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로비의 육중한 유리문 너머로 태오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한재이는 강태오가 툭 던지듯 건넨 태블릿 속 역제안 데이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수치의 배열이 기묘했다. 단순한 에이스의 어거지가 아니었다. 세이버메트릭스의 허점을 칼날처럼 파고든 완벽한 역제안서. 그녀의 눈빛이 주체할 수 없는 전율로 거세게 반짝였다.

반면, 그 옆에 선 윌리엄 해리슨의 조각 같은 얼굴은 살벌한 모욕감으로 점차 일그러지고 있었다. 가난한 동양의 고교 투수 따위가 제 감당 범위를 넘어선 조건을 들이밀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완벽한 커리어에 새겨진 오점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목덜미가 부르르 떨렸다.

* * *

사흘 뒤, 서울 마포구의 한 고급 호텔 스위트룸.

통유리창 너머로 한강의 회색빛 물줄기가 내려다보이는 방 안은 기묘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태오는 가죽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채 해리슨을 마주했다. 해리슨은 사흘 전의 분노를 가식적인 미소 뒤로 철저히 감춘 채, 대리석 테이블 위에 두꺼운 영문 서류 뭉치를 툭 던졌다.

탁.

무거운 종이 뭉치가 떨어지는 소리가 사방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강태오 군. 자네가 제시한 가치는 한국 시장 기준으론 대단할지 몰라도, 진짜 메이저리그의 룰 앞에서는 한낱 휴지 조각에 불과하네."

해리슨의 목소리는 낮고 위압적이었다. 그는 고급 시가를 자르고 불을 붙이며 태오의 반응을 살폈다. 자욱한 연기가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뿌옇게 흐려 놓았다.

"미국 야구는 자본의 정글이야. 자네 같은 고교 투수가 직접 구단들과 협상 테이블에 앉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룰이 그렇거든. 넌 드래프트 대상도 아니고, 국제 계약금 상한선이라는 단단한 벽에 묶여 있어. 내 손을 잡지 않으면 자네는 미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이 좁은 반도에서 고사할 걸세."

해리슨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 교활한 사냥꾼의 미소였다. 그는 이미 한국 야구계 고위층, 그리고 KBO의 인맥을 동원에 태오의 숨통을 조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일종의 무언의 협박이었다.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거대 에이전시의 그늘을 벗어나는 순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뿐이라는 경고.

하지만 태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해리슨의 입술 너머, 허공에 띄워진 푸른빛 투명한 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피칭 장부 (Pitching Ledger)]

망막을 가로지르는 시스템 창이 차갑게 빛났다. 그 아래로 붉은색 경고 메시지가 조용히 명멸하고 있었다.

[ 위협 경고 (Threat Warning) ] - 구종별 커스텀 수치 불균형 감지. - '종속' 및 '수평/수직 무브먼트' 슬라이더 과도 강제 조정 시, 인대 및 관절와순에 미세 노이즈 발생 위험. - 현재 어깨 내구 자산: 84.1% - 경고: 쇼케이스에서 '무중력 낙하구' 시전 시, 내구 자산의 급격한 과열 및 영구 손상 위험 존재.

태오는 해리슨의 오만한 헛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손가락을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슬라이더 바가 정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종속' 수치를 98에서 99로. '수직 무브먼트'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비대칭 조율.

그 순간, 귀를 찢는 듯한 노이즈가 뇌리를 강타했다.

삐이이이-.

날카로운 이명과 함께 오른쪽 어깨 깊숙한 곳에서부터 화끈거리는 열감이 치솟았다. 뼈와 인대가 미세하게 긁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 땀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려 턱끝에 맺혔다.

태오는 이를 악물었다. 단 0.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그의 강박증이 뇌 세포 하나하나를 자극했다. 어깨 수명을 소모해야만 완성할 수 있는 무중력의 마구. 그것이 메이저리그라는 거대 포식자들의 심장을 단번에 꿰뚫을 유일한 무기였다.

"듣고 있나, 강태오 군?"

해리슨이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태오를 압박했다.

"내 제안은 심플해. 계약금의 40%를 선급금으로 지불하는 대신, 향후 7년간의 초상권 및 에이전트 수수료를 독점하는 독소 조항... 아니, '상호 호혜적 옵션'에 서명하게. 이게 자네가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설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야."

