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황홀할 정도로 고요해진 설원 한복판에서,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의 데온이 미소를 지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그의 검붉은 마력이 실비아의 손가락 끝에서 은빛 입자로 부서져 내렸다. 데온은 제 이마를 그녀의 어깨에 나른하게 기댔다. 훅 끼쳐오는 얼음과 피색 가득한 체온 속에서, 그의 입술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내 영혼의 주인이 실비아 너라는 가계약이 마침내 종신 계약으로 체결된 거다.”

그가 조용히 맹세하는 순간, 귓가에서 시스템의 경쾌한 벨 소리가 뾰로롱 울려 퍼졌다.

[★퀘스트 성공! 임계점 오버히트 진정 완료!★] [결과 보고: 대상 ‘데온 폰 하이드리히’의 집착도 99.9%에서 안정화.] [보상 수령: 천문학적인 영지 정화 자산 에너지(고순도 마력 원석 환산 가치 10,000,000골드 상당)가 회원님의 가상 장부에 예치되었습니다!] [특수 해금: 하이드리히 가문의 고대 ‘혈인(血人) 계약’ 트리거가 해제되었습니다. 데온 폰 하이드리히는 이제 오직 ‘실비아 드 라벨’의 승인 하에만 마력을 방출할 수 있는 완전 귀속 상태로 전환됩니다.]

눈앞에 번쩍 뜨인 반투명한 이메랄드빛 안내 창을 보며 실비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날뛰던 데온의 가슴팍에 손을 얹은 채, 실비아는 걸치고 있던 짙은 자두색 벨벳 코트드레스의 옷깃을 여몄다. 깃털처럼 보드라운 은빛 여우털 칼라가 목덜미를 스쳤고, 가슴팍에 달린 정교한 물방울 모양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차가운 겨울 햇살을 받아 눈이 시리도록 반짝였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미세한 비단실로 짜인 레이스 장갑을 톡톡 튕기며 데온을 올려다보았다.

“종신 계약이라니요, 대공 전하. 제 허락도 없이 그런 무서운 단어를 비즈니스에 도입하시면 곤란합니다.”

“이미 입술을 도장 삼아 찍어 누른 건 너다, 실비아.”

“그건 가파르게 치솟는 리스크를 상쇄하기 위한 불가피한 자산 유동화 조치였을 뿐입니다. 일종의 단기 긴급 융자였죠.”

“융자라니. 내 심장을 통째로 강탈해 가 놓고 참으로 지독한 회계사로군.”

데온의 붉은 눈동자가 호선물결을 그리며 부드럽게 휘어졌다. 살육의 굶주림으로 피비린내를 풍기던 서슬 퍼런 괴물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눈앞의 여인을 한 입에 삼키고 싶어 안달이 난 거대한 맹수 한 마리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실비아는 그의 탄탄한 가슴을 가볍게 밀쳐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벌린 채 얼어붙은 보좌관 펠릭스 에스토바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깃펜 끝에서는 잉크가 뚝뚝 떨어져 하얀 눈밭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실, 실비아 영애……! 대체 이게,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해괴망측이라니요, 에스토바 경. 아주 지극히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구조조정 현장을 보고 계시면서 말이 많으십니다.”

실비아는 입꼬리를 샐쭉하게 끌어올리며 품 안에서 구겨진 양장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지난 6화에서 펠릭스가 실비아를 완벽히 파멸시키고 북부에서 쫓아내기 위해 교묘하게 들이밀었던 ‘빙벽 정화 임대 및 양도 계약서’였다.

당시 펠릭스는 계약서 구석에 아주 미세한 필체로 ‘정화 사업 실패 시 실비아 드 라벨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영지에서 영구 추방하며, 해당 영토의 소유권은 대공가로 무상 귀속된다’라는 치명적인 재정 독소 파기 조항을 심어두었었다.

실비아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이 독소 조항이야말로 합법적으로 대공가의 영토를 집어삼킬 최고의 낚싯바늘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모르는 척 서명해 주었던 것이다.

“자, 에스토바 경. 당신이 친절하게 제게 넘겨준 이 검은 빙벽 지대 말입니다.”

