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는 북부의 매서운 칼바람이 성벽을 때리며 울부짖었지만, 두꺼운 석조 성채 내부에는 기묘할 정도로 고요한 침묵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목줄기를 파고드는 서늘한 감각에 에일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시퍼런 검청색 마력을 머금은 리하르트의 검끝이 그녀의 여린 목피부를 가볍게 누르고 있었다. 아주 작은 미동만으로도 목줄기가 꿰뚫릴 만큼 일촉즉발의 대치였다.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에일린?”
낮게 깔리는 리하르트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빙판처럼 차가웠다. 그의 붉은 눈동자 속에는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살기와 함께, 난생처음 겪어보는 정화의 자극에 대한 경계심이 뒤섞여 요동치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둥실 떠오른 상태창이 에일린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대상: 리하르트 폰 베르하르트] [마력 오염도: 89% (중증)] [상태: 일시적 두통 완화 (지속시간 5분)]
동시에 에일린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뼈를 깎아내는 듯한 고통이 몰아쳤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에 유리 파편을 가득 채워 넣은 것처럼 찌르는 듯한 통증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시스템이 경고하는 시한부 페널티, 즉 전신 마비의 전조였다.
허공에 뜬 붉은색 타이머가 잔인하게 모래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남은 시간: 11시간 58분]
이대로 가만히 앉아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살기 위해, 그리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에일린은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겨눈 리하르트의 차가운 검날을 손가락 끝으로 아주 조금씩, 옆으로 밀어냈다. 검날에 살갗이 긁혀 붉은 핏방울이 한 방울 배어 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오라버니…… 검을 거두어 주세요. 제가, 이 영지의 미쳐 버린 마력 오염을 제어할 빵을 구울 테니까요.”
“빵이라고?”
리하르트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지금 가문의 후계자인 내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그따위 시시한 소꿉놀이를 입에 올리는 건가?”
“소꿉놀이가 아니에요.”
에일린은 턱 끝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소맷자락으로 훔쳐내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비록 가냘팠으나 단호했다.
“방금 느끼셨잖아요. 오라버니의 머리를 깨뜨릴 것처럼 괴롭히던 그 끔찍한 두통이, 제 마력이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던 것을요.”
리하르트의 신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평생을 따라다니며 자신을 미치게 만들었던 마력 중독의 통증이,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완전히 사라졌었다.
그때, 형들의 뒤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막내 레온이 제 목에 걸린 펜던트를 움켜쥐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거짓말이야! 저 계집애가 사악한 마법으로 형님을 홀린 게 분명해! 베르하르트의 땅에서 자란 것은 그 무엇도 정화할 수 없어. 전부 썩어 문드러진 독덩어리뿐이라고!”
레온의 손아귀에 쥔 부서진 정화석 펜던트가 붉은빛을 뿜어내며 공명하고 있었다. 에일린의 눈에만 보이는 장부가 요란하게 깜빡였다.
[돌발 정보: 레온의 훼손된 정화석이 에일린의 정화 마력과 감응 중!] [분석: 가공되지 않은 정화석의 파동이 공기 중의 마력 독성을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이를 제빵 과정에 결합할 시, 오염 물질의 정화 효율이 150%로 증폭됩니다.]
에일린은 레온의 펜던트를 응시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이 가혹하고 합리적인 북부의 살인귀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수치로 증명해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레온 오라버니의 말이 맞아요. 이 땅에서 자란 밀가루는 독덩어리죠. 하지만 제 손을 거치면, 그 독성이 오히려 폭주하는 마력을 다스릴 가장 완벽한 해독제가 될 거예요.”
에일린은 리하르트의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제게 딱 한 시간만 주세요. 슈바르츠발트의 검은 밀가루로 오라버니들의 통증을 가라앉힐 정화 식빵을 구워 보이겠어요. 만약 제 말이 거짓이거나, 빵에 독을 탔다고 느껴지신다면…… 그때 제 목을 베셔도 늦지 않잖아요?”
당돌하리만큼 당찬 여동생의 제안에 리하르트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의 시선이 에일린의 창백한 뺨과, 여전히 미세하게 풍겨 나오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우유 향내에 머물렀다. 코끝을 간질이는 그 따스한 향기는 차가운 성채의 냉기마저 녹여버릴 듯 포근했다.
결국 리하르트는 천천히 검을 거두어 칼집에 밀어 넣었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서늘한 마찰음이 밀실을 울렸다.
“좋다. 단 한 시간이다, 에일린. 만약 쥐새끼만도 못한 수작을 부린다면, 그 즉시 네 목을 영지 광장 입구에 매달아 둘 것이다.”
* * *
공작가의 지하 주방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음산한 냉기만이 가득했다.
조리대 위에는 어둡고 칙칙한 회흑색의 밀가루 포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대지를 오염시킨 마력 잔재가 가득 스며들어, 만지기만 해도 살갗이 아려오는 슈바르츠발트산 검은 밀가루였다. 영민들이 기근에 시달리면서도 차마 먹지 못하고 버려두던 독성 폐기물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에일린이 밀가루 포대에 손을 얹자, 머릿속에서 청아한 벨 소리와 함께 베이킹 장부가 펼쳐졌다.
