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채 외곽을 감싸 안은 늦가을 밤의 칼바람이 광산 입구의 바위틈을 스치며 마치 구슬픈 피리 소리 같은 파열음을 내질렀다. 거칠게 몰아치는 가을바람 속에 섞인 마력의 쇠 냄새가 코끝을 아리게 찔렀다.
방금 전까지 광산 지하를 가득 메우고 있던 보랏빛 마력 가스가 완전히 걷히자, 비로소 어둠에 잠겨 있던 갱도의 윤곽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맑아진 공기 사이로, 무너진 바위 더미 너머를 다급하게 가로지르는 짙은 보라색 망토의 실루엣이 에일린의 시야에 박혔다.
비비안 다투아였다.
그녀의 품에는 베르하르트 공작가의 비공식 광산 권리를 증명하는 푸르스름한 마력 인장이 찍힌 서류 뭉치가 꼭 쥐여 있었다. 혼란을 틈타 가문의 가장 거대한 자산을 통째로 훔쳐 달아나려는 비열한 도둑질이었다.
"거기 서요...!"
에일린이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급격하게 마력을 소모한 다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슈바르츠발트의 경계에서 독성 마력 연기에 노출되었던 발목 통증이 뒤늦게 날카로운 가시처럼 뼈마디를 찔러왔다. 가파른 내리막 광로는 깨진 광석 파편과 얼어붙은 흙바닥으로 가득해 당장이라도 굴러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앗,"
중심을 잃고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찰나였다.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단단하고 묵직한 온기가 에일린의 허리를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가죽 장갑의 거친 촉감과 함께,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파열음 같은 숨소리가 들렸다.
"조심해라."
리하르트였다. 그는 한 손으로 에일린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벽면의 돌출된 바위를 짚으며 가파른 내리막길을 바람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의 움직임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오차도 없었다. 수치와 합리성만을 따지는 차가운 검사답게,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한 궤적을 그리며 찰나의 순간에 에일린을 품에 안고 지면에 착지했다.
에일린의 뺨에 리하르트의 단단한 가슴팍이 닿았다. 평소라면 얼음처럼 차가웠을 그의 체온이, 지금은 기묘할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다. 리하르트는 에일린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면서도, 그녀의 발목 상태를 살피듯 손을 떼지 않았다.
"다리를 다쳤으면서 무모하게 뛰어들다니. 네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하지만 비비안이... 가문의 서류를 가지고 도망쳐요. 저걸 놓치면 영지의 재정이 다시..."
에일린이 다급하게 리하르트의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여전했다. 혹여나 자신이 이 상황을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해 다시 가문의 걸림돌이 될까 봐, 버림받았던 전생의 기억이 차가운 족쇄처럼 발목을 옥죄었다.
그때, 뒤에서 거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레온이 씩씩거리며 쫓아왔다.
"야! 에일린! 너 진짜 제정신이야? 왜 멋대로 뛰어 가!"
레온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분노보다 깊은 걱정이 서려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그의 마음은 에일린이 구워준 버터 향 가득한 타르트 한 조각에 이미 허물어진 지 오래였다.
그 순간, 레온의 목덜미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그의 목에 걸려 있던, 반쯤 부서진 정화석 펜던트였다.
펜던트의 깨진 틈새로 붉은 마력 파동이 불규칙하게 요동치며 주변의 미세한 마력 찌꺼기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동시에 에일린의 손끝에 남아 있던 정화 마력이 그 파동과 공명하듯 웅웅거리는 진동을 일으켰다.
"어...?"
에일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머릿속에서 복잡한 수식과 마력 흐름의 궤적이 순식간에 정렬되기 시작했다.
'이건... 깨진 정화석의 파동이 내 제빵 마력의 정화 성분과 완벽하게 맞물리고 있어.'
평범한 정화석은 일정한 효율로 마력을 중화할 뿐이지만, 부서진 틈새로 발생하는 변칙적인 파동에 에일린 고유의 정화 베이킹 마력이 융합되자, 마력을 빨아들이는 속도가 수십 배로 증폭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었다.