“그, 그건 분명 마수의 독기로 완전히 오염되어 손을 쓸 수 없는 불모지……!”

“에이, 장사 하루 이틀 하십니까? 쓰레기 매립지인 줄 알고 싸게 넘긴 땅에서 석유가 터지면, 그건 판 사람 잘못이지 산 사람 잘못이 아니잖아요?”

실비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영악하게 빛났다.

그녀는 가상 장부에 잠들어 있는 ‘천문학적인 영지 정화 자산 에너지’를 마우스 클릭하듯 가볍게 터치했다.

[시스템 메시지: ‘영지 정화 자산 에너지’ 10,000,000골드 분량을 현물 자산으로 실체화합니다.] [가공 형태: 고순도 에메랄드 은빛 마력 결정(魔力結晶).] [타겟 지역: 하이델그라드 검은 빙벽 전역.]

쿠구구구구궁-!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황태자 루벤이 마수들을 풀어놓기 위해 폭파했던 검은 빙벽의 잔해들이 일제히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냈다. 시꺼멓게 썩어 들어가던 대지 위로, 믿을 수 없을 만큼 투명하고 아름다운 은빛 기둥들이 우후죽순 솟구쳐 올랐다.

파자작! 파작!

마치 얼음꽃이 피어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마수의 썩은 악취와 매연이 단숨에 휘발되었다. 사방이 황홀할 정도로 투명한 에메랄드빛 광채로 가득 찼다. 단순한 얼음이 아니었다. 마법사들이 침을 흘리며 전 재산을 바쳐서라도 사고 싶어 안달하는 고순도의 마력 결정들이, 산더미 같은 광맥을 이루며 끝도 없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마력이…… 정화되다 못해 광산이 되었다고? 그것도 제국 전체를 사고도 남을 규모의 고순도 광맥이……!”

펠릭스의 안경이 코끝으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제 발밑에서 뾰로롱 소리를 내며 자라난 주먹만 한 에메랄드 원석을 손으로 더듬었다. 순수한 마력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자, 그의 이성적인 뇌 회로가 완전히 정지해 버렸다.

실비아는 완벽한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펠릭스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리드미컬하게 또각거리는 가죽 부츠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에스토바 경. 똑똑히 계산해 보세요. 6화에 체결한 계약서 제4조 2항 기억하시죠? ‘을(실비아)이 해당 영토를 정화하는 데 성공할 경우, 발생하는 모든 부산물의 소유권 및 채굴권은 9대 1 비율로 을에게 영구 귀속된다.’ 덤으로 당신이 심어놓은 독소 조항은 ‘실패 시’에만 발동하는 조건이었고요.”

“그, 그건…….”

“즉, 이 광산의 90%는 제 사유 재산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10%의 지분 가치만으로도, 하이델그라드 대공령이 황실과 서부 라벨 가문에 지고 있던 모든 재정 부채를 일격에 완벽히 탕감하고도 남죠. 어떻습니까? 제 회계 감사가?”

완벽한 역공이자, 반박 불가능한 사이다였다.

펠릭스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는 언제나 숫자로 사기를 치는 자들을 혐오해 왔지만, 눈앞의 실비아는 사기를 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모두가 쓰레기라며 내다 버린 썩은 빙벽을, 자신의 신비로운 능력과 치밀한 설계로 제국 최고의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었고, 동시에 완벽한 경영학적 승리였다.

거기다 실비아는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게다가 3화에서 제가 압류관들의 장부에서 횡령해 둔 황실 비선 기구의 회계 로그를 기억하십니까? 황태자 루벤이 라벨 가를 겨냥해 발행했던 그 위조 국채 말이에요. 그 국채의 인장 원천이 황실 비선 기구라는 사실을 이미 만천하에 증명해 보였으니, 대공가가 황실에 갚아야 할 부채 자체의 정당성도 소멸했습니다. 즉, 우리는 갚을 필요도 없는 빚을 도의적으로 탕감해 준 대인배가 된 셈이죠.”

펠릭스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자두색 벨벳 드레스 자락이 에메랄드빛 광채를 받아 신비롭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단순한 악녀가 아니었다. 하이델그라드를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린 진정한 구원자이자, 대공가를 지배할 유일한 여왕이었다.

