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에일린의 가죽 구두 앞코에 낡은 양가죽 책이 멈춰 섰다. 표지 가장자리에 묻은 검은 마력의 잔재가 에일린의 발끝을 찌릿하게 자극했다. 비비안의 얼굴은 흙먼지 속에서도 핏기가 가신 채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에일린은 망설임 없이 허리를 숙여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아, 안 돼! 그거 놓지 못해? 감히 천한 양녀 주제에 어디에 손을 대는 거야!"
비비안이 비명을 지르며 쇠사슬을 흔들었지만, 리하르트의 푸른 검날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며 미세한 핏방울을 피워 올렸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각에 비비안은 힉, 소리를 내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지하 통로의 미세한 바위 틈새로, 낙엽을 태우는 서늘하고 쓸쓸한 늦가을의 바람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지하 광산 특유의 습하고 매캐한 마력 냄새 속에서, 에일린은 품 안 깊숙이 넣어두었던 가죽 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지난날 성채 서재의 비공개 장부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비비안의 친필 서명이 담긴 남부 불법 곡물 계약 초안 쪽지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뭔지 기억하시나요, 비비안 영애?"
에일린이 빛바랜 쪽지를 펼치자, 비비안의 보랏빛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 그게 왜 네년 손에……!"
"당신이 우리 베르하르트 영지를 굶겨 죽이려고 남부 상단과 맺으려던 독점 계약서 초안이죠. 그리고 여기, 방금 떨어뜨리신 이 비밀 제정 일지."
에일린이 양가죽 책을 펼쳐 들자, 그녀의 눈앞에 투명한 청빛의 반투명 장부가 웅장하게 떠올랐다.
[시스템 경보: 특수 유물 '다투아 상단 비밀 일지' 감지.] [대조 결과: 5화에서 획득한 '남부 불법 곡물 계약 초안'과의 필적 및 마력 서명 일치율 99.8%.] [상태: 비비안 다투아가 황실 고위 귀족 및 검열단에게 제공한 뇌물 목록과 북부 곡물 차단 음모의 상세 내역이 기록되어 있음.]
에일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언제나 차가운 계산기 소리만 내던 베이킹 장부가 오늘따라 가장 든든한 아군처럼 느껴졌다. 에일린은 일지의 첫 페이지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제국력 798년 9월, 황실 검열단 제3조장에게 남부 특산 비단 50필과 마력석 100보석 전달. 목적, 베르하르트 영지의 광산 정화 실패 판정 및 곡물 수입로 전면 통제에 대한 묵인. 서명, 비비안 다투아."
"조, 조용히 해! 닥쳐! 그건 날조야! 가짜라고!"
비비안이 광기에 젖은 눈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에일린의 낭랑한 목소리는 어두운 지하 통로를 타고 뒤편에 서 있던 황실 검열단원들의 귀에 똑똑히 박혀 들어갔다.
황실 직권서를 손에 쥐고 베르하르트 가문을 압박하려던 검열단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자신들의 상관이자 조장의 이름이, 그것도 명백한 불법 뇌물 수수 내역과 함께 폭로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건 모함입니다! 공작가에서 황실을 모독하기 위해 위조한 것이 분명합니다!"
검열단의 부단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검자루를 꽉 쥐었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그들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지하 광산의 냉기보다 더 매서웠다.
"위조라."
리하르트가 검을 비비안의 목에서 거두고 검열단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다투아 상단의 고유 마력 인장은 제국 서부의 특수 광물로만 제작되어 위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보가 여기 있군. 검열단 부단장, 그대들의 목숨이 몇 개나 되기에 황실의 이름을 팔아 반역죄에 동참하는가?"
"반, 반역이라니요! 저희는 그저 황명에 따라……!"
"남부 곡물권을 무단으로 통제해 제국의 최전방이자 마물의 방패인 베르하르트 영지를 고사시키려 한 행위. 이것이 반역이 아니면 무엇이지? 황태자 전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그대들의 가문이 무사할 것 같나?"
리하르트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동굴 벽을 울렸다.
