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슬 퍼런 단두대의 날이 목덜미를 스치기 직전, 허공을 가르는 차가운 쇳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툭.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 대신, 손끝에 닿은 것은 부드럽고 폭신한 실크 침구의 감촉이었다.
"헙!"
실비아는 단숨에 상체를 일으켰다. 목덜미를 거칠게 움켜쥐었으나 살점은 매끄럽고 온전하게 붙어 있었다. 등허리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려 얇은 레이스 슬립을 축축하게 적셨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은은한 라벤더 향이 감도는 침실, 창가로 들이치는 화사한 햇살, 그리고 화장대 위에 놓인 화려한 에메랄드 보석함까지. 가문이 반역죄로 몰려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가기 정확히 한 달 전, 라벨 공작가에 있는 그녀의 방이 분명했다.
"살았어?"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쿵쾅거렸다. 죽음의 공포가 가시기도 전에, 허공에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쪼로롱-★*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청아한 효과음과 함께, 눈앞에 반짝이는 황금빛 반투명 창이 전개되었다.
[시스템: '호감도 트레이딩' 장부가 활성화됩니다!] [사용자: 실비아 드 라벨] [보유 자산: 3,400골드 (※주의: 가문 채무율 90% 초과로 가상 파산 직전)] [가문 파멸 남은 시간: D-30]
"이건 또 뭐야?"
실비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허공에 떠 있는 빛의 장부를 응시했다. 회계사 출신이었던 그녀의 전생 기억이 머릿속에서 본능적으로 숫자를 읽어 내렸다.
장부의 하단에는 기묘한 탭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인물별 호감도 리스트], [집착도 자산 거래소], [디버프 해제 상점].
[설명: 대상이 품은 호감도와 집착 수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이 아닙니다. 본 시스템에서는 이를 실물 자산으로 치환하여 마법 자원, 고급 정보, 상태이상 해제권 등 생존에 필요한 재화로 '트레이딩'할 수 있습니다.] [※경고: 집착도가 임계점(100%)을 돌파할 경우 '오버히트 진정 퀘스트'가 강제 발동됩니다. 실패 시 대상과 함께 영혼째 소멸하니 자산 관리에 극도로 유의하십시오.]
실비아의 입꼬리가 천천히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인간의 감정 따위 눈에 보이지 않는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 감정을 실시간 숫자로 계측하고, 심지어 생존을 위한 '유동 자산'으로 거래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감정을 장부로 관리하라고? 내 전공 분야잖아."
목표는 명확했다. 황태자가 파놓은 멸문의 덫에서 가문이 완전히 공중분해 되기 전에, 알짜배기 영지 자산과 비자금을 합법적으로 '횡령'하는 것. 그리고 조용하고 안전한 북부 하이델그라드 영지로 도망쳐 평생 돈을 펑펑 쓰며 은퇴 라이프를 즐기는 것뿐이다.
그 타이밀한 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방문이 시끄럽게 부서져라 열렸다.
쾅!
"실비아아아! 이 오라버니가 진짜로, 진짜로 죽을죄를 지었다!"
화려한 금빛 태슬이 대롱대롱 매달린 벨벳 코트를 입은 사내, 실비아의 친오빠이자 가문을 말아먹을 일등 공신인 카셀 드 라벨이 눈물방울을 짤랑짤랑 흘리며 안으로 정통 슬라이딩을 해왔다.
실비아는 이마를 짚었다. 저 인간이 저렇게 울며 기어들어 올 때치고 제대로 된 일이 없었다.
"오라버니, 아침부터 목소리 톤이 너무 높아요. 고막이 찢어질 것 같으니까 데시벨 좀 낮추죠."
"실비아! 그게 문제가 아니야! 내가 북부 경계령 근처에서 황금 마력이 쏟아진다는 노천광산을 샀거든? 대박이 날 줄 알고 가문 공금을 몽땅 털어 넣었는데……!"
"그런데?"
"그게 사기였어! 황금은커녕 쓸모없는 화강암 덩어리만 가득한 돌산이더구나! 게다가 계약서를 잘못 쓰는 바람에 대공 가문의 영지 영토를 불법으로 침범해서, 지금 북부 기사단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기 일보 직전이란 말이다!"
카셀이 바닥을 뒹굴며 꺼이꺼이 울어댔다.
보통의 여동생이라면 가문이 망했다며 주저앉아 통곡했겠지만, 실비아의 눈동자는 오히려 차갑고 예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허공의 시스템 창을 띄워 가문의 재정 상태를 빠르게 재분석했다.
*띠링!* [라벨 공작가 재정 현황] - 가용 현금: -12,000골드 (적자 전환) - 카셀의 사기 피해액: 15,000골드 - 장부상 잔여 유동 자산: 5,000골드 (은닉 가능)
실비아의 머릿속 사칙연산기가 팽팽 돌아갔다.
