럼 맑고 푸른 푸른빛을 되찾았다.
"어, 엄마…… 몸이 안 아파요! 가슴이 답답하던 게 다 사라졌어요!"
아이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쳤다. 옆에서 지켜보던 언니 역시 동생의 손에 든 마들렌을 빼앗기듯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바삭하고 달콤한 빵이 목구멍을 넘어가자마자, 언니의 안색 역시 투명하게 피어났다.
"이, 이럴 수가……."
영민들의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져 나갔다.
"마력 오염이 치료되었어! 저 빵이 아이들을 살렸다고!"
"살인귀 가문의 땅에서 자란 밀이 아니야, 저건 신의 은총이야!"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에 질려 있던 영민들이 에일린을 향해 기어 나와 무릎을 꿇었다. 나이 지긋한 노인부터 억척스러운 사내들까지, 모두가 에일린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저희를 살려 주십시오, 소공녀님!"
"제발 그 빵을 조금만 나누어 주십시오!"
비비안 다투아가 쳐놓았던 촘촘한 경제적 올가미가, 에일린이 구워낸 단 하나의 달콤한 마들렌에 의해 무참히 찢겨 나가는 순간이었다.
에일린은 눈앞에 떠오른 푸른색 장부 화면을 바라보았다.
[ 영민 호감도 급상승! 호감도 지수 : 82% ] [ 영지 손익분기점 돌파 가능성 감지 ] [ 시스템 페널티 해제 ] [ 남은 수명 연장 : +15일 ]
가슴을 짓누르던 전신 마비의 통증이 완벽하게 가라앉으며 기분 좋은 온기가 전신을 감쌌다.
에일린은 고개를 들어 광장에 모인 영민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에서 묵묵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리하르트와 레온을 향해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게 시작이에요. 슈바르츠발트의 밀을 모두 정화해서 베르하르트 영지 전체에 공급할 식량망을 구축할 거예요. 남부의 도움 따위 없어도, 우리는 굶어 죽지 않아요."
영민들의 환호성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울음과 기쁨이 뒤섞인 북부의 공기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따스함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환호성이 채 가라앉기도 전이었다.
"소공녀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광장 구석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목동 한 명이 비틀거리며 뛰어와 에일린의 옷자락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그의 얼굴은 극심한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리하르트가 차갑게 제지하며 목동을 떼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목동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성벽 뒤편의 험준한 언덕 너머를 가리키며 울부짖었다.
"언덕 너머…… 우리 영지의 가축들이 전부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마력 오염지대의 물을 마신 양들과 소들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가축들이 전부 죽으면, 올겨울을 버틸 우유도 가죽도 없습니다! 제발…… 제발 가축들을 살려주십시오!"
목동의 비명에 안도감으로 가득 차던 광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에일린의 시선이 언덕 너머,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