에일린은 뒤를 돌아보며 슬몃 미소를 지었다. 리하르트의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이 일지에는 황태자의 정적들이 비비안과 결탁한 정황까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황태자에게 이 장부가 들어간다면, 비비안은 물론이고 그녀와 한배를 탄 검열단 모두가 단두대 이슬로 사라질 터였다.
"이리 내놓으십시오! 그 장부는 황실 검열단이 회수하겠습니다!"
검열단 부단장이 다급하게 에일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붉은색 마력 장벽이 에일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앙! 검열단원의 손이 장벽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누구 맘대로 내 누나한테 손을 대?"
까칠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레온이었다. 레온은 아직 마력 오염의 여파로 안색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에일린의 앞을 단단히 가로막고 서서 검열단원들을 쏘아보았다. 그의 손끝에서 일렁이는 붉은 마력은 이전처럼 미쳐 날뛰는 폭주가 아닌, 흔들림 없이 통제된 강인한 힘이었다.
에일린은 레온의 작은 등을 바라보며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해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력 통증으로 괴로워하며 모두를 밀어내던 아이였다. 에일린이 구워낸, 버터 향이 가득하고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던 미니 타르트를 먹고 나서야 마음을 열었던 레온이, 이제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앞장서고 있었다.
고소하게 구워진 크러스트의 바삭함과 입안을 가득 채우던 따스한 단맛의 기억이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 준 것이다.
"검열단 여러분."
에일린이 레온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 장부와 불법 계약 초안은 즉시 제국 황실과 황태자 전하께 직접 송부될 예정입니다. 물론, 베르하르트 공작가의 공식 인장과 함께 말이죠. 반역죄의 공범이 되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아실 텐데요?"
검열단 부단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시선이 에일린의 손에 들린 일지와, 그녀를 호위하듯 둘러싼 베르하르트 가문의 무시무시한 형제들에게로 향했다.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여기서 공작가와 척을 지고 비비안을 감싸다가는 자신들의 목숨줄이 먼저 끊어질 판이었다.
"……비비안 다투아 영애를 체포하라."
부단장의 무거운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열단 기사들이 비비안의 양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이거 놓아라! 더러운 손으로 어딜 만지는 거냐! 내가 누군지 잊었어? 다투아 상단의 후계자다! 너희 공작가는 내 곡물이 없으면 겨울을 나지도 못하고 굶어 죽을 것이다!"
비비안은 머리칼이 산발이 된 채 미친 듯이 발악했다. 그녀의 눈이 에일린을 향해 찢어질 듯 부릅떴다.
"에일린! 네년이 감히 내 모든 것을 망쳤어! 그깟 밀가루 냄새 풍기는 빵 따위나 굽는 미천한 년이! 네년에게 어울리는 건 시궁창 속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것뿐이다! 베르하르트 가문이 널 정말 가족으로 생각할 것 같아? 너도 결국 버려질 소모품일 뿐이야!"
비비안의 악에 받친 저주가 좁은 통로를 가득 채웠다.
그 순간, 에일린의 가슴 깊은 곳에서 전생의 트라우마가 고개를 들려 했다. 버림받았던 기억,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받지 못하고 차가운 병실에서 홀로 죽어가야 했던 전생의 차가운 온기가 발끝부터 타고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에일린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스윽.
그때, 크고 단단한 손 하나가 에일린의 어깨를 지그시 감싸 안았다. 리하르트였다. 그는 검을 칼집에 꽂아 넣으며, 비비안을 향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모품이라니. 다투아 영애, 말을 조심해야지."
리하르트의 목소리에는 이전에 없던 확고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에일린은 베르하르트 공작가의 정식 회계관이자, 영지의 대지를 치유하는 유일한 정화관이다. 감히 공작가의 일원에게 그 더러운 입을 놀린 대가는 네 가문 전체의 파멸로 치르게 될 것이다."
"뭐, 뭐라고……?"
"그리고 착각하고 있군. 우리가 네놈들의 곡물에 의지해 겨울을 날 거라 생각했나?"