카셀의 이 멍청한 대형 사고는 가문 전체로 보면 재앙이었지만, 그녀의 '횡령 프로젝트' 관점에서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기회였다. 카셀이 날려 먹은 15,000골드를 '회수 불능 부실 채권'으로 회계 처리하여 가문을 공식 파산 구도로 몰아가고, 그 틈을 타 남은 알짜 자산 5,000골드를 북부의 유령 회사 계좌로 이체해 세탁하면 되니까.
"울지 마요, 오라버니. 이 실비아가 다 해결할 테니까."
"진짜냐, 실비아? 흐윽, 넌 역시 하늘이 내린 천사야!"
카셀이 감격에 겨워 실비아의 손을 잡으려 버둥거렸다. 실비아는 우아하게 손을 뒤로 빼며 속으로 비웃었다.
'천사는 무슨. 넌 내 은퇴 자금 세탁을 위한 가장 훌륭하고 무능한 고기방패일 뿐이야.'
가문의 공식적인 파산을 유도하면서 합법적으로 돈을 빼돌리기 위해서는, 우선 북부 대공령과의 영지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 시간을 벌어야 했다. 실비아는 지체 없이 몸을 움직였다.
재판정으로 가기 위해 그녀가 고른 옷은 위엄을 갖춘 딥 버건디 빛깔의 벨벳 드레스였다. 빳빳하게 각이 잡힌 깃과 소매 끝에 촘촘히 박힌 흑진주가 걸을 때마다 짤랑거리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귀밑에서 흔들리는 물방울 모양의 루비 귀걸이는 붉은 입술과 대비되어 유독 매혹적으로 반짝였다.
마차를 타고 도착한 북부 경계령의 임시 재판정은 겉보기에도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찌푸린 하늘 아래, 사방이 검푸른 빙벽으로 둘러싸여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재판정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실비아의 살결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단순히 날씨가 추워서가 아니었다. 공기 자체가 짓눌리는 듯한 무겁고 비릿한 압박감. 피비린내와 섞인 기괴한 마력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의 상석에, 한 남자가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흑발 아래로 드러난, 칼날처럼 날카로운 턱선과 핏빛을 머금은 적안. 북부의 지배자이자 원작 최강의 흑막, 대공 데온 폰 하이드리히였다.
그의 주변으로 검붉은 마력이 불꽃처럼 일렁이며 폭주할 듯 요동치고 있었다. 마력 제어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살기등등한 기운에 기사들조차 숨을 죽인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실비아의 눈앞에 붉은 경고창이 사정없이 깜빡였다.
*삡- 삡- 삡!* [위험! 초고위험 관찰 대상 감지!] [이름: 데온 폰 하이드리히] [상태: 마력 폭주 1단계 (이성 상실 위험)] [집착도: 15% (경계 및 살의)]
'15%가 전부 경계와 살의라니. 잘못 건드리면 내 목이 여기서 먼저 날아가겠는걸?'
하지만 실비아는 쫄지 않았다. 오히려 붉게 타오르는 15%라는 숫자를 보며 침을 삼켰다. 저 흉포한 괴물의 집착을 자산으로 치환해 거래할 수만 있다면, 북부행 안전 티켓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데온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굶주린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가 손가락짓 하나를 가볍게 하자, 사방을 메우고 있던 검은 마도 장벽이 실비아의 발끝까지 거칠게 밀려왔다.
"라벨 공작가의 쥐새끼들이 드디어 제 발로 기어들어 왔군."
쇠를 긁는 듯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기사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정적 속에 크게 울렸다. 카셀은 이미 공포에 질려 실비아의 뒤로 쏙 숨어 이빨을 딱딱 마주치고 있었다.
실비아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검은 마력의 파편이 그녀의 구두 앞코를 스쳤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데온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우아하게 스커트를 쥐어 잡고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이드리히 대공 전하. 라벨가의 실비아 드 라벨입니다."
"사기꾼 오라비를 살리겠다고 제 발로 사지에 걸어 들어온 영애치고는 태도가 퍽 뻔뻔하군."
데온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실비아를 짓눌렀다.
성큼, 성큼.
그가 다가올 때마다 공기 중의 마력이 한층 더 흉포하게 날뛰었다. 데온은 실비아의 바로 코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거친 숨결에 섞인 피비린내가 실비아의 콧잔등을 스쳤다.
스윽.
그가 커다란 손을 뻗어 실비아의 가냘픈 목덜미 근처로 가져갔다. 손가락 끝에 서린 검붉은 마력이 그녀의 하얀 살결을 사정없이 핥아 올렸다. 닿기만 해도 영혼이 타들어 갈 것 같은 극도의 긴장감이 심장을 조였다.
데온이 낮게 읊조렸다.
"라벨가의 영애가 내 검은 마력에 겁도 없이 기어든 진짜 이유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