"레온, 잠시만 그 펜던트 좀 보여줘 봐."
"하아? 이 바쁜 와중에 갑자기 내 펜던트는 왜?"
레온이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목을 내밀었다. 에일린은 손가락 끝을 대어 펜던트의 파동을 조율했다.
"내 정화 마력이 이 깨진 틈새의 불규칙한 파형을 타고 들어가면서 흡수력을 가속한 거야. 그래서 아까 그 엄청난 양의 광산 가스를 한순간에 빨아들여 정화할 수 있었던 거였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부서진 정화석의 파동을 역이용하여 정화 성능을 극대화하는 새로운 '정화 베이킹 공식'이 머릿속에 완벽하게 정립되는 순간이었다. 에일린의 눈동자가 흥분으로 반짝였다.
[시스템 알림: '부서진 정화석 융합 공식'이 영구 등록되었습니다.] [정화 효율이 기존 대비 30배로 증폭됩니다.] [수명 연장 조건 게이지가 상승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푸른빛의 베이킹 장부가 기분 좋은 알림음을 울렸다. 에일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쓸모를 또 하나 증명해 냈다는 안도감이 가슴을 따뜻하게 채웠다.
하지만 지금은 기뻐하고 있을 시간 없었다. 비비안이 사라진 어둠 속의 갈림길은 수십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그녀가 어디로 숨었는지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이 안은 미로와 다름없다. 기사들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해야겠군."
리하르트가 검자루를 꽉 쥐며 차갑게 제안했다. 그러나 효율성을 중시하는 그조차도 이 넓은 광산에서 쥐새끼 한 마리를 쫓는 것에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때, 에일린의 시야에 다시 한번 반투명한 장부가 펼쳐졌다.
[경로 추적 기능 활성화] [무단 침입자 '비비안 다투아'의 마력 잔재 및 이동 경로를 탐색합니다.]
장부의 하단에 붉은색 실선으로 그려진 홀로그램 지도가 입체적으로 떠올랐다. 복잡하게 얽힌 광로들 중에서, 단 하나의 경로만이 붉은 핏빛으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선의 끝은 광산 깊숙한 곳의 막힌 바위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요, 기사님들을 흩어지게 할 필요 없어요."
에일린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며 서쪽의 후미진 절벽 벽면을 가리켰다.
"저기예요. 저 단단해 보이는 바위벽 뒤에 비밀 밀실로 통하는 문이 숨겨져 있어요. 비비안은 지금 그 안으로 도망쳤어요."
리하르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저 벽은 광산이 처음 개발될 때부터 막혀 있던 화강암 암반이다. 저 너머에 통로가 있을 리가..."
"제 눈에는 보여요. 비비안이 남긴 비열한 탐욕의 흔적들이요."
에일린은 품속에 들어 있는 비비안의 불법 곡물 계약 초안 쪽지를 슬쩍 만졌다. 남부 다투아 상단이 베르하르트를 굶겨 죽이려 했던 음모의 증거. 그 더러운 음모의 꼬리를 여기서 완전히 잘라내야 했다.
리하르트는 에일린의 확신에 찬 눈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전의 그였다면 수치적 근거가 없는 주장을 묵살했겠지만, 이미 에일린은 수없이 기적을 증명해 보였다.
"네 말을 믿지."
리하르트가 검을 뽑아 들고 벽을 향해 전진하려던 찰나, 갱도 입구 쪽에서 묵직하고 압도적인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벅, 철벅.
검은 갑옷을 입은 거구의 기사들을 거느리고, 베르하르트 공작가의 가주이자 피도 눈물도 없는 실리주의자인 디트리히 폰 베르하르트가 걸어 나왔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어두운 광산 안에서도 타오르는 불꽃처럼 번뜩였다.
"가주님."
