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3아웃을 장식한 뒤 마운드를 내려가던 태오에게 불같이 독기가 가득 오른 천민국 감독이 뺨을 때려 갈기려는 듯 손을 세차게 허공으로 치켜든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안개 너머로 살기가 득실거렸다. 공기를 가르는 묵직한 마찰음이 태오의 귓가를 때리기 직전이었다.

턱.

공중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일었다.

태오의 왼손이 허공을 가르던 천민국의 손목을 정확하게 낚아챘다. 회귀 전, 메이저리그의 거친 괴물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단련했던 악력이 천민국의 손목뼈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윽……!"

천민국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뼈와 뼈가 맞부딪치며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천민국의 안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손을 빼내려 발버둥을 쳤지만, 태오의 손귀는 단단한 강철 바이스처럼 조여들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덕아웃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얼어붙었다.

배트를 정리하던 부원들도, 타격 헬멧을 쓰던 주전 타자들도 모두 동작을 멈췄다. 흙먼지가 날리는 덕아웃 안에서 오직 거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감독의 폭력에 선수가 물리력으로 맞선 전대미문의 상황이었다.

"이, 이 미친 새끼가……! 안 놓아?"

천민국이 이빨을 사납게 갈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 안에 담긴 살의는 감출 수 없었다.

태오는 천민국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차갑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고요한 눈동자였다. 어깨 혹사 트라우마로 다져진 깊은 불신과 경멸이 그 눈빛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태오가 천민국의 귀가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오직 두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치지 마십시오, 감독님. 여기서 손가락 하나라도 더 놀리시면, 감독님 라커룸 구석에 있는 그 분홍색 수첩이 내일 아침 야구협회와 언론사 팩스로 들어갈 겁니다."

천민국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후원금 횡령과 대학 입시 비리 청탁 명단. 천민국이 자신의 파멸을 막기 위해 숨겨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태오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천민국의 기세는 밑바닥까지 고꾸라졌다.

"너, 네놈이 그걸 어떻게……."

"그리고 저 안 내려갑니다."

태오가 천민국의 손목을 홱 내팽개쳤다. 천민국은 중심을 잃고 뒤로 두어 걸음 비틀거렸다.

태오는 제 유니폼 소매를 거칠게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내려가면 이 경기는 지고, 저기 앉아 있는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 앞에서 당신의 무능이 증명될 뿐입니다. 우승컵 들고 프로 구단 감독 자리 알아보셔야 할 텐데, 여기서 미끄러지면 끝인 거 잘 아시잖습니까?"

천민국은 붉게 멍이 들어가기 시작한 제 손목을 움켜쥔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입술을 파르르 떨며 태오를 노려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태오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 벤치 구석으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망막 위에 떠오르는 반투명한 푸른빛 화면을 응시했다.

[피칭 장부 (Pitching Ledger)] - 누적 내구 자산: 88.4% - 현재 피칭 부하: 극소 (구속 제한 상태) - 구종별 스펙 조정 활성화.

'더는 숨길 필요가 없다.'

어깨를 아끼기 위해 140km/h 중반대로 조율하던 봉인을 풀 때였다. 천민국이라는 걸림돌을 확실하게 짓밟고, 저 높은 관중석에 앉아 있는 메이저리그의 포식자들에게 자신의 진짜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태오는 의식 속에서 구속 슬라이더 바를 과감하게 오른쪽 끝으로 밀어붙였다.

▶ 직구 최대 구속 리미트: 155km/h (내구도 소모율 증가 경고) ▶ 회전수(RPM) 보정: +200 RPM 설정.

정수리 부근이 찌르르하게 울리며 미세한 이명이 들려왔다. 어깨 인대가 팽팽하게 긴장하는 느낌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회귀 후 처음으로 가동하는 극한의 출력이다.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경고 신호를 보냈지만, 태오의 입꼬리는 서늘하게 올라갔다.

이 정도 리스크는 비즈니스의 기본 비용에 불과했다.

그때, 덕아웃 한구석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체포당하듯 굳어 있던 벤치의 침묵을 깨고 걸어온 것은 포수 송우진이었다. 우진은 무거운 포수 장비를 덜컹거리며 태오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우뚝 섰다.

우진의 땀에 젖은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감독에게 대항하는 태오의 모습에 경악하면서도, 마운드 위에서 보여준 그의 압도적인 완벽함에 매료된 눈빛이었다.

우진이 뚜벅뚜벅 걸어가 벤치 앞에 멍하니 서 있는 팀원들을 향해 돌아섰다.

"전부 정신 안 차려? 경기 아직 안 끝났어! 5회 끝났고 이제 후반전이다. 다들 타석에서 공 하나라도 더 보고, 루상에 나가면 죽어라 뛰어!"

