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는 서릿발이 딛는 북부의 매서운 겨울바람이 성벽을 할퀴며 낮게 웅얼거렸고, 가끔씩 얼어붙은 나뭇가지가 사그락대며 부딪치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쾅!
지하 골방의 철창문이 비명 같은 쇳소리를 내지르며 뜯겨 나갔다. 부서진 쇠사슬이 돌바닥을 긁으며 요란한 소음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들이닥친 거대한 그림자가 좁은 방 안의 공기를 단숨에 얼려 버렸다.
“이것이 정녕 네년의 얄팍한 수작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느냐.”
철혈의 공작, 디트리히 폰 베르하르트였다. 그의 붉은 안광이 어둠 속에서 맹수처럼 번뜩였다. 방금 전 지하실에서 에일린이 구운 빵 한 조각을 삼키고 가슴속 화독을 가라앉혔던 그였지만, 그의 이성은 여전히 차갑고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에일린은 차가운 돌벽에 등을 붙인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허약한 몸을 추스렀다.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턱끝에서 툭 떨어졌다. 눈앞에는 붉은색 경고창이 사정없이 깜빡이고 있었다.
[경고: 가문의 재정 적자 상태 지속 시 시한부 페널티 ‘전신 마비’ 발동까지 남은 시간 167시간 42분.]
시간이 없었다. 디트리히의 압도적인 기세에 짓눌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에일린은 얇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정면으로 그의 시선을 받아냈다. 여기서 밀리면 정말로 끝이었다. 버림받고 쓸모없이 버려지는 전생의 비참한 죽음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가 어찌 공작 전하를 상대로 감히 사기를 치겠습니까. 제 눈앞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에일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으나,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
디트리히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가죽 장화가 바닥의 먼지를 짓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베르하르트 공작가 영지의 올해 재정 적자는 정확히 4만 2천 골드입니다.”
에일린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숫자에 디트리히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중 남부의 다투아 상단에서 수입하는 식량 대금이 전체 지출의 70%를 차지하고 있지요. 게다가 매년 황실에 바쳐야 하는 조공금 1만 골드는 단 한 푼도 마련하지 못해, 슈바르츠발트 제1광산의 채굴권을 저당 잡히기 직전이고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디트리히의 손이 검 자루 위로 얹어졌다. 가문의 일급비밀이자 가계부를 쥐고 있는 극소수의 회계관들만이 아는 수치였다. 이 꼬마아이가 그것을 한 자릿수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읊어대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누구에게 들었지? 다투아의 첩자냐, 아니면 황실의 쥐새끼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살기가 실렸다. 당장이라도 목을 벨 듯한 기세였지만, 에일린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영지 회생의 베이킹 장부]가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수치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듣지 않았습니다. 대지가 썩어 들어가 밀 한 톨 자라지 않는 이 땅에서, 매달 남부로 흘러 들어가는 금화의 궤짝들을 제 눈으로 보았으니까요. 전하, 베르하르트는 지금 밖으로는 마물을 막고 안으로는 빚쟁이들에게 목을 졸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녀의 조리 있고 단호한 대답에 디트리히의 눈동자가 깊게 일렁였다. 맹목적인 두려움에 울부짖어야 할 어린아이가 영지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그때, 디트리히의 뒤편에서 거칠게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 하아…… 전하, 저 녀석의 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레온이었다. 까칠하게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력 오염 후유증으로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해 또래보다 왜소한 체구의 소년은, 가슴을 움켜쥔 채 벽에 기댔다.
에일린의 시선이 레온의 목덜미로 향했다. 그의 옷깃 사이로 반쯤 깨진 붉은색 정화석 펜던트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 순간, 에일린의 시야에 푸른빛의 시스템 조언이 떠올랐다.
[돌발 감지: 부서진 정화석 펜던트가 주변의 미세한 마력 흐름에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정화석의 깨진 틈새가 역류를 발생시켜, 착용자의 마력 핵을 자극하고 폭주를 유도합니다.] [해결법: 정화석을 즉시 격리하고, 마력 흡수 가속 상태를 진정시킬 정화 음식을 투여하십시오.]
에일린의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단서들이 맞춰졌다. 레온이 유독 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더 괴로워했던 이유, 그리고 가문의 마력 중독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저 망가진 정화 마도구 때문이었다.
“레온 오라버니, 그 목걸이……!”
에일린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손 대지 마! 네까짓 게 감히……!”
레온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렀으나, 에일린은 그의 손길을 피해 목에 걸린 가죽 끈을 날카롭게 낚아챘다. 툭, 소리와 함께 부서진 정화석 펜던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슨 짓이냐!”
디트리히가 검을 반쯤 뽑아 들며 포효했다. 그러나 에일린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소맷자락에 소중하게 감싸 쥐고 있던, 방금 구워낸 식빵의 남은 조각을 꺼내 레온의 입가로 밀어 넣었다.
“이걸 먹어야 해요! 제발요!”
레온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려 했으나, 빵에서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풍미가 그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갓 구워낸 빵의 미지근한 온기가 공기 중으로 향긋하게 퍼져나갔다. 버터의 농밀하고 고소한 풍미가 코끝을 간지럽혔고, 노릇하게 구워진 껍질 속 부드러운 하얀 속살은 눈꽃처럼 보드라웠다. 씹을수록 쫄깃한 결 사이로 스며 나오는 효모의 은은하고 달콤한 맛이 레온의 입안 가득 감돌았다.