리하르트와 레온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디트리히는 에일린의 앞에 멈춰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에일린의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는 냉철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네가 비비안의 도주 경로를 알아냈다고 들었다, 에일린."
"네, 아버님."
에일린은 침착하게 대답하며 장부가 보여주는 지도를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정리했다.
"비비안은 이 바위벽 너머의 비밀 통로를 통해 광산 북쪽의 폐기된 환기구로 탈출하려 하고 있어요. 그곳은 외부의 다투아 상단 수송대와 바로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지금 바로 그 퇴로를 차단해야 합니다."
디트리히는 에일린의 말을 잠자코 듣더니, 이내 낮게 읊조렸다.
"폐환기구라... 과연, 쥐새끼가 빠져나가기 딱 좋은 구멍이군."
그가 손을 들어 뒤편의 기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광산의 모든 방어 아티팩트를 가동해라. '감옥 사슬 벽(Iron Chain Wall)'을 펼쳐라."
"예, 가주님!"
부관의 외침과 함께 기사들이 마력 제어 장치로 달려갔다.
쿠구구구궁...!
광산 전체가 거대하게 진동하며, 천장과 벽면의 틈새에서 두꺼운 마력 사슬과 강철 격벽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에일린이 제시한 탈취 경로의 모든 출구와 환기구가 단 몇 초 만에 거대한 쇳덩이들로 완벽하게 봉쇄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추격전이 아니었다. 적들의 퇴로를 미리 완벽하게 지도로 파악하고, 강력한 무력을 뒤에 배치하여 상대를 도끼 든 짐승처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완벽한 사이다식 포위망이었다.
"가자. 쥐새끼가 덫에 걸려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으러."
디트리히의 서늘한 미소와 함께, 공작가의 정예 기사들이 에일린이 가리킨 바위벽을 향해 돌격했다. 리하르트의 검기가 바위벽을 일격에 부수어 버리자, 그 너머로 어둡고 좁은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아악! 이게 왜 안 열려! 열리란 말이야!"
지하 통로 깊은 곳에서 비비안의 앙칼진 비명과 함께 쇠사슬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사들이 횃불을 밝히며 통로 안으로 들이닥치자, 막다른 강철 격벽 앞에서 발악하고 있던 비비안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과 흙먼지로 더러워진 보라색 망토는 방금 전까지의 도도했던 귀족 영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비비안 다투아."
리하르트의 검끝이 비비안의 목덜미 바로 앞에서 멈췄다. 서릿발 같은 살기에 비비안은 힉,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너, 너희들이 어떻게 여길... 이 통로는 아무도 모를 텐데...!"
비비안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다가, 그의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에일린을 발견하고는 이를 갈았다.
"너...! 에일린! 네년이 또 내 일을 방해한 거냐!"
"방해한 게 아니에요. 당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뿐이죠."
에일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비안은 발악하듯 품에 안고 있던 서류 뭉치를 꽉 쥐었다. 그것은 베르하르트 공작가를 통째로 흔들 수 있는 불법 계약서들과 광산 권리 문서들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서류들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듯, 품 안 깊숙이 밀어 넣으며 마력 봉인을 발동시키려 했다.
"이걸 순순히 넘겨줄 줄 알고? 이건 내 거야! 다투아 상단의 것이라고!"
비비안이 전력을 다해 마력을 쥐어짜 내며 서류 봉투에 봉인 마법을 덧씌우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스락.
그녀의 얇은 가죽 가방 틈새에서, 낡고 빛바랜 양가죽 책 한 권이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비비안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공중을 빙글 돌며 떨어진 그 조그만 책자는 에일린의 발밑으로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서류가 아니었다.
양가죽 표지 위에는 빛바랜 금박으로 다투아 상단의 비밀 인장과 함께, 제국의 고위 귀족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비비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아, 안 돼...! 그건 보지 마...!"
에일린의 시선이 발밑에 떨어진 낡은 양가죽 비밀 제정 일지로 향했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불길한 마력의 기운이 에일린의 심장을 서늘하게 두드렸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