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성채 외곽에서부터 다급하게 울려 퍼지던 종소리가 지하 감옥의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뎅, 뎅, 뎅. 금속성의 비명이 돌벽을 타고 흐를 때마다 에일린의 가슴속에 박힌 모래시계가 더 빠르게 요동쳤다.

숨을 헐떡이며 지하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 전령은 온통 하얀 서리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그가 내뱉은 보고는 얼어붙은 지하실의 공기를 단숨에 영하로 떨어뜨렸다.

“남부의 비비안 다투아가…… 모든 식량 수입로를 전면 통제했습니다!”

디트리히의 눈썹이 사납게 일그러졌고, 리하르트의 손가락이 검 자루 위에서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부의 곡물권 독점. 그것은 북부의 목줄을 쥔 보이지 않는 칼날이었다. 사흘 치의 식량밖에 남지 않았다는 전령의 비명은 곧 베르하르트 영지 전체에 내릴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돌발 위기: 남부의 식량 차단으로 인해 영지의 식량 보유고가 고갈됩니다!] [경고: 사흘 이내에 대체 식량망을 가동하지 못할 경우, 영민들의 호감도가 폭락하며 시한부 페널티가 즉각 발동합니다!]

눈앞에 번쩍이는 붉은 경고등이 가슴을 옥죄어 왔다. 에일린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타인의 미움을 사는 순간 발동할 전신 마비의 극통이 벌써부터 뼈마디를 시리게 만드는 듯했다.

그때, 시종들이 들것을 가지고 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전령을 다급히 들어 올렸다. 덜컹거리는 들것의 반동으로 전령이 메고 있던 낡은 가죽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지퍼가 터졌다. 안에서 쏟아진 서류 더미 사이로, 유독 이질적인 붉은 밀랍 인장이 찍힌 양피지 조각 하나가 에일린의 발끝으로 굴러왔다.

에일린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그 조각을 주워 올렸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은 거칠었지만, 그 위에 적힌 글씨는 기괴하리만치 정갈했다.

‘……남부 상단의 북부 곡물 독점 공급 조항 및 베르하르트 영지 고사를 위한 관문 통제 초안.’

비비안 다투아의 친필 서명과 다투아 상단의 인장이 선명하게 박힌 비밀 계약 쪽지였다. 전령이 우연히 입수했거나, 비비안의 밀사가 흘린 것을 수습한 모양이었다. 에일린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쪽지를 움켜쥐었다.

‘비비안의 불법 곡물 계약 초안이야. 가문을 아주 말려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이것은 훗날 비비안을 법적으로 끌어내릴 결정적인 무기가 될 터였다. 에일린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 쪽지를 드레스 소매 안쪽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성벽 틈새로 스며든 늦가을의 시린 칼바람이 성채의 횃불마저 얼려버릴 듯 거세게 울부짖었다. 가을의 끝자락, 바스락거리는 마른 잎사귀 조차 숨을 죽인 채 얼어붙는 계절이었다.

대회의실로 향하는 복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가문의 기사들과 가신들이 무기를 절렁이며 복도를 오갔고, 영지의 파멸을 예견하는 수군거림이 가득했다. 그 혼란스러운 길목 한가운데에 소년이 서 있었다.

레온이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마력 오염의 후유증으로 늘 창백했던 안색이 지금은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었다. 레온은 벽을 짚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다가오는 에일린을 발견하고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너…… 너 소문 들었어? 남부에서 밀가루를 안 보낸대. 이제 빵이고 뭐고 없어. 우린 다 여기서 굶어 죽을 거야!”

“레온, 진정해.”

“진정하게 생겼어? 내 몸속의 마력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단 말이야! 먹을 것도 없고, 이 저주받은 땅에서 결국 다 미쳐 버릴 거라고!”

레온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그의 목에 걸린 부서진 정화석 펜던트가 붉은빛을 발하며 불규칙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 순간, 에일린의 가슴 깊은 곳에서 정화 마력이 공명하듯 강하게 요동쳤다. 머릿속에 번개 같은 직관이 스쳤다.

‘잠깐만. 저 펜던트의 마력 기류가……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어.’

부서진 정화석이 마력을 흡수해 정화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변의 오염된 기운을 빨아들여 레온의 마력 통증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에일린은 베이킹 장부의 수치를 빠르게 훑었다. 레온의 마력 오염도가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에일린은 망설임 없이 한 걸음 다가서서 레온의 얼음장 같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거 놓으라고!”

“싫어. 안 놓을 거야.”

에일린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했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이 가혹한 세상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내기 위해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약속했잖아. 널 절대로 굶기지 않겠다고.”

에일린은 품 안에서 소중하게 보관해 두었던 정화용 미니 버터 타르트를 꺼냈다.

지하 제빵실에서 갓 구워낸 타르트는 여전히 은은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타르트지 위로 달콤하고 고소한 천연 버터의 풍미가 화사하게 피어올랐고, 쌉싸름한 레몬 제스트의 상큼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한 입 베어 물면 바삭한 생지 속에 가득 찬 부드러운 커스터드 크림이 혀끝을 감싸 안을 것만 같은 완벽한 비주얼이었다.

“이걸 먹어봐, 레온.”

“지금 이딴 게 목구멍에 넘어갈 것 같아……?”

“넘어가게 해 줄게. 그러니까 나를 믿어.”

에일린이 타르트를 레온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 순간, 에일린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정화 마력이 레온의 목에 걸린 부서진 펜던트에 닿았다.

