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진아. 다음 경기 선발은 나다."
태오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후끈하게 달아올라 있던 불펜의 공기를 단숨에 얼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송우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미트 속을 들여다보았다. 방금 전, 홈플레이트 앞에서 중력을 거스르듯 솟구치다 뚝 떨어졌던 공. 여전히 미트 가죽 내부에서 미세한 진동이 손목을 타고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포구의 충격으로 붉게 물든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우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태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경외감과 함께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이 서려 있었다.
철조망 너머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한재이가 마침내 철망을 움켜쥐었다. 쇠사슬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고요한 불펜에 울렸다.
"강태오 선수, 진심이에요? 윌리엄 해리슨이 움직였다는 건 단순한 경고가 아니에요. 그자가 데려오는 스카우터들은 메이저리그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냉혹하기로 소문난 세이버메트릭스 광신도들이에요. 당신의 투구 폼, 구질, 미세한 버릇까지 전부 쪼개서 단점을 찾아내려는 현미경 집단이라고요."
태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한재이의 손에 들린 태블릿PC 화면에 고정되었다. 화면 위로 어지럽게 흘러가는 미국 현지 에이전트들의 동향과 스카우팅 리포트들. 하지만 태오의 눈동자는 기묘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해리슨이 판을 짜줬으니, 나는 그 판 위에서 제대로 놀아주면 그만입니다."
"태오야."
우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태오는 우진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우진이 너도 들었잖아. 관객이 화려할수록 무대는 더 가치 있고, 내 몸값은 더 비싸지는 법이야."
어깨 뒤편에서 피칭 장부의 붉은 경고등이 희미하게 명멸했다. 내구도 84.2%. 아직 쓸 수 있는 자산은 충분했다. 태오는 야구공을 꽉 움켜쥐었다. 실밥이 손가락 끝 살점을 파고드는 감각이 선명했다.
***
다음 날 오후, 청룡고 라커룸.
낡은 선풍기가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더운 바람을 뿜어내고 있었다. 땀 냄새와 쿨파스 향이 뒤섞인 눅눅한 공간에서 태오는 장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가죽 가방 속에 넣어둔 전화기가 요란한 진동음을 울렸다.
철제 선반을 타고 울리는 진동이 이질적이었다. 발신 번호 표시 제한. 태오는 액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귀를 찌르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중후하지만 권위적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강태오 선수인가? 나는 서울 타이탄즈 단장 김성국일세."
KBO 리그에서 가장 거대한 자본력을 자랑하는 명문 구단의 수장. 그의 목소리에는 고교 유망주 하나쯤은 손쉽게 주무를 수 있다는 오만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예, 말씀하십시오."
태오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단장의 직위 따위에 전혀 위축되지 않는 그 냉소적인 태도에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번 신인 드래프트에서 우리 타이탄즈는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네. 이미 내부적으로 자네를 지명하기로 결정을 끝냈어. 계약금은 역대 고졸 신인 최고액인 12억 원을 보장하지. 입단과 동시에 1군 선발 로테이션 진입도 약속하겠네."
12억 원. 한국 야구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웬만한 프로 1군 베테랑들의 다년 계약에 맞먹는 액수. 김성국 단장은 이 정도 제안이면 태오가 넙죽 엎드릴 것이라 확신했을 터였다.
하지만 태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12억이라."
"어떤가? 이 정도면 자네 부모님도 만족하실 게다. 쓸데없이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는 것보다, 한국에서 황태자 대접을 받으며 선발로 뛰는 게 훨씬 현명한 선택이지 않겠나?"
"김 단장님."
태오가 나직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달러로 환산하면 110만 달러 남짓이군요. 메이저리그에서 평균자책점 4점대 중반을 기록하는 하위 로테이션 투수의 연봉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최소 400만 달러에서 500만 달러입니다. 제 어깨의 가치를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묶어두시겠다니, 계산법이 참 구시대적이시네요."