태오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가라앉아 있었다. 해리슨의 오만한 면상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태오의 눈빛에는 두려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철저한 계산과 냉소만이 가득했다.

"해리슨 씨."

태오가 낮게 읊조렸다.

"당신이 한국의 낙후된 야구 시스템을 이용해 수많은 유망주들의 피를 빨아먹은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착각하지 마십시오. 난 당신의 그 알량한 포트폴리오를 채워줄 가난한 남미 유망주가 아닙니다."

"뭐라고?"

해리슨의 눈썹이 꿈틀했다.

"당신이 말한 국제 계약금 상한선? 세이버메트릭스 데이터 분석을 통한 예외 조항 신청서가 이미 MLB 사무국에 접수되었습니다. 물론 제3국 영주권 취득을 통한 자유계약선수(FA) 신분 자격 취득 룰도 검토가 끝났죠. 당신이 메이저리그의 규칙을 지배한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룰을 만드는 건 자본이지만, 그 자본을 움직이는 건 결국 시장을 지배할 수 있는 '압도적인 재화'입니다."

태오가 테이블 위의 서류를 제 손으로 밀어버렸다. 툭, 서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재화가 바로 접니다."

"이... 건방진 놈이!"

해리슨이 벌떡 일어섰다. 신사적인 가면이 순식간에 벗겨지며 야수 같은 본성이 드러났다. 하지만 태오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걷고 있었다.

"쇼케이스 날짜는 바꾸지 않겠습니다. 와서 똑똑히 보십시오. 당신이 감히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지는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태오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호텔 로비를 빠져나오자 쌀쌀한 가을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태오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깨의 이질감은 여전했다. 피칭 장부의 붉은 경고등은 그가 방금 감행한 슬라이더 조율의 여파로 여전히 미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태오야!"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송우진이었다. 낡은 청룡고 야구부 점퍼를 입은 우진이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든 채 태오를 향해 달려왔다. 우진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어떻게 됐어? 그 미국 놈이 또 헛소리해?"

우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태오의 오른쪽 어깨를 살폈다. 우진은 태오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유일한 포수였다. 태오가 투구 메커니즘을 바꿀 때마다, 그리고 어깨에 무리가 갈 때마다 우진은 귀신같이 그것을 눈치채곤 했다.

"신경 쓸 거 없어. 짖는 개는 물지 않으니까."

태오가 무뚝뚝하게 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우진은 태오의 빠른 걸음걸이 속에서 미세하게 부자연스러운 오른쪽 어깨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우진이 태오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거짓말하지 마. 너 어깨 아프지?"

"우진아."

"청룡기 결승 때부터 계속 그랬잖아. 너 혼자 끙끙 앓으면서 괴물 같은 공 던지는 거, 내 미트에는 다 느껴져. 회전축이 흔들리고 있단 말이야. 종속은 미쳐 날뛰는데, 공이 미트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예전이랑 달라. 너 지금 어깨 갈아 넣고 있는 거지?"

우진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태오의 독설과 냉혹함에 매번 상처받으면서도, 우진은 태오의 완벽함 뒤에 숨겨진 깊은 고독과 절박함을 알고 있었다. 회귀 전, 홀로 어깨가 부서진 채 지옥을 헤맸던 태오의 상처를 알 리 없는 우진이었지만, 그의 직감은 정확했다.

우진이 품 안에서 차가운 보틀을 꺼내 태오의 손에 쥐여주었다. 얼음과 특수 배합된 전해질 음료, 그리고 우진이 직접 짠 레몬즙이 섞인 특별 보강 드링크였다.

"이거 마셔. 그리고 아이싱 제대로 해."

태오는 차가운 보틀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서늘함이 어깨의 열감을 조금이나마 식혀주는 듯했다.

"태오야."

우진이 태오의 양 어깨를 꽉 쥐었다. 무겁고 단단한 포수의 손길이었다.

"네가 어떤 공을 던지든 상관없어. 그게 네 수명을 갉아먹는 지옥 끝의 마구라도, 내가 다 받아낼 거야. 단 한 번의 놓침도 없이, 네 공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미트에 담아낼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라. 우린 배터리잖아."

