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의 혹독한 동토 위로 메마른 바람이 칼날처럼 울어댔고, 성벽 틈새로 스며든 냉기가 얼어붙은 창틀을 사각사각 두드렸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뜨거운 쇳소리가 목구멍을 사정없이 찢고 터져 나왔다. 침대 모서리를 움켜쥔 손끝이 하얗게 질려 부르르 떨렸다.
“쿨럭! 콜록, 흑……!”
에일린은 급히 상체를 웅크리며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으나, 손가락 틈새로 삐져나온 검붉은 액체가 하얀 시트 위로 무참히 흘러내렸다. 입안 가득 비린 혈향이 고였다. 폐부가 통째로 짓겨 나가는 듯한 감각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전생에서 홀로 차가운 병실에 버려져 마지막 숨을 내쉬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아무도 찾지 않던 그 고독한 죽음의 끝에서 눈을 떴을 때, 자신은 소설 속 베르하르트 공작가의 버림받은 양녀 에일린이 되어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귀 가문. 그곳에서 시한부 폐병을 앓는 소모품으로 살아가다 결국 비참하게 버려지는 조연.
‘겨우 다시 눈을 떴는데…… 이대로 또 버려져서 허무하게 죽을 순 없어.’
가슴을 쥐어짜는 고통 속에서 살고자 하는 갈망이 척추를 타고 뜨겁게 솟구쳤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따뜻한 온기가 있는 곳에 둥지를 틀고 싶었다. 그 처절한 결념이 허공을 두드린 순간이었다.
유리창이 일제히 공명하듯 웅장한 파열음이 귓가를 때렸다. 이어서 먼지 하나 없는 허공에 은하수가 쏟아지듯 푸르스름한 마력의 활자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잉크가 번지듯 가독성 높은 글씨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영지 회생의 베이킹 장부(帳簿)] - 소유주: 에일린 (시한부 상태) - 남은 수명: 72시간 14분 (수명 감소 중) - 영지 재정 현황: -45,000 골드 (극심한 적자) - 영민 호감도: 3% (폭락 및 적대적 상태) - 영지 토양 오염도: 89% (슈바르츠발트 마력 오염 심각)
[※ 경고: 영지 재정이 적자 상태를 유지하거나 영민들의 호감도가 0%에 도달할 시, 인과율 페널티가 즉각 발동합니다. 페널티 발동 시 전신 마비 통증이 시작되며 수명이 극도로 단축됩니다.]
[돌파 레시피: 오염지대의 독성 밀가루를 정화할 '초기 정화 식빵'의 배합법을 잠금 해제하시겠습니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베이킹 장부라니. 눈을 비벼 보아도 반투명한 푸른 창은 사라지지 않고 에일린의 시선을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72시간이라는 숫자가 잔인하게 깜빡이며 줄어들고 있었다. 이 기괴한 장부의 경고대로라면, 영지의 재정을 흑자로 돌려놓고 오염을 정화해야만 자신의 시한부 생명도 연장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침대 밑바닥에서 느껴지는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에일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턱끝에 맺힌 피를 소매깃으로 거칠게 닦아냈다.
그때, 어두컴컴한 방구석에서 바스락거리는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인기척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에일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곳에는 빗자루처럼 거친 머리칼을 늘어뜨린 소년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베르하르트 공작가의 막내이자 마력 오염 후유증으로 극심한 영양실조를 겪고 있는 레온이었다.
소년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에일린을 쏘아보고 있었다. 먹지 못해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손가락이 바닥을 긁고 있었다.
“……쳐다보지 마.”
가래가 끓는 듯 거친 목소리였다. 경계심과 적의로 가득 찬 눈빛 속에는 굶주림에 지친 짐승의 처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살인귀 가문의 핏줄답게 어린 나이임에도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매서웠다.
에일린은 본능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가뜩이나 미움을 받는 처지에 이 살가운 가문에서 밉보였다가는 장부의 호감도가 0%가 되기 전에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하지만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려던 찰나, 소년의 얇은 목덜미에서 이채를 띠는 물건이 에일린의 시선에 걸려들었다.
가느다란 사슬 끝에 매달린 반쪽짜리 펜던트.
본래 대지의 마력을 정화하는 용도로 쓰였을 정화석은 처참하게 금이 가 있었고, 검붉은 마력의 찌꺼기가 핏줄처럼 엉겨 붙어 오염되어 있었다.
웅, 웅.
에일린이 그 펜던트를 유심히 바라보는 순간, 심장 부근에서 기이한 파동이 일어났다. 베이킹 장부가 미세하게 떨리며 노란색 경보등을 켰다.
