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를 거꾸로 쥔 채 마운드를 노려보는 덕수고의 4번 타자 임대호의 눈빛은 살기가 등등했다. 배트 헤드를 쥐고 손잡이를 위로 올린 극단적인 초공격 대형. 변칙적인 패스트볼의 궤적을 기어코 맞추겠다는 모욕적인 선언이자, 투수의 자존심을 정면으로 긁어내리는 도발이었다.
태오는 마운드 위에서 가볍게 실소를 흘렸다. 콧방귀 소리가 섭씨 35도의 더운 공기를 뚫고 흩어졌다. 짓이겨진 잔디 위로 징 스파이크를 박아 넣으며, 태오는 망막 위에 떠오른 푸른빛의 스크린을 가만히 응시했다.
[피칭 장부 (Pitching Ledger)] - 내구 자산 잔액: 92.11% - 포심 패스트볼 수치 조절 슬라이더 ▶ 회전수(RPM): 2,250 (기본) → 2,650 (조정 대기) ※ 경고: 회전수 급격한 상승 시 내구 자산의 영구 차감율이 미세하게 증가합니다.
‘겨우 고교 수준의 타자가 꼼수를 부린다고 내 공을 건드릴 수 있을 것 같나.’
태오는 망설임 없이 의식 속에서 슬라이더 바를 오른쪽 끝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찌르르하는 청각적인 노이즈가 고막을 흔들었다. 기분 나쁜 이명이 뇌리를 스쳤지만, 이내 어깨 관절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에너지가 맥박을 타고 흘러내렸다.
회전수 2,650 RPM. 메이저리그에서도 최정상급 파이어볼러들만이 뿜어내는 수치다. 공의 수직 무브먼트가 극대화되어 타자의 눈에는 공이 솟구쳐 오르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킬 터였다.
포수 플레이트 뒤에 앉은 송우진이 태오의 눈빛을 읽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은 타석의 임대호가 취한 기이한 자세를 힐끗 보더니, 미트를 바깥쪽 보더라인 가장자리에 딱 붙여 댔다.
‘태오 이 새끼, 눈빛이 변했어. 힘으로 찍어 누를 생각이다.’
우진은 태오의 강박적인 완벽주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그 지독한 눈빛. 우진은 미트를 단단히 움켜쥐며 온 신경을 태오의 손끝에 집중했다.
태오의 왼발이 하늘을 향해 높게 치솟았다가 지면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투구 폼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고, 부드러운 회전 축을 따라 오른팔이 채찍처럼 채어 나왔다.
쉬이익!
공기를 찢는 파열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손끝을 떠난 야구공이 실밥의 마찰음을 요란하게 내며 포수 미트를 향해 돌진했다.
임대호의 눈이 순간적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배트를 짧게 쥐고 가볍게 툭 맞추려던 그의 스윙 궤적보다, 공이 도달하는 속도가 압도적으로 빨랐다. 게다가 공은 타자 앞에서 떨어지기는커녕, 중력을 거스르듯 위로 솟구치며 타자의 가슴팍 높이로 치고 들어왔다.
퍽!
"스트라이크!"
심판의 우렁찬 콜이 신월 야구장을 울렸다. 임대호의 배트는 공이 이미 포수 미트에 박힌 뒤에야 허공을 갈랐다.
임대호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배트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공의 궤적을 읽고 배트를 내밀었는데, 공이 배트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야, 임대호! 정신 차려! 가볍게 맞춰!"
덕수고 덕아웃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지만, 임대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우진은 미트에 꽂힌 공의 묵직함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의 충격이었지만, 그는 겉으로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자연스럽게 미트를 안쪽으로 1인치 슬쩍 끌어당기며 심판의 눈을 속이는 프레이밍을 선보였다.
"볼끝이 미쳤네, 진짜."
우진이 태오에게 공을 돌려주며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태오는 대답 대신 모자챙을 슬쩍 만질 뿐이었다.
두 번째 공 역시 사정없었다.
태오는 장부의 슬라이더를 그대로 유지한 채, 이번에는 몸쪽 낮게 제구된 하이 스핀 패스트볼을 꽂아 넣었다. 임대호가 본능적으로 배트를 돌렸으나, 묵직한 구위에 밀려 배트가 힘없이 부러지며 3루 측 파울라인 밖으로 굴러갔다.
투스트라이크.
완벽하게 몰린 임대호는 부러진 배트를 던져버리고 새 배트를 들고 타석에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당혹감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배트를 정상적으로 쥐었지만, 이미 그의 밸런스는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세 번째 공은 바깥쪽 꽉 찬 보더라인으로 흘러가는 고속 슬라이더였다.
우진은 태오의 손가락 끝이 꺾이는 미세한 각도를 보고 이미 공의 궤적을 예측했다. 그는 몸을 왼쪽으로 반 보 이동시키며, 날아오는 공을 마중 나가듯 미트 안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콰아아앙!
포수 미트가 닫히는 소리가 경기장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미트가 닫히는 순간의 위치는 정확히 스트라이크 존의 가장자리 선 위에 걸쳐 있었다. 우진의 귀신같은 포인팅에 심판의 손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삼진! 아웃!"
임대호는 배트를 손에 쥔 채 얼어붙었다. 3구 삼진. 고교 최고의 타자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처참한 패배였다.
태오는 마운드 위에서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포수 플레이트를 바라보았다. 우진이 미트를 툭 치며 태오를 향해 씨긋 웃어 보였다. 자신을 그저 성적을 내기 위한 도구로만 취급하는 천민국 감독이나 기성 야구계의 어른들과 달리, 우진은 태오의 완벽한 피칭을 온전히 받아내고 지탱해 주는 유일한 파트너였다. 둘 사이의 묵묵한 신뢰가 마운드와 홈플레이트 사이의 18.44미터를 뜨겁게 메우고 있었다.
