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태의 목소리에는 뼈가 있었다. KBO 드래프트 전체 1순위라는 타이틀이 주는 오만함, 그리고 자신보다 먼저 메이저리그의 시선을 가로챈 동갑내기를 향한 노골적인 질투가 날것 그대로 흘러나왔다.
태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시선은 오직 18.44미터 너머의 홈플레이트, 그리고 그 뒤에서 미트를 툭툭 치고 있는 송우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태오의 망막 위로 푸르스름한 반투명 반사광이 어른거렸다.
--- - 어깨 내구 자산: 84.2% - 제구력 (Command): 99/100 (완전무결의 경지) ---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긴장 때문이 아니었다. 99라는 수치로 극대화된 제구력이 손끝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고 있었다. 바람의 미세한 흐름, 공기 중의 습도, 가죽 실밥의 미끄러운 질감까지 지문 속 신경망을 타고 뇌로 직행했다.
태오는 천천히 글러브를 고쳐 잡았다. 가죽끈이 조여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비켜라."
나직한 한마디가 불펜의 정적을 깼다.
백승태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무시당했다는 사실이 그의 턱관절을 거칠게 뒤틀어 놓았다. 백승태는 태오의 어깨를 밀치듯 스쳐 지나가며 어금니를 사렸다.
"던져 봐 어디. 미국 놈들 앞에서 밑천 다 드러나는 꼴 똑똑히 봐줄 테니까."
태오는 대꾸 대신 투구판을 밟았다.
흙먼지가 스파이크 징 사이로 짓눌려 들어왔다. 목동 야구장의 가을바람은 서늘했지만, 마운드 위로 내리쬐는 오후의 햇살은 투수의 목덜미를 뜨겁게 달구었다.
백네트 뒤편, VIP 석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파란 눈의 이방인들이 반원형으로 둘러앉아 있었다. 가죽 자켓을 입은 사내들이 삼각대 위에 얹힌 초고속 카메라의 렌즈를 조절했다. 윙, 윙 하는 미세한 기계음이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했다. 그 중심에는 윌리엄 해리슨이 있었다. 그는 비스듬히 기대앉아 턱을 괸 채, 먹잇감을 관찰하는 사자처럼 태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품에는 저마다 스피드건과 두꺼운 스카우팅 리포트 책자가 들려 있었다. 태오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은 따뜻한 환영이 아니었다. 가성비를 따지고, 부상 위험도를 계산하며, 어떻게 하면 가장 싼 값에 아시아의 유망주를 사들여 부려 먹을지 고민하는 자본가들의 차가운 계산기였다.
태오는 그 시선들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현미경을 들이대겠다고?'
마음껏 보라지. 그 렌즈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던져줄 테니.
태오가 모자챙을 쓸어내렸다. 줌인 카메라의 빨간 불빛이 태오의 깊은 눈동자에 선명하게 맺혔다. 그는 도망치지도, 긴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거대한 카메라 렌즈들의 중심을 꿰뚫어 보듯 눈빛을 빛냈다.
포수 플레이트 뒤편에 앉은 송우진이 가슴팍에 미트를 댔다.
우진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태오가 어떤 공을 던지든,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잡아내겠다는 굳은 결의가 그 뭉툭한 손가락 끝에 묻어 있었다. 우진이 사인을 보냈다. 손가락 하나.
가장 단순하고, 가장 강력한 결정구.
포심 패스트볼.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흡을 길게 들이마셨다. 허파 깊은 곳까지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가 흩어졌다.
디뎠다.
오른발 끝이 투구판의 모서리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디딤발의 단단함이 뼈를 타고 척추로, 다시 어깨로 이어지는 체인의 기초를 형성했다.
와인드업.
몸을 회전시키는 축이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일직선상에서 회전했다. 제구력 99가 선사하는 기하학적 궤적이었다. 근육들이 섬유 한 가닥까지 정밀하게 통제되며 수축했다.
태오의 왼발이 하늘을 향해 높게 치솟았다가, 마운드의 경사면을 따라 짓쳐 내려갔다.
쾅!
스파이크가 마운드의 흙을 폭발적으로 걷어찼다. 지면 반발력이 다리를 타고 올라와 골반을 회전시켰다. 넓은 등근육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어깨가 가장 이상적인 각도로 열리며 팔꿈치가 채찍처럼 휘둘려 나왔다.
손가락 끝에 실밥이 걸렸다.
태오는 검지와 중지에 가해지는 실밥의 압력을 극한으로 느꼈다. 공기 분자들이 야구공의 붉은 실밥과 마찰하며 발생하는 저항이 손가락 끝에서 실시간으로 계산되었다.
뿌린다.
공이 손끝을 떠났다.
순간, 기묘한 현상이 벌어졌다.