[감지: 훼손된 정화석의 파동이 소유주의 내재 마력과 공명합니다. 정화석의 오작동으로 인해 주변 마력 밀도가 왜곡되고 있습니다.]
소년의 목에 걸린 부서진 정화석이 에일린의 기운을 빨아들이듯 푸르스름한 안개를 내뿜었다. 에일린의 손끝이 찌르르하게 저려왔다.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저 펜던트가 뿜어내는 왜곡된 마력이 레온의 신체를 갉아먹고 있었고, 동시에 에일린의 마력과 이상 반응을 일으켜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거……”
에일린이 손을 뻗어 한 걸음 다가서려 하자, 레온이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어! 죽고 싶어?”
뼛속까지 시린 독설이 쏟아졌다. 그러나 소년의 손끝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제 몸을 지탱하기도 힘겨워 보이는 왜소한 체구. 저 상태로 며칠을 굶은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쿵! 쿵! 쿵!
성채 전체를 뒤흔들 듯한 묵직하고 가차 없는 발소리가 회랑을 타고 빠르게 다가왔다. 얼어붙은 대리석 바닥이 군화 굽에 찍힐 때마다 방 안의 집기들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레온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에일린 역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무시무시한 압박감과 피비린내 나는 마력의 파동을 풍길 존재는 이 성에 단 한 사람뿐이었다.
“에일린.”
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대답을 기다릴 인내심 따위는 없다는 듯, 곧바로 거대한 폭음이 방 안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두꺼운 참나무 문짝이 단 한 번의 발길질에 처참하게 박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렸다. 사나운 먼지바람과 함께 문턱을 넘어선 사내의 그림자가 좁은 방 안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리하르트 폰 베르하르트.
가문의 첫째이자 제국 최전방을 피로 물들인 전사. 그의 거구에서는 미처 정화되지 못한 마력의 잔재가 검붉은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시퍼런 안개가 서린 대검이 들려 있었고, 검날 끝에서는 아직 식지 않은 짐승의 검은 피가 뚝뚝 떨어져 방바닥을 더러웠다.
리하르트의 적색 눈동자가 에일린을 꿰뚫을 듯이 고정되었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무엇을 도모하고 있었지?”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리하르트가 한 걸음 내딛자, 그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숨이 턱 막혔다. 그의 뒤편으로 비치는 복도의 횃불 불빛이 검날을 타고 서늘하게 번뜩였다.
“형님…….”
구석에 있던 레온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으나, 리하르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모든 신경은 오직 침대 머리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는 에일린에게 쏠려 있었다.
“남부의 세작들이 이 성채 주변을 기웃거리는 시기에, 하필이면 네년의 방에서 기이한 마력 반응이 감지되었다.”
리하르트의 검끝이 느릿하게 들려왔다. 쇠붙이가 쓸리는 서늘한 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이곳에 심어둔 독초가 드디어 싹을 틔운 것인가. 아니면 내 목숨을 노릴 독약이라도 달이고 있었던 거냐?”
그의 말은 단순한 의심이 아니었다. 언제든 검을 휘둘러 에일린의 목을 벨 준비가 되어 있는 포식자의 확신이었다.
실제로 베르하르트 가문은 외부의 독살 시도와 마력 오염으로 극도의 신경쇠약에 걸려 있었다. 에일린이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색을 보이거나, 변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그 즉시 목과 몸이 분리될 터였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찢어질 것 같았다. 장부의 남은 수명 수치가 시시각각 줄어드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이명처럼 울렸다.
[남은 수명: 72시간 02분] [위기 경보: 대상의 적대 수치가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즉각적인 가치 증명이 필요합니다.]
에일린은 차가운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여기서 주저앉아 울기만 하면 끝이야. 전생처럼 허망하게 버려질 순 없어.’
그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달라졌다. 두려움으로 흔들리던 눈망울에 단단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에일린은 리하르트의 살기 어린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검끝이 가리키는 서늘한 죽음의 문턱에서, 에일린은 떨리는 손을 뻗어 허공의 장부를 터치했다. 오직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장부의 페이지가 거칠게 넘어가며, 독성 대지의 밀가루를 정화할 비책을 드러냈다.
[초기 정화 식빵 레시피 가동 준비 완료.] [필요 재료: 슈바르츠발트의 독성 밀가루, 정화석의 파동 공명, 소유주의 정화 마력.]
‘구울 수 있어. 아니, 구워야만 해.’
에일린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자신을 짓누르는 사선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얇은 입술이 열리는 순간, 리하르트의 붉게 물든 검끝이 바람을 가르며 에일린의 가녀린 목줄기를 향해 짓쳐 들어왔다. 은빛 검날이 그녀의 하얀 살결에 닿기 직전, 단 1밀리미터의 거리에서 멈추어 섰다.