[슈바르츠발트산 검은 밀가루 정보] - 마력 오염도: 82% - 특징: 극심한 마력 마찰로 인해 글루텐 구조가 완전히 파괴됨. 섭취 시 내장 마비 유발. - 해금 레시피: [초급] 마력 흡수 정화 식빵 - 소모 마력: 15포인트
‘할 수 있어. 아니, 해야만 해.’
에일린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주방의 낡은 화덕에 불을 지폈다. 리하르트와 레온은 주방 입구에 팔짱을 낀 채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등뒤를 찔러왔지만, 에일린은 반죽 그릇에 검은 밀가루를 부었다.
석탄 가루처럼 칙칙하고 거친 밀가루가 그릇을 채웠다. 에일린은 따뜻한 물과 이스트, 그리고 소금을 넣고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검은 가루에 닿는 순간, 에일린이 품고 있던 정화의 마력이 은은한 금빛 서리로 변해 반죽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정화 제빵 가동: 대지 정화 마력 주입율 10%... 30%...]
서서히 손을 움직여 밀가루를 치대기 시작하자,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스슥, 스슥.
거칠고 뻑뻑하던 검은 가루들이 부드러운 수분을 머금으며 한 덩어리로 뭉치기 시작했다. 에일린이 체중을 실어 반죽을 밀고 당길 때마다, 반죽 내부에 갇혀 있던 검붉은 마력의 독소들이 아주 미세한 연기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치이익-
반죽 표면에서 독성이 빠져나가며 기분 좋은 백색 증기가 뿜어 나왔다. 동시에, 도저히 밀가루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향긋하고 달콤한 풍미가 부엌 전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히 인위적인 향료의 냄새가 아니었다. 갓 피어난 봄꽃의 싱그러움과, 가을날 황금빛으로 물든 밀밭의 구수한 온기가 한데 어우러진 경이로운 향취였다.
“……!”
문가에서 감시하던 레온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코끝이 향기를 쫓아 실룩였다. 평소 마력 오염으로 인해 어떤 음식을 먹어도 모래를 씹는 것처럼 구역질을 해대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이 향기는 달랐다. 위장이 찌르르 울릴 정도로 맹렬한 공복감이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에일린은 멈추지 않았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뺨이 붉게 상기되었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반죽을 내리쳤다.
탁! 탁!
단단한 조리대에 반죽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석탄재처럼 어둡던 반죽이, 치대면 치댈수록 투명하고 맑은 우윳빛으로 변해갔다.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그대로 담아낸 듯, 반짝이는 금빛 마력 입자들이 반죽 결 사이사이에 촘촘히 박혀 빛나고 있었다. 독성 폐기물이라며 버려지던 밀가루가, 오염을 통제하는 황금빛 효모 반죽으로 완전히 재탄생하는 통쾌한 순간이었다.
[성공: 마력 독성 추출 완료!] [반죽 정화도: 99.8%] [효과: 섭취 시 마력 폭주 완화 및 체내 마력 정화 버프 부여 (지속시간 12시간)]
에일린은 완성된 반죽을 식빵 틀에 담아 뜨겁게 달궈진 화덕 속으로 밀어 넣었다.
화덕의 열기가 반죽에 닿자, 빵이 부풀어 오르는 고소한 냄새가 극대화되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밀가루의 구수함과, 천연 효모가 발효되며 뿜어내는 은은한 산미, 그리고 버터처럼 부드럽고 녹진한 향이 주방을 넘어 성채 복도까지 가득 메웠다.
리하르트는 황홀할 정도로 달콤한 공기 속에서 깊은 숨을 쉬었다. 머릿속을 짓누르던 무거운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기분이었다. 그의 이성이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 계집애는 위험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그 부드러운 정화의 향기에 굴복하고 있었다.
마침내, 화덕의 문이 열렸다.
타닥, 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촉촉하고 부드러운 수분을 머금은 식빵이 모습을 드러냈다. 겉은 노릇노릇하고 바삭한 갈색빛으로 먹음직스럽게 익었고, 속은 깃털처럼 가볍고 폭신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반으로 가르지 않아도 그 부드러운 탄력과 은은한 황금빛 마력의 잔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완벽한 식빵이었다.
에일린은 뜨거운 식빵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의 통증이 극에 달해 시야가 흐릿했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식빵을 크게 찢어냈다.
파스스-
바삭한 껍질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우윳빛의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식빵의 단면은 솜사탕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경고: 시한부 페널티 발동까지 남은 시간 3분!] [경고: 퀘스트 완료 조건인 ‘대상에게 섭취시키기’를 즉시 수행하십시오!]
에일린은 찢어낸 식빵 조각을 손에 쥐고 리하르트에게 다가갔다.
리하르트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짓이지?”
“독약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요.”