보통 지르는 듯한 고속 투구에서는 공기가 찢어지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태오의 손끝을 떠난 공은 달랐다. 소리가 없었다. 극도로 완벽한 회전축과 대칭성이 공기 저항을 극한으로 상쇄해 버린 탓이었다.
진공을 뚫고 지나가듯, 공은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포수 미트를 향해 날아가는 공은 마치 궤도 위를 달리는 탄환 같았다. 상하좌우의 흔들림이 전혀 없는, 순수한 물리 법칙의 결정체.
송우진은 날아오는 공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공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홈플레이트 공간 전체가 공을 향해 압착되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미트를 움직일 필요조차 없었다. 공은 우진이 겨냥한 미트의 정확한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갔다.
퍽.
둔탁하고 묵직한 포구 소리가 목동 야구장의 고요를 깼다.
그것은 요란한 폭음이 아니었다. 공이 미트 가죽 안으로 깊숙이 박히며 모든 에너지를 온전히 흡수당했을 때 나는, 완벽한 무소음의 포구였다.
정적.
관중석도, 덕아웃도, 백네트 뒤편의 스카우터들도 일순간 숨을 멈췄다.
전광판의 숫자가 깜빡였다.
[ 154 km/h ]
단 1구. 몸도 풀지 않은 상태에서 가볍게 던진 첫 번째 연습구가 시속 154킬로미터를 찍었다.
스카우터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스피드건과 전광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몇몇은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하."
덕아웃 입구에 서 있던 백승태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팔짱을 끼고 있던 그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154킬로미터라는 구속 자체도 놀랍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공의 궤적이었다. 종속이 전혀 줄어들지 않고 미트 속으로 일직선으로 꽂히는 그 무시무시한 힘.
송우진이 미트에서 공을 꺼냈다. 가죽 타는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듯했다. 우진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우진은 일부러 백네트 뒤편의 스카우터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에 노골적인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이게 한국의 고교 투수다. 똑똑히 봐라'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우진은 오른손으로 미트를 펑, 펑 소리가 나도록 거세게 때렸다. 가죽과 가죽이 부딪치는 마찰음이 고요한 경기장에 메아리쳤다.
"나이스 볼, 태오야! 끝내준다! 손끝 감각 지 제대로 살았네!"
우진의 우렁찬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도발적인 외침에 스카우터들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감시하기 위해 온 유망주에게 오히려 기세로 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오는 마운드 위에서 가볍게 어깨를 돌렸다.
기분이 좋았다. 제구력 99가 주는 통제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방금 던진 공은 어깨의 내구도를 단 0.001%도 소모하지 않은, 완벽하게 효율적인 투구였다. 몸의 메커니즘이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갈 때, 투구는 노동이 아니라 예술이 된다.
"한 번 더 간다."
태오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우진의 공을 받아 쥐었다.
백네트 뒤편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봐, 방금 회전수 봤어?" "스핀레이트가 말이 안 되는데? 기계 고장 아니야?"
다저스의 스카우트 단장이 자신의 스피드건을 툭툭 치며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그의 이마에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
"포심의 수직 무브먼트가 기준치를 초과했어. 레이저 측정기에 오차가 난 게 틀림없어. 고교생이 던진 공의 회전수가 어떻게 2600rpm을 넘나?"
양키스의 스카우트 역시 붉어진 얼굴로 자신의 태블릿 피시를 거칠게 두드렸다. 실시간 데이터 분석 프로그램에 찍힌 숫자들이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들은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 그것도 혹사로 점철된 고교 야구 마운드에서 메이저리그 에이스급의 구위와 제구력을 동시에 가진 괴물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윌리엄 해리슨의 미소 역시 완전히 굳어 있었다. 가죽 의자에 깊숙이 묻고 있던 몸을 앞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태오의 오른팔을 뚫어지라 쏘아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해리슨의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기계의 오차라고 치부하기에는, 미트에 박히는 공의 물리적인 궤적이 너무도 정교했다. 그것은 우연히 긁힌 한 구가 아니었다. 투수의 완벽한 폼과 밸런스에서 뿜어져 나온, 철저히 통제된 마구였다.
태오는 그들의 소란을 즐기듯, 다시 한번 투구판을 밟았다.
바람이 불어와 마운드의 흙먼지를 흩날렸다. 태오의 눈빛은 더욱 깊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진짜 쇼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스카우터들이 들고 있는 그 비싼 장비들을 송두리째 고장 내 줄 준비가 끝났다.
태오의 시선이 망막 위의 반투명 창으로 향했다. 피칭 장부의 슬라이더가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구종 리스트 중 '슬라이더' 항목을 응시했다.
제구력 99의 영역에 도달한 지금, 다른 수치들 역시 그에 걸맞게 끌어올려야 했다. 태오는 주저 없이 손가락 끝의 감각을 매개로 슬라이더의 '수평 무브먼트' 슬라이더 바를 오른쪽으로 밀어붙였다.