“읍……!”
강제로 입안에 밀어 넣어진 빵 조각을 씹는 순간, 레온의 눈이 크게 번뜩였다.
탄화된 독성의 텁텁함은 흔적조차 없었다. 오히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던 뜨겁고 탁한 마력이 차가운 얼음물에 씻겨 내려가듯 스르르 진정되었다. 거칠던 호흡이 거짓말처럼 차분해졌고, 붉게 충혈되었던 눈동자가 본래의 맑은 빛을 되찾았다.
바닥에 떨어진 정화석 펜던트에서는 검은 마력의 연기가 치직 소리를 내며 증발하고 있었다.
방 안에는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디트리히는 뽑으려던 검을 멈춘 채, 바닥의 펜던트와 숨을 고르고 있는 레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철벽 같은 얼굴에 생전 처음으로 깊은 당혹감이 스쳤다.
“……정화석이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었어.”
레온이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펜던트를 차고 있을 때마다 심장이 타들어 갈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어.”
레온의 시선이 에일린이 들고 있는 남은 빵 조각으로 향했다. 그의 뺨이 수줍음과 당혹감으로 살짝 붉어졌다.
에일린은 숨을 가쁘게 쉬며 디트리히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정화 마도구조차 이 영지의 마력 오염 앞에서는 망가져 독이 됩니다. 하지만 제가 구운 빵은 다릅니다. 대지의 독성을 흡수해 완벽한 무해 물질로 정화하고, 마력 폭주의 통증을 근본적으로 완화합니다.”
그녀는 품에서 꼬깃꼬깃한 영지 가계부 사본을 꺼내 디트리히의 발밑에 내려놓았다.
“남부에서 들여오는 곡물은 한 마차에 150골드입니다. 하지만 슈바르츠발트에 널린 오염된 검은 밀가루는 원가가 제로에 가깝지요. 제가 이 밀가루를 정화해 빵을 굽는다면, 영지의 식량 자급률은 100%에 도달합니다.”
에일린의 손가락이 가계부의 적자 수치를 가리켰다.
“남부 다투아 상단에 바치던 식량 대금을 전액 절감하고, 이 정화 빵을 황실과 주변 영지에 고가로 판매한다면…… 3개월 안에 가문의 적자 4만 골드를 메우고 황실 조공금 1만 골드를 채워 넣을 수 있습니다.”
어린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냉철하고도 완벽한 회계 지식과 기획이었다.
디트리히는 침묵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이 아이가 제시한 방안은 영지를 살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이었다. 게다가 눈앞에서 보여준 레온의 변화는 그 어떤 의구심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맹랑한 꼬마로군.”
디트리히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가계부 사본을 집어 올렸다. 그의 거대한 손가락이 종이 끝을 가볍게 튕겼다.
“내 허락 없이 영지 내에서 베이킹을 하는 것은 반역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는 품에서 묵직한 청동 인장을 꺼냈다. 베르하르트 공작의 정식 결재 마크였다.
그가 가계부 사본 여백에 거칠게 인장을 찍었다. 붉은 인장 유가 종이 위로 선명하게 번졌다.
“영지 제빵실의 독점 운영 권한과 통행증을 부여하마. 단, 기한은 아까 말한 대로 일주일이다. 일주일 안에 제1광산의 식량난을 해결하고 가시적인 흑자 지표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이 서류는 네 사형 집행서가 될 것이다.”
[퀘스트 조건 변경: 공작의 공식 인가를 획득했습니다! 제1광산 정화 및 식량 공급망 구축 시, 수명 보상이 300% 증가합니다!]
에일린의 눈앞에 푸른빛의 성공 보상 메시지가 화려하게 떠올랐다. 가슴을 쥐어짜던 미세한 통증이 가라앉으며, 전신에 따스한 온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첫 번째 생명줄을 거머쥔 것이다.
“감사합니다, 공작 전하.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에일린이 허리를 숙여 예의를 표하는 순간이었다.
성채 외곽에서부터 다급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뎅, 뎅, 뎅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지하실의 공기를 무겁게 찢어발겼다.
우당탕!
지하 계단을 굴러 떨어지듯 내려온 전령이 숨을 헐떡이며 철창문 앞에 엎드러졌다. 그의 얼굴은 흙먼지와 하얀 서리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전하! 공작 전하! 큰일났습니다!”
디트리히의 눈썹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호들갑이냐.”
전령은 피가 맺힌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남부의 비비안 다투아가…… 북부로 향하는 모든 식량 수입로를 전면 통제했습니다! 베르하르트 영지로 들어오는 모든 밀가루와 곡물 마차를 관문에서 압류하고 있다고 합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동결되었다.
“영지에 남은 식량은…… 겨우 사흘 치가 전부입니다! 당장 다음 주부터 광산의 인부들과 영민들이 굶어 죽기 시작할 것입니다!”
전령의 비명 같은 보고에 에일린의 눈앞에 다시 한번 붉은색 경고등이 피처럼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돌발 위기: 남부의 식량 차단으로 인해 영지의 식량 보유고가 고갈됩니다!] [경고: 사흘 이내에 대체 식량망을 가동하지 못할 경우, 영민들의 호감도가 폭락하며 시한부 페널티가 즉각 발동합니다!]
모래시계의 붉은 모래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에일린은 거칠게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차갑게 굳어버린 디트리히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