스르륵.

펠릭스는 마침내 들고 있던 장부와 깃펜을 눈밭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어 실비아의 드레스 자락 끝에 정중히 이마를 맞추었다.

“……제가 미련했습니다, 실비아 영애. 제 얕은 지혜로 감히 대공비 전하의 깊은 뜻을 의심한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어머, 에스토바 경. 대공비라니요? 저는 그저 평화로운 은퇴를 꿈꾸는 소박한 횡령범…… 아니, 자산 관리사일 뿐이랍니다.”

“아닙니다. 이 하이델그라드의 모든 재정과 영토의 주인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저 펠릭스 에스토바, 오늘부로 대공비 전하를 정식으로 보필하며 제 목숨과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 냉철하고 깐깐하던 보좌관이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실비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시스템창을 흘깃 보았다. 펠릭스의 신뢰도와 호감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며 대공가의 재정 관리권이 완벽히 그녀의 손아귀로 넘어왔음을 알리는 알림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묵직한 체온과 함께 강한 마력의 파동이 실비아를 감싸 안았다.

스윽.

데온이 실비아의 허리를 단단한 팔로 감싸 안으며 그녀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온전해진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더 이상 폭력적이거나 피비린내 나지 않았다. 오직 실비아의 은빛 마력과 완벽하게 융합되어, 마치 그녀를 지키는 거대한 방패처럼 온화하고 강인하게 영지를 감싸 안고 있었다.

대공성을 지키던 기사들과 영지민들이 저 멀리서 이 기적적인 광경을 목격하고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데온은 영지민들과 기사단을 향해 오만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선포했다.

“듣거라, 하이델그라드의 신민들이여.”

그의 붉은 눈동자가 은빛 광산을 배경으로 타오르듯 빛났다.

“나 데온 폰 하이드리히의 마력과 육신, 그리고 하이드리히의 모든 권능은 이제 오직 실비아 드 라벨, 나의 유일한 주인의 승인 하에만 움직인다. 그녀의 뜻이 곧 나의 법이며, 그녀의 지배만이 나의 유일한 구원이다. 이를 어기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나의 손에 찢겨 죽을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실비아 님 만세! 대공 전하 만세!”

설원을 가득 메우는 영지민들의 함성 소리가 고요했던 북부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데온은 실비아의 귀밑샘에 입술을 꾹 누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제 도망칠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다, 나의 아름다운 회계사님.”

“치사하게 영지민들 앞에서 여론몰이하기 있나요? 제 은퇴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대공 전하의 심장 지분을 전부 매각해 버릴 줄 아세요.”

“기꺼이 사 가지. 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히며 짜릿한 스파크를 일으켰다.

완벽한 승리였다. 사기꾼 오라비의 빚과 황태자의 억지 압류령을 역이용해, 대공가의 부채를 완벽히 탕감하고 제국 최고의 마력 광산까지 손에 넣었다. 이제 가문의 알짜 자산 5,000골드를 완벽히 세탁해 북부에서 무위도식할 일만 남았다고, 실비아는 그렇게 확신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타다다당-!

대공성의 거대한 외곽 방벽 너머에서, 붉은색 연막탄과 함께 다급한 발소리가 광장으로 뛰어들었다. 온몸이 피와 진흙으로 범벅이 된 정찰 부대장 기사가 실비아와 데온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비명을 지르듯 전갈을 올렸다.

“보, 보고 드립니다!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

기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다급한 목소리가, 방금 전까지 뜨겁게 타오르던 축제 분위기를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황태자 루벤이…… 황실의 명분을 억지로 도용하여, 황실 정예 기사단 본대 3만 명을 사적으로 급전개했습니다! 지금 대공령의 최종 방어선인 영지 대관문 바로 앞을, 야만스럽게 에워싸기 시작했습니다……!”

쩌어적.

방금 정화되었던 빙벽의 끝자락이, 황태자의 불길한 붉은 마력 파동에 반응해 다시금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실비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미친 황태자의 최후의 발악이, 마침내 북부의 턱밑까지 당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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