수화기 너머에서 숨이 턱 막히는 소리가 들렸다. 김성국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뭐라고? 푼돈? 강태오, 지금 제정신인가? 고등학교 우승 한 번 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인데, KBO를 무시하고 미국으로 직행한 놈치고 제대로 성공한 놈 하나 없어!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대한야구협회와 공조해서 자네의 국제 이적 동의서 발급을 보류할 수도 있어. 한국 야구계에서 완전히 매장당하고 싶나?"
협박. 전형적인 구시대적 착취 방식이었다. 자신의 영리를 위해 선수의 미래를 볼모로 잡는 짓. 회귀 전, 태오의 어깨가 부서졌을 때 그를 가장 먼저 내팽개쳤던 자들이 바로 이 부류였다.
태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적 동의서요? 보류해 보십시오.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미국 연방법이 한국 야구협회의 로컬 규정 따위에 묶여줄 것 같습니까? 그리고 하나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태오가 라커룸의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후의 강렬한 햇살이 그의 얼굴을 거침없이 비추었다.
"저는 KBO를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애초에 제 시야에 KBO 같은 변두리 리그는 들어가 있지도 않은 것뿐이죠. 다시는 이런 무의미한 전화로 제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뚝.
태오는 가차 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김성국 단장이 내질렀을 비명이 귓가를 맴도는 듯했지만, 태오의 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
그날 저녁, 인터넷 스포츠 뉴스는 일제히 불타올랐다.
[건방진 천재 투수, 한국 야구를 모독하다.] [강태오, KBO 드래프트 거부 의사 표명... 야구계 원로들 '기본이 안 된 선수' 일침.]
평생을 '투혼'과 '애국심', 그리고 '선배에 대한 복종'을 미덕으로 여겨온 한국 야구 원로회는 태오의 거침없는 행보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그들은 태오를 '배은망덕한 먹튀'로 규정하며 여론을 몰아갔다.
태오는 학교 운동장 벤치에 앉아 한재이가 건넨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네요."
한재이가 안경테를 가볍게 밀어 올리며 얼음이 가득 담긴 커피를 태오에게 건넸다.
"KBO 구단들과 야구협회가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언론을 동원해 당신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고, 몸값을 떨어뜨려 결국 국내 드래프트에 참여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죠."
"상관없습니다. 짖어대라고 하세요. 어차피 그들이 짖을수록 제 이름값은 더 올라갈 테니까요."
태오는 빨대를 입에 물고 차가운 커피를 들이켰다.
"그보다, 당신이 설계한 그 알고리즘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습니까?"
한재이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녀는 화면을 터치해 복잡한 데이터 그래프와 해외 계약 법률 조항들을 띄웠다.
"물론이죠. KBO의 제재는 국내 한정이에요. 제가 분석한 '해외 직행 시나리오'에 따르면, 당신이 이번 서울시 예선전에서 완벽한 투구를 선보일 경우,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KBO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우회 계약을 시도할 거예요. 특히 제3국 영주권 취득을 통한 에스크로 계좌 개설 루트는 윌리엄 해리슨의 노예 계약 덫을 완벽히 우회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예요."
"그럼 이번 경기에서 증명하면 되겠군요."
"네. 하지만 조건이 까다로워요. 해리슨이 대동하는 스카우터들은 단순히 구속만 보지 않아요. 그들은 투구의 일관성, 즉 '제구력(Command)'을 최우선으로 봅니다. 아무리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져도 제구가 흔들리면 메이저리그에서는 즉시 전력감으로 보지 않으니까요."
제구력.
태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회귀 전, 어깨 부상으로 신음하던 시절의 그는 제구력 하나로 연명하던 투수였다. 하지만 지금의 고교생 육체는 구속은 압도적일지언정, 미세한 제구력에 있어서는 0.1%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그의 강박증을 완벽히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채워 넣으면 된다.'
***
한재이와 헤어진 후, 태오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불펜으로 향했다.
어스름한 저녁노을이 불펜의 흙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태오는 마운드 위에 서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피칭 장부 개방.'
망막 위로 반투명한 푸른색 홀로그램 스크린이 펼쳐졌다. 가상의 재무제표 형태로 구성된 자산 관리 시스템이 실시간으로 구동되었다.