찌르르릉!

작은 스파크가 일며, 오작동을 일으키던 펜던트의 붉은빛이 에일린의 마력에 감응해 푸른빛으로 빠르게 정화되기 시작했다. 펜던트가 마력을 흡수하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가속화되며, 타르트에 깃든 정화 버프와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레온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홀린 듯 타르트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바삭,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크림의 달콤함이 그의 입안 가득 퍼졌다. 고소하고 따스한 버터 향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을 채우는 순간, 레온의 몸을 짓누르던 극심한 마력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굳어 있던 소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어……? 안 아파. 몸이 가벼워졌어.”

레온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에일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거봐, 내 말이 맞지? 내 빵은 단순한 디저트가 아니야.”

부서진 정화석의 파동을 역이용해 정화 효율을 극대화하는 법을 완전히 터득한 것이다. 에일린은 이제 자신의 정화 베이킹이 대지 전체의 독성마저 제어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대회의실의 무거운 청동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안에는 공작 디트리히와 가문의 후계자 리하르트, 그리고 수십 명의 가신들이 심각한 얼굴로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부와 전면전을 치러야 합니다! 그들의 관문을 부수고 식량을 탈취해 오지 않으면 기근을 피할 수 없습니다!”

“미쳤나! 황실이 뒤를 봐주는 다투아 상단을 치는 건 반역죄다! 차라리 굴복하고 광산 지분을 넘겨주는 편이…….”

서로의 목소리를 높이며 진흙탕 싸움을 벌이던 대회의실의 분위기는 에일린이 들어서는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꼬맹이가 올 자리가 아니다. 나가라.”

한 가신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에일린은 주눅 들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테이블 중앙에 디트리히의 결재 인장이 찍힌 청동 서류를 쾅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남부 다투아 상단에 굴복할 필요도, 무리한 전쟁을 일으킬 필요도 없습니다.”

에일린의 목소리가 넓은 회의실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리하르트가 차가운 눈빛으로 에일린을 응시했다.

“에일린. 지금 상황이 장난으로 보이나 보지? 밀가루가 사흘 치밖에 남지 않았다. 빵을 구울 재료 자체가 없단 말이다.”

“밀가루라면 영지 안에 차고 넘치도록 있습니다.”

에일린이 주머니에서 가계부, 즉 베이킹 장부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만 보이는 시스템 장부의 수치들이 허공에 선명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베르하르트 영지 재정: -45,000 골드 (적자 심화)] [영지 내 미활용 식량 자원: 슈바르츠발트 독성 밀 (약 50,000톤)] [해결책: 대지 정화 버프 베이킹을 통한 독성 밀가루의 100% 식량화]

“슈바르츠발트.”

에일린이 그 단어를 입에 담자, 회의실에 있던 모든 이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거긴 죽음의 땅이다. 그곳에서 자란 밀은 먹는 즉시 광증을 일으켜 죽는 독성 폐기물이야!”

가신 중 한 명이 비웃듯 소리쳤다. 하지만 에일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디트리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장 완벽한 해결책은 적의 손길이 닿지 않는 우리만의 자원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슈바르츠발트의 밀은 마력에 극도로 오염되어 있을 뿐, 식재료로서의 영양과 양은 남부를 무릎 꿇릴 만큼 거대합니다. 그리고 저에겐…… 그 독성을 완벽하게 무력화하고 정화할 수 있는 비장의 능력이 있습니다.”

“증명할 수 있나?”

디트리히의 묵직한 음성이 지하실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에일린은 소매를 걷어붙였다. 가녀린 팔목이었지만, 그 안에는 영민들을 살리고 스스로의 수명을 쟁취하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이미 레온의 마력 폭주를 제 베이킹으로 진정시켰습니다. 부서진 정화석의 파동을 제 베이킹 마력과 융합해 정화 효율을 수십 배로 끌어올리는 공식을 확인했습니다. 슈바르츠발트의 대지도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그곳의 독성 밀가루를 영민들이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정화 식량으로 바꾸어 놓겠습니다.”

그녀의 당찬 선언에 회의실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던 영지의 고질적인 식량난과 기근을, 고작 열 살 남짓한 꼬맹이가 독자적인 돌파구로 해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리하르트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그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디트리히 역시 에일린의 눈빛에서 꺾이지 않는 확신을 읽어냈다.

“좋다.”

디트리히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말한 능력이 진짜라면, 베르하르트는 남부의 곡물 봉쇄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요새가 되겠지. 하지만 실패한다면, 슈바르츠발트는 네 무덤이 될 것이다.”

“실패하지 않습니다.”

에일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가문의 호위 기사들과 리하르트가 뒤를 따르는 가운데, 에일린은 영지 북쪽에 위치한 금단의 땅 슈바르츠발트의 경계선으로 향했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대지는 검붉은 핏빛과 칠흑 같은 어둠이 뒤섞인 기괴한 색을 띠고 있었다. 살아있는 생명체라곤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오직 죽음과 마력의 잔재만이 가득한 황무지였다.

경계선에 선 에일린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코끝을 찌르는 매캐한 유황 냄새와 썩은 흙의 악취가 진동했다.

그녀가 슈바르츠발트의 썩은 흙더미 위로 첫발을 내딛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

대지가 낮게 울부짖더니, 에일린의 발밑에서부터 시커먼 독성 오염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 연기는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뱀처럼 기괴하게 비틀거리며, 에일린의 가녀린 다리를 타고 순식간에 사납게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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