리하르트가 품에서 공작가의 재무 도장이 찍힌 가문 귀속 재무 파일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에일린이 가동한 '효능성 식량 공급망(The Bread Line)'의 최신 실적 장부였다.
"슈바르츠발트의 독성 밀을 완벽히 정화하여 생산한 식량이 이미 영지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다. 남부의 곡물 따위는 이제 우리 영지에 단 한 톨도 필요 없다. 오히려 오늘부로 다투아 상단이 북부에 보유하고 있던 모든 물류 거점과 곡물 유통권은 반역죄의 벌금으로 베르하르트 공작가에 몰수, 귀속된다."
"아, 아아……!"
비비안의 입에서 넋이 나간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남부 다투아 상단이 수십 년간 공들여 쌓아 올린 북부의 경제적 독점권이, 단 한순간에 베르하르트 가문의 손으로 완전히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것도 자신들이 그토록 무시했던 '독성 밀'과 에일린의 '베이킹'으로 인해 영지가 완벽한 식량 자급자족을 이뤄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스템 메시지: 영지 재정 대폭 개선!] [남부 곡물 유통권 및 물류 거점 가문 귀속 완료.] [베르하르트 영지 재정 흐름: 적자에서 '대규모 흑자'로 전환!] [수명 연장 버프 활성화: 잔여 수명이 180일 추가 연장됩니다. 전신 마비 페널티가 완전히 해제됩니다.]
에일린의 눈앞에 떠오른 장부의 숫자들이 붉은색에서 화사한 황금빛으로 변하며 요동쳤다. 가슴을 짓누르던 시한부의 통증이 기적처럼 사라지고, 온몸에 따뜻한 활력이 감돌기 시작했다. 에일린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가자, 에일린. 이런 더러운 자의 비명은 우리 막내의 귀에 해롭다."
리하르트가 에일린의 등을 부드럽게 밀어주었다.
"응! 가자, 누나. 나 배고파. 저번에 구워준 그 노릇노릇하고 달콤한 타르트 또 해줘."
레온이 에일린의 소매자락을 꼬물거리며 잡아당겼다. 까칠한 척하면서도 에일린의 눈치를 살피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에일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레온. 성채로 돌아가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디저트를 만들어 줄게."
비비안은 절망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며 검열단원들의 손에 이끌려 어두운 통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파멸은 완벽했고, 베르하르트 영지는 이제 남부의 오랜 사슬에서 벗어나 완벽한 경제적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서서 통로를 빠져나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하 광산의 깊은 심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불길하고 차가운 마력의 파동이 강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에일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전에 지하 창고 구석에서 발견했던, 푸르스름하고 은은한 빛을 내뿜던 '고대 마력 결정체 침전물 단지'의 파동과 매우 유사하지만, 훨씬 더 거대하고 광포한 마력이 지하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콰구구구궁-!
갑작스러운 격렬한 지진과 함께 머리 위에서 커다란 바위 파편들이 쏟아져 내렸다.
"이, 이게 무슨 소리지?"
레온이 에일린의 품으로 뛰어들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리하르트 역시 즉시 검을 뽑아 들고 주위를 경계했다.
저 멀리, 비비안이 탈출하려던 비밀 통로의 막다른 격벽 구석에서 검은 로브를 쓴 비비안의 최측근 부하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마력의 붉은 빛이 명멸하는 기묘한 장치가 들려 있었다.
"흐흐흐…… 다투아 상단이 무너진다면, 이 광산도, 베르하르트 놈들도 모두 이 지하 깊은 곳에 묻어버리겠다!"
"멈춰라!"
리하르트가 검기를 날렸지만, 부하의 손가락은 이미 장치의 붉은 보석을 강하게 내리누른 뒤였다.
딸깍.
장치와 연결된 지하 광산의 핵심 마력관들이 일제히 융합 폭발을 일으키며, 대지가 미친 듯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발밑의 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그 너머로 시뻘건 마력 폭주의 불길이 에일린과 공작가를 향해 집어삼킬 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