우진의 굵고 우렁찬 목소리가 덕아웃의 벽을 치고 울렸다. 짓눌려 있던 선수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우진은 기가 죽어 있는 백승태의 어깨를 툭 치며 장비를 챙겼다.

"승태 너도 불펜에서 몸 계속 풀어라. 하지만 오늘 마운드는 태오가 끝까지 책임진다. 내 말이 틀렸냐, 감독님?"

우진이 천민국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쐐기를 박았다. 천민국은 이빨을 질겁하게 깨물었지만, 끝내 교체 사인을 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실상 태오의 마운드 잔류를 묵인한 꼴이었다.

분위기를 장악한 우진이 태오에게로 다가왔다.

우진은 두꺼운 미트를 낀 손으로 태오의 듬직한 가슴팍을 툭 쳤다. 가죽 미트가 가슴에 닿는 둔탁한 감각과 함께 우진의 깊고 단단한 눈빛이 태오의 시선과 맞부딪쳤다.

"태오야."

"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숨기고 있는지 난 모른다. 하지만 마운드 위에서 네가 던지는 공이 진짜라는 건 알아."

우진이 씩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태오의 고독을 기꺼이 나누어 짊어지겠다는 묵직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네 영혼을 믿고 마음껏 질러라. 네가 던지는 공이 땅바닥으로 처박히든, 하늘로 솟구치든 내가 온몸으로 다 막아줄 테니까. 넌 그냥 내 미트만 보고 네 야구를 해."

태오는 대답 대신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우진의 그 우직한 신뢰가, 혹사당해 버려졌던 전생의 차가운 트라우마로 굳어 있던 태오의 심장을 미세하게 흔들었다. 타인을 믿지 못하는 냉소적 극단주의자에게도, 우진의 가슴팍 토닥임은 묘하게 따뜻한 열기로 남았다.

"미트나 잘 대고 있어라. 공 놓쳐서 내 방어율 깎아 먹지 말고."

태오가 툭 던지듯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 마라, 임마. 네 공 잡으려고 내 손가락 뼈가 몇 번이나 부러져 가며 버텼는데."

우진이 호탕하게 웃으며 헬멧을 고쳐 썼다.

6회초, 공수 교대.

관중석의 웅성거림이 극에 달했다. 5회에 교체될 줄 알았던 청룡고의 에이스, 강태오가 다시 마운드로 걸어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강태오가 그대로 올라옵니다!"

"감독이랑 아까 덕아웃에서 분위기 안 좋지 않았어? 무슨 일이지?"

중계석의 캐스터가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고, 관중석에 포진한 프로 구단 스카우터들의 눈빛도 덩달아 예리해졌다.

특히 중앙 탁자석에 자리 잡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터 롭 맥도널은 수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교체 사인이 나왔다가 번복된 건가? 재미있군. 한국의 고교 야구에서 저런 반항적인 투수는 처음 봐. 자신의 페이스를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의지가 돋보여."

그의 옆에 앉은 동료 스카우터가 턱을 괴며 덧붙였다.

"하지만 어깨가 버텨줄까? 이미 5회까지 전력투구를 하진 않았다 해도 고교생의 육체다. 이제 슬슬 구위가 떨어질 타이밍인데."

"두고 보면 알겠지. 저 녀석이 정말 우리가 찾는 '진짜'인지 아닌지."

마운드에 선 태오는 가볍게 흙을 골랐다.

바람이 불어와 투수판을 스쳐 지나갔다. 태오의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긴장감이 뿜어져 나왔다. 구속 제한을 해제한 상태. 어깨의 세포들이 비명을 지르기 직전의 팽팽한 장력이 느껴졌다.

타석에는 덕수고의 3번 타자, 고교 리그 최상위권의 콘택트 능력을 자랑하는 우타자 민선우가 들어섰다.

민선우는 배트를 짧게 쥐고 태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전 이닝까지 태오가 던진 140km/h 중반대의 지저분한 변형 직구에 타이밍을 맞추겠다는 계산이 서 있는 눈빛이었다.

송우진이 낮게 쪼그려 앉으며 미트를 한가운데에서 약간 바깥쪽으로 대었다.

'와라, 태오야. 네가 가진 최고의 공을 보여줘.'

태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인 교대는 찰나였다. 태오가 왼발을 높게 치켜올리며 몸을 극단적으로 회전시켰다. 투구 폼은 이전과 완전히 같았다. 부드럽고 유연한 채찍질 같은 투구 메커니즘.

하지만 손끝에서 공이 떨어져 나가는 그 순간, 공기를 찢는 파열음의 궤적 자체가 달랐다.

쉬이이익!

공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아니라, 대기를 물리적으로 찢어발기는 듯한 광음이 구장에 울려 퍼졌다.

하얗게 번쩍이는 광선이 타자의 시야를 덮쳤다.