우진의 눈동자에는 꺾이지 않는 단단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태오는 피식 웃었다. 냉소적인 그의 입가에 아주 잠깐,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사라졌다.

"지옥 끝까지 던질 테니까, 놓치지나 마."

"당연하지. 누구한테 말하는 거냐?"

우진이 씩 웃으며 태오의 등판을 넓게 내리쳤다. 퍽 소리와 함께 뜨거운 에너지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사나이들의 묵직한 약속이 가을 하늘 아래로 굳건하게 울려 퍼졌다.

* * *

다음 날 아침, 청룡고등학교 야구부 불펜.

태오는 마운드에 서서 홈플레이트를 노려보았다. 송우진이 포수 마스크를 쓰고 주저앉아 미트를 펑펑 쳤다.

"좋아, 태오야! 가볍게 몸 풀자!"

태오가 볼을 쥐었다. 실밥을 움켜쥔 손끝에 감각이 날카롭게 살아났다. 눈앞에 다시 나타난 [피칭 장부].

태오는 과감하게 '수직 무브먼트' 슬라이더를 한 단계 더 올렸다. 귓가를 때리는 경고음이 더욱 날카로워졌지만, 이제는 그 소음마저 마운드 위의 심장박동처럼 익숙했다.

그가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오른발을 강하게 디디며 몸의 회전축을 극대화했다. 어깨가 활처럼 휘어졌다.

콰아아앙!

공이 태오의 손끝을 떠난 순간, 마치 대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파열음이 불펜을 가득 채웠다. 공은 직구의 궤적으로 뻗어가다, 홈플레이트 앞에서 마치 중력을 거스른 듯 솟구치는가 싶더니 이내 뚝 떨어졌다.

퍽-!

우진의 미트가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며 공을 움켜쥐었다. 우진은 미트를 낀 왼손을 부르르 떨며 태오를 바라보았다.

"이... 이건 미쳤다. 공이 중간에 사라졌어."

"그게 무중력구다."

태오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답했다.

그때, 불펜 뒤편의 철조망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왔다. 한재이였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태블릿이 들려 있었고, 얼굴에는 흥분과 긴장이 교차하고 있었다.

"강태오 선수."

한재이가 철망을 잡고 태오를 불렀다.

"방금 그 공... 정말 믿을 수가 없네요. 하지만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방금 속보를 입수했어요."

태오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죠?"

"윌리엄 해리슨이 움직였어요. 당신의 콧대를 꺾어놓겠다고 장담하더니, 결국 판을 짜버렸네요. 다음 주에 열리는 전국 체전 서울시 예선전... 원래는 비공식 쇼케이스로 조용히 치러질 예정이었던 그 경기에, 메이저리그 서부지구 최고의 명문 구단 스카우트 총책임자들이 VIP석을 채우기로 합의했대요."

한재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단순한 참관이 아니에요. 해리슨은 그 경기에서 당신의 약점을 철저히 해부해 몸값을 바닥으로 떨어뜨릴 생각이에요. 그가 데려오는 스카우터들은 메이저리그에서도 가장 까다롭기로 소문난 세이버메트릭스 광신도들이니까요."

태오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해리슨의 역공. 자신을 헐값에 후려치기 위해, 공식 경기라는 가장 가혹한 시험대를 준비한 것이다. 실전에서 단 한 번이라도 무너지면, 태오가 쌓아 올린 가치는 단숨에 무너질 터였다.

하지만 태오의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스카우트 총책임자들이 직접 온다라..."

태오가 오른손으로 야구공을 꽉 움켜쥐었다. 실밥이 살을 파고드는 감각이 짜릿했다. 어깨의 붉은 경고등이 격렬하게 춤을 추고 있었지만, 그의 심장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판이 커져서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태오가 포수 우진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선언했다.

"우진아. 다음 경기 선발은 나다."

메이저리그의 거대 자본이 설계한 덫. 하지만 태오에게 그것은 자신의 격을 증명하고, 해리슨의 목줄을 완전히 쥘 최고의 단두대 매치일 뿐이었다. 조용히 다가오는 거대한 폭풍을 향해, 태오는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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