--- [피칭 장부 (Pitching Ledger)] - 보유 내구 자산(어깨 수명): 84.20% - 누적 마일리지(수익): 1,580 Point - 주요 능력치 * 패스트볼 구속: 95/100 (최대 156km/h) * 제구력 (Command): 88/100 * 종속 및 회전수: 91/100 * 무중력구 (신무기): 활성화 (사용 시 내구도 소모 발생) ---
청룡기 우승과 지난 연습 경기들에서 타자들을 완벽히 압도하며 벌어들인 마일리지가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태오의 시선이 제구력 항목에 멈췄다.
88포인트. 고교 수준에서는 최정상급이었지만, 메이저리그의 현미경 스카우터들을 입 벌어지게 만들기에는 부족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존의 구석구석을 칼로 베어내듯 찌르는 완벽한 커맨드였다.
"제구력에 누적 마일리지 전부를 투입한다."
태오의 명령과 동시에 시스템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스르륵. 제구력의 슬라이더 바가 오른쪽으로 강제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1,580 포인트의 마일리지가 순식간에 차감되며 수치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89... 92... 95... 98...
[경고: 단시간 내 급격한 수치 조정은 신경계에 과도한 부하를 줄 수 있습니다.] [이명 및 신경 과열 위험 경고.]
"으윽...!"
태오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귓가에서 삐- 하는 날카로운 기계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오른쪽 어깨부터 시작해 척수, 그리고 오른손 손가락 끝 신경 마디마디가 불에 달군 바늘로 찔리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엄습했다.
땀방울이 턱선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태오는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해 불펜의 벽면을 왼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시멘트 벽을 긁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신경들이 극도로 미세하게 어긋나고 다시 맞춰지는 과정. 고통은 약 10초간 지속되었다. 마침내 통증이 물러가고, 망막 앞의 숫자가 고정되었다.
--- - 제구력 (Command): 99/100 (완전무결의 경지) ---
태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른손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손가락 끝의 감각이 수십 배는 더 예민해진 것 같았다.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가는 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는 공을 던지기도 전에, 그 공이 어느 궤적으로 날아가 스트라이크 존의 어느 실밥만큼 걸칠지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그려졌다.
"이거면 충분해."
태오의 입가에 냉혹한 미소가 걸렸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현미경을 들이댄다면, 그 현미경 렌즈 자체를 부숴버릴 만한 정밀함을 보여주면 될 일이었다.
***
D-Day. 서울시 예선전이 열리는 목동 야구장.
비공식 쇼케이스를 겸한 경기였지만, 관중석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포수 뒤편 VIP석에는 양복을 차려입은 파란 눈의 이방인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LA 다저스,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의 스카우트 총책임자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는 승리감에 도취한 표정의 윌리엄 해리슨이 가죽 의자에 깊숙이 묻어 앉아 있었다.
그들은 태오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현미경 아래 놓인 실험용 쥐를 보듯, 냉정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태오는 글러브를 끼고 불펜으로 들어섰다. 흙냄새와 매캐한 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송우진이 이미 마운드 뒤편에서 미트를 툭툭 치며 대기하고 있었다.
태오가 투구판을 밟으려던 그 순간.
"여전히 건방진 표정이네, 강태오."
등 뒤에서 나직하고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청룡고의 라이벌이자, KBO 드래프트 전체 1순위 후보로 거론되는 우완 정통파 백승태가 서 있었다. 백승태는 팔짱을 낀 채, 비웃음이 가득 섞인 눈빛으로 태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국? 메이저리그? 네가 무슨 대단한 천재라도 된 줄 아나 본데, 한국 야구를 무시한 대가가 어떤 건지 오늘 똑똑히 보여주지. 오늘 네가 던지는 공, 내 눈에는 다 보이니까."
백승태의 눈에 서린 노골적인 적의.
태오는 대꾸 대신, 그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두 천재 투수의 시선이 공중에서 격렬하게 부딪치며 불펜의 온도를 급격히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