민선우는 직구 타이밍에 맞춰 배트를 돌렸다. 그의 빠른 배트 스피드로 볼 때, 140km/h 중반대의 공이라면 충분히 맞출 수 있는 궤적이었다.

하지만 배트가 홈플레이트 위를 통과하는 순간, 공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퍼억!

송우진의 가죽 미트가 찢어질 듯한 폭음과 함께 뒤로 강하게 밀렸다.

"스뜨라아아잌!"

주심의 우렁찬 콜과 함께 전광판의 구속 측정기가 미친 듯이 깜빡였다.

[ 154 km/h ]

순간, 야구장 전체가 물을 끼얹은 듯 침묵에 잠겼다.

154. 고교 야구 결승전, 그것도 6회에 선발 투수가 던진 공의 구속이 154km/h를 찍었다.

"말도 안 돼……!"

덕수고 덕아웃에서 경악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배트를 돌렸던 민선우는 멍하니 제 배트를 내려다보았다. 공이 지나간 궤적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눈빛이었다.

"구속이…… 올라갔어? 이 타임에?"

롭 맥도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에 들린 스피드건 역시 정확하게 95.7마일(154km/h)을 가리키고 있었다.

"힘을 아끼고 있었던 거야! 경기 후반에 구속을 더 올리다니, 저 녀석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지?"

태오는 마운드 위에서 차갑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깨 인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감각이 전해졌다. 수명 자산의 소모율이 미세하게 요동쳤지만, 이 짜릿한 지배감 앞에서는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았다.

'이것이 진짜 내 야구다.'

두 번째 공.

태오의 손끝을 떠난 공이 이번에는 타자의 몸쪽으로 사납게 파고들었다.

민선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공은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자이로 회전을 그리며 스트라이크 존 구석을 날카롭게 찔렀다.

툭!

배트가 겨우 닿았지만, 공의 엄청난 종속과 회전력을 이기지 못하고 빗맞은 타구가 파울라인 밖으로 굴러갔다. 투 스트라이크.

민선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공이 날아오는 궤적이 마치 거대한 바위가 눈앞으로 쏟아지는 듯한 압박감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구.

태오는 구종을 바꾸지 않았다. 오직 압도적인 힘과 회전력으로 타자의 영혼을 밟아버리는 피칭.

슈우우우욱!

공이 타자의 시야에서 순간적으로 사라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민선우가 필사적으로 배트를 휘둘렀지만,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만 쓸쓸하게 맴돌았다.

쾅!

"삼진 아웃!"

우진의 미트에 박힌 공의 파동이 덕아웃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단 세 구 만에 고교 최고의 타자가 무기력하게 돌아서야 했다.

이어지는 4번 타자 임대호와의 재대결.

임대호는 이전 타석에서의 삼진을 만회하겠다는 듯 잔뜩 독기를 품고 들어섰다. 하지만 태오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초구, 153km/h 몸쪽 하이 패스트볼. 배트가 밀리며 헛스윙.

2구, 155km/h 바깥쪽 보더라인을 스치는 꽉 찬 직구. 루킹 스트라이크.

관중석에서는 이미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시대를 초월한 괴물의 등장을 목도한 이들의 경외심 섞인 환호였다.

그리고 3구째.

태오는 손가락 끝의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피칭 장부의 슬라이더 바가 붉은빛으로 타오르며 경고음을 울렸다.

[ 경고: 순간 한계 구속 도달. 내구 자산 소모율 일시적 급증. ]

'상관없다. 여기서 완전히 끝낸다.'

태오가 마운드를 강하게 박찼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의 오른팔이 채찍처럼 휘어지며 대기를 가르고, 손가락 끝에서 실밥을 긁는 묵직한 마찰음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쿠구구구궁!

마치 마운드 위에서 번개가 내리꽂히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의 궤적이었다.

임대호가 이빨을 악물고 온 힘을 다해 배트를 돌렸다. 타이밍은 완벽했다. 공을 맞추겠다는 집념이 담긴 풀스윙이었다.

하지만 태오가 던진 마지막 공은, 단순한 직구가 아니었다. 155km/h를 상회하는 압도적인 구속에 폭발적인 종속이 더해져 타자 앞에서 솟구쳐 오르는 듯한 착각을 주는 무시무시한 마구(魔球)였다.

쾅!

둔탁하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야구장에 메아리쳤다.

임대호의 단단한 단풍나무 배트가 공의 엄청난 회전과 무게감을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반으로 갈라지며 허공으로 흩날렸다. 부러진 배트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는 찰나.

퍽!

찢어질 듯한 소리와 함께 공은 이미 송우진의 미트 한가운데에 정확하게 박혀 있었다.

"……!"

야구장 전체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관객석의 모두가 비명을 지르는 찰나, 태오가 던진 마지막 156km의 공이 타자의 배트를 부러뜨리며 미트로 꽂히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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