에일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사납게 타오르고 있었다. 리하르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에일린은 까치발을 들고 제 손에 들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겁고 부드러운 식빵 조각을 리하르트의 입술 사이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순간, 리하르트의 붉은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팽창했다.
입안을 가득 채운 온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거칠고 메마른 북부의 식재료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촉촉하고 쫄깃한 식감이 혀끝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씹을 때마다 갓 짜낸 우유처럼 고소하고 진한 풍미가 입안 가득 울려 퍼졌고, 뒤이어 정화된 천연 효모 특유의 은은하고 달콤쌉싸름한 감칠맛이 목구멍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단 한 모금이었다. 하지만 그 즉시 리하르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던 피비린내 나는 폭주의 불꽃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의 혈관 속에서 칼날처럼 날뛰며 뼈마디를 쪼개던 검붉은 마력의 잔재들이, 따스한 봄볕을 만난 눈 슬러시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려 잔잔한 물결로 변했다. 머릿속을 도끼로 내리치는 것 같았던 고질적인 두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머릿속이 맑은 얼음물로 씻어낸 듯 투명해졌다.
“……하아.”
리하르트의 거친 숨결 사이로 검붉은 탁기가 한 줌 빠져나갔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서 살기가 지워지고, 그 자리에는 난생처음 마주하는 경이로움과 당혹감이 가득 들어찼다.
동시에 에일린의 귓가에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보 해제: 퀘스트 ‘첫 정화 식빵’을 성공적으로 완료하였습니다!] [페널티가 취소됩니다. 전신 마비 증세가 해제됩니다.] [보상: 수명 3일 연장, 영지 재정 상태창 및 정화 제빵 기능 정식 활성화!]
가슴을 짓누르던 타들어 가는 통증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긴장이 풀린 에일린은 다리가 풀려 바닥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창백했던 뺨에 조금씩 온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살았다. 드디어 죽음의 고비를 한 번 넘긴 것이다.
“형님……?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저 계집애가 독을 탄 게 아니고요?”
레온이 황급히 다가오며 리하르트의 포켓을 붙잡았다. 하지만 레온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역시 코끝을 맹렬히 자극하는, 평생 맡아본 적 없는 따스하고 구수한 빵 향기에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리하르트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제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했다. 마력이 이토록 고요하고 흐트러짐 없이 흐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푸른빛을 띠는 작은 마력 측정석을 꺼내 들었다.
북부의 혹독한 규칙에 따라, 감정이 아닌 객관적인 ‘수치’로 이 기적을 증명해야 했다.
리하르트가 도마 위의 빵 조각에 반쯤 깨진 측정석을 가져다 대자, 차가운 푸른빛이 순식간에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들며 눈이 부시게 빛났다.
위이이잉-!
측정석이 버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듯한 구동음과 함께 숫자가 허공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마력 정화 수치: 99.8%]
“……말도 안 돼.”
리하르트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제국 최고의 신관이 축복을 내린 성수조차 정화 수치는 70%를 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썩어 들어가는 대지의 밀가루로 구운 한 조각의 빵이, 신성한 기적을 가볍게 뛰어넘는 수치를 기록한 것이다.
그때였다.
리하르트의 손에 들린 측정석의 황금빛 파동이 주방 안을 부유하던 미세한 마력 입자들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공명은 고스란히 레온의 목에 걸린 부서진 정화석 펜던트로 이어졌다.
화르륵!
“앗……!”
레온이 짧게 비명을 지르며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부서진 펜던트 틈새로 검붉은 오염된 마력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라면 펜던트가 마력을 흡수해야 했지만, 정화 마력의 급격한 자극에 흥분한 펜던트 내부의 마력이 역류하여 폭주하기 시작했다.
레온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목줄기를 타고 검은 핏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레온!”
리하르트가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폭주하는 마력의 장벽에 가로막혀 그의 손끝에 검은 불꽃이 튀었다. 리하르트마저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위기: 훼손된 정화석의 마력 역류로 인해 대상 ‘레온’이 마력 중독 치사 상태에 빠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경고: 해결하지 못할 경우 영민들의 호감도(가족의 신뢰도) 폭락으로 인해 즉사 페널티가 다시 부여됩니다!]
에일린의 시야가 다시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겨우 늘려놓은 수명이 다시금 바닥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에일린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레온을 바라보았다. 전생에 버림받았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지금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이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도마 위에 남은 가장 뜨거운 식빵의 심장부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폭주하는 검은 마력의 장벽을 향해 몸을 던졌다.
손가락 끝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에일린은 악착같이 레온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턱을 붙잡았다.
“오라버니, 제발 이걸 삼켜요……!”
그러나 레온의 붉은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가 에일린의 가녀린 손목을 부러뜨릴 듯이 움켜잡은 순간, 지하실 입구의 두꺼운 철문이 굉음과 함께 박살 나며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게 무슨 해괴한 소란이냐.”
먼지 자욱한 복도 끝에서, 심연보다 어두운 마력을 온몸에 두른 공작 디트리히가 거대한 대검을 바닥에 쓸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싸늘한 안광이 화덕 옆에 엉켜 있는 세 아이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