목줄기에 와닿는 서슬 퍼런 감각에 소름이 소스라치게 돋았다. 얇은 피부 위로 붉은 피가 한 방울 배어 나와 차가운 검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리하르트의 붉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대치 속에서, 에일린은 바르르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이 오히려 흐려지던 정신을 또렷하게 깨웠다.
“말해라.”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가녀린 목줄기가 단숨에 끊겨 나가기 전에, 네 가치를 증명할 기회를 주지.”
북부의 증명 법칙. 감정 어린 호소나 눈물은 이곳에서 아무런 무기가 되지 못했다. 오직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수치와 이득만이 살인귀들의 검을 멈출 수 있었다.
에일린은 마른침을 삼키며,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장부의 수치를 빠르게 훑었다. 리하르트의 머리 위로 붉게 일렁이는 기괴한 수치가 보였다.
[대상: 리하르트 폰 베르하르트] - 마력 오염도: 92% (폭주 임계점 도달) - 상태: 극심한 두통 및 전신 신경 타는 듯한 통증 지속 중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에일린은 턱끝을 타고 흐르는 피를 무시한 채, 리하르트의 붉은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오라버니의 머릿속을 짓누르는 그 불길 같은 통증…… 제가 잠재워 드릴 수 있어요.”
리하르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검날을 잡은 그의 손가락에 시퍼런 힘줄이 돋아났다.
“감히 내 상태를 멋대로 넘겨짚고 목숨을 구걸하는군. 남부의 첩자들이 쓰던 수법과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구걸이 아니에요. 거래를 제안하는 거죠.”
에일린은 차갑게 얼어붙은 방바닥을 딛고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켰다. 가슴속 폐포가 쥐어짜이듯 아파왔지만, 목소리만큼은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고정했다.
“슈바르츠발트의 독성 밀가루를 가져다주세요. 그리고 레온의 목에 걸린 저 정화석도 제게 넘겨주시면 돼요. 딱 하루의 시간만 주신다면, 오라버니의 마력 폭주를 완화할 수 있는 완벽한 ‘해독제’를 만들어 보이겠어요.”
“해독제라니. 연금술사들도 포기한 북부의 저주를, 온실 속 화초에 불과한 네가 무슨 수로 고친다는 말이냐.”
리하르트가 비웃음을 흘리며 검끝에 힘을 실으려던 찰나였다.
웅웅웅하는 기이한 진동음과 함께,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레온의 목덜미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부서진 정화석 펜던트가 에일린의 몸에서 흘러나온 미세한 정화 마력과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고: 훼손된 정화석과의 공명으로 인해 정화 레시피의 예비 가동이 강제로 시작됩니다.]
그 순간, 삭막하고 피비린내 나던 방 안의 공기가 급격하게 뒤바뀌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대기 속으로, 갓 구워낸 빵처럼 달콤하고 구수한 온기가 은은하게 번져 나갔다. 갓 끓여낸 우유의 부드럽고 따스한 향과 노릇노릇하게 익은 밀가루의 고소한 풍미가 코끝을 부드럽게 간질였다. 마치 혹독한 겨울 한가운데서 봄날의 햇살을 한 입 베어 문 듯, 포근하고 달콤쌉싸름한 향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
리하르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검붉은 마력의 불꽃이, 그 부드러운 향기에 닿자마자 거짓말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머릿속을 도끼로 찍어 내리는 것 같았던 극심한 두통이 단 몇 초 만에 씻은 듯이 옅어졌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적적인 정화의 감각에 리하르트는 황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기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대로 된 재료 없이 시스템을 무리하게 가동한 대가가 에일린의 가녀린 육체를 덮쳤다.
“큭……!”
가슴뼈 안쪽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인과율의 통증이 에일린의 전신을 강타했다. 온몸의 신경이 마비되는 듯한 감각에 에일린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위기: 정화 재료 부족으로 인한 인과율 역류 현상 발생!] [긴급 퀘스트 강제 가동: ‘첫 정화 식빵’을 12시간 내에 구워내십시오. 실패 시 시한부 페널티로 인해 즉사합니다.]
새하얗게 질린 에일린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다시금 마른 기침과 함께 붉은 혈흔이 튀었다.
리하르트는 검을 거두며 쓰러진 에일린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적색 눈동자 속에는 아까의 살기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의문과 묵직한 탐색의 안개가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달콤하고 따스한 버터 향 속에서, 소년 레온 역시 펜던트를 움켜쥔 채 넋을 잃고 에일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에일린?”
리하르트가 낮게 읊조리며 그녀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나 에일린의 시야는 이미 검게 멀어지고 있었다. 시간 제한을 알리는 붉은색 타이머만이 허공에서 잔인하게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