두통이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이명이었다. 귀가 먹먹해지는 고주파 소음이 뇌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장부의 경고등이 붉은빛을 뿜어대며 점멸했다.
[경고: 종속과 수평 무브먼트의 비대칭 조절이 임계치를 초과했습니다.] [과열 위험! 투구 시 어깨 내구 자산의 추가 소모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태오는 어금니를 짓씹었다. 입안에서 비린 피 맛이 났다. 이 정도 통증은 회귀 전 어깨가 갈려 나가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몸값의 한계를 뚫어버릴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해리슨의 오만한 콧대를 꺾고,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서로 돈다발을 싸 들고 달려들게 만들려면 이 정도 리스크는 기꺼이 지불해야 했다.
태오가 송우진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우진은 태오의 미세한 호흡 변화를 알아챘다. 그의 눈빛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수없이 공을 받아온 파트너만이 느낄 수 있는 직감이었다. 우진은 미트를 바깥쪽 낮게 대며 자세를 낮췄다.
사인합의 완료. 태오가 몸을 웅크렸다. 어깨 안쪽에서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수명을 깎아 먹는 마구의 전조증상. 하지만 태오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열기를 손가락 끝으로 모조리 집중시켰다.
셋업. 강렬하게 회전하는 몸통. 왼발이 마운드를 찢을 듯이 디뎠다. 팔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귓가를 때리던 이명이 극대화되었다.
슈우욱! 공이 뿜어져 나왔다. 처음에는 몸쪽 높은 코스로 날아가는 실투처럼 보였다. 우타자의 머리를 향해 직진하는 위협구의 궤적. 백승태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 순간, 공이 꺾였다. 완만한 곡선이 아니었다. 직각에 가까운 예리함으로, 공이 우타자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튕겨 나간 것처럼, 공은 대각선 아래로 폭발적으로 휘어지며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 존 구석에 꽂혔다.
쾅! 우진이 미트를 바닥에 대기시켜 놓은 바로 그 자리에 공이 박혔다. 포구 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거칠고 날카로웠다.
"스트라이크!" 심판의 콜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백네트 뒤편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맙소사, 저게 뭐야?!" 보스턴 레드삭스의 스카우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에 들린 종이들이 바닥으로 맥없이 흘러내렸다. "슬라이더가 아니야. 저 속도에 저 각도로 꺾이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스피드건에 찍힌 숫자는 145km/h. 일반적인 투수의 직구에 맞먹는 속도로 날아오던 공이, 홈플레이트 앞에서 횡으로 무려 40센티미터 이상을 휘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변화구가 아니라, 타자의 뇌 신경을 교란하는 마구였다.
해리슨의 얼굴은 이제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준비해 온 가계약서의 숫자들을 떠올렸다. 연간 150만 달러. 전형적인 아시아 유망주 후려치기용 금액. 하지만 방금 던진 두 구의 공은 그 가계약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모욕인지를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저 투수는 150만 달러짜리 유망주가 아니다. 메이저리그 전체 드래프트에 내놓아도 1라운드 전체 1순위를 다툴 만한, 완성형 괴물이었다.
"윌리엄." 옆에 있던 뉴욕 양키스의 아시아 담당 디렉터가 해리슨을 돌아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네가 이 친구 독점 에이전트 선점했다고 했지? 계약 조건이 어떻게 되나? 우리가 가로챌 수 있는 방법은 없고?"
해리슨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턱끝에 맺혔다. 그는 아직 태오와 정식 계약을 맺지 못했다. 사전 가계약 제안은 태오의 철저한 무시 속에 허공에 뜬 상태였다. 만약 이 쇼케이스가 이대로 끝난다면, 메이저리그의 모든 빅마켓 구단들이 태오를 잡기 위해 백지수표를 들고 달려들 터였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지분은 완전히 사라진다.
태오는 마운드 위에서 그들의 당혹감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깨에서 찌릿한 통증이 잔잔하게 번졌지만, 입가에는 냉소적인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이걸로 첫 번째 딜은 끝났다.'
구단들의 경쟁을 부추기고 몸값을 폭등시킨다. 자본의 밀림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가 가장 강력한 포식자가 되는 것뿐이었다.
태오가 다시 공을 잡으려던 그때. 백네트 뒤편의 문이 열리며, 낯익은 인물이 다급한 걸음으로 불펜을 향해 걸어왔다. KBO 서울 타이탄즈의 단장이었다. 그의 뒤에는 기자 몇 명이 카메라를 든 채 뒤따르고 있었다.
"강태오 선수! 잠시 투구를 멈춰 주십시오!" 단장의 목소리가 목동 야구장에 거칠게 울려 퍼졌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공문서가 들려 있었다. 태오의 미간이 좁아졌다. 또다시 구시대적인 협박과 족쇄를 채우려는 움직임이었다.
과연 저들이 준비한 마지막 카드는 무엇인가. 태오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