이 미친 광경을 야구장 뒤편 관람석에서 숨을 죽인 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평범한 등산복 차림에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쓴 중년의 이방인들. 그들의 손에는 국내 야구 관계자들은 잘 사용하지 않는, 세련된 디자인의 소형 레이더 추적 장비(스피드건)가 들려 있었다. 메이저리그(MLB)의 명문 구단 스카우터들이었다.
"맙소사…… 앤디, 저 수치 봤어?"
보스턴 레드삭스의 아시아 지역 총괄 스카우터인 롭 맥도널이 옆자리의 동료에게 장비를 들이밀었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장비의 액정 화면에는 믿기 힘든 숫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Velocity: 94.7 mph (152.4 km/h)] [Spin Rate: 2,648 RPM] [Vertical Movement: +21.4 inches]
"한국 고교생이 2,600 RPM이 넘는 포심을 던진다고? 게다가 수직 무브먼트가 21인치라니. 이건 빅리그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야. 레이더 오작동 아니야?"
앤디가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의 장비를 확인했다. 그러나 그의 화면 역시 동일한 수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작동이 아니야. 저 투수, 릴리스 포인트가 엄청나게 높고 일관돼. 게다가 포수와의 호흡 좀 봐. 포수가 공의 회전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프레이밍을 해주고 있어. 저 둘은 단순한 고교생 배터리가 아니야. 이미 완성된 프로 수준이야."
롭은 흥분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수첩에 강태오의 이름을 거칠게 휘갈겨 썼다.
"이건 즉시 본사에 보고해야 해. 1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으로는 택도 없겠어. 다른 구단 놈들이 냄새를 맡기 전에 우리가 선점해야 한다."
스카우터들의 눈빛이 탐욕과 경탄으로 번들거렸다. 그들은 이미 강태오라는 가공되지 않은 다이아몬드가 가진 진짜 가치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한편, 2회초를 무실점 삼진 두 개로 가볍게 정리한 태오는 마운드를 내려왔다. 어깨의 통증은 전혀 없었다. 장부의 세밀한 조절 덕분에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극한으로 줄인 덕분이었다.
하지만 덕아웃으로 들어서는 태오를 맞이한 것은 승리의 찬사가 아니었다.
천민국 감독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의 지시를 사사건건 무시하고, 완투 대신 철저한 투구 수 관리를 고집하며 자신을 조롱한 태오의 태도에 인내심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태오가 덕아웃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는 순간, 천민국이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그의 오른팔이 허공으로 크게 치솟았다.
"이 건방진 새끼가 감히 누구 앞질러서 대가리를 굴려!"
천민국의 두꺼운 손바닥이 태오의 뺨을 향해 세차게 날아들었다. 덕아웃의 모든 선수들이 경악하며 숨을 죽인 그 찰나의 순간.
태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회귀 직후 라커룸 구석 캐비닛 깊은 곳에서 찾아내 스마트폰으로 샅샅이 촬영해 두었던, 천민국의 사설 입시 수수료 수수 비리와 후원금 횡령 내역이 적힌 '분홍색 비밀 수첩'의 페이지들이 스쳐 지나갔다.
‘칠 테면 쳐봐라, 천민국. 그 손이 네 야구 인생을 끝내는 마지막 방아쇠가 될 테니까.’
태오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 냉혹한 계산 끝에 나온, 지독한 포식자의 미소였다.
바람을 가르는 파열음. 천민국의 두꺼운 손바닥이 매섭게 하강했다.
텁!
둔탁한 마찰음이 덕아웃의 적막을 깼다. 천민국의 손목을 움켜쥔 것은 강태오의 손이 아니었다. 거대한 포수 미트를 벗어던진 송우진의 맨손이었다.
"감독님, 참으십시오. 관중석에 눈이 많습니다."
우진의 목소리는 밭은 숨소리와 함께 떨리고 있었다. 그의 넓은 등판이 태오의 앞을 가로막아 서 있었다.
"비켜, 이 새끼야! 이게 어디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배운 망나니짓이야!"
천민국이 악을 쓰며 팔을 뿌리쳤다. 그의 눈에 핏발이 벌겋게 섰다. 주변의 2학년 선수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움츠렸다. 덕아웃 뒤편의 공기가 납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태오가 우진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냈다. 우진이 우려 섞인 눈빛으로 돌아보았지만, 태오는 단호하게 그를 뒤로 물렸다.
태오가 천민국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한 뼘. 태오가 고개를 숙여 천민국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2012년 가을, 마포구 오피스텔 분양권."
"……뭐?"
천민국의 분노로 일그러졌던 얼굴이 찰나의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작년 가을, 백송대학교 체육특기자 전형 기부금 명목의 2억 4천만 원. 김민우, 박정태 부모의 계좌에서 감독님 사모님 계좌로 들어간 내역들."
태오의 목소리는 얼음송곳처럼 차갑고 정밀했다.
"라커룸 구석의 분홍색 수첩. 제가 원본을 아주 선명하게 촬영해 뒀습니다. 지금 당장 협회와 언론사에 전송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실랍니까?"
"너, 너……!"
천민국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며 누렇게 떴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이 그의 턱살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사설 입시 비리와 기부금 횡령. 그것이 터지는 순간 KBO 프로 감독직은커녕 야구계에서 영구 제명되고 철창신세를 져야 했다. 그의 전 재산과 명예가 고작 18세 고교생의 손가락 끝에 저당 잡힌 꼴이었다.
태오는 천민국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마치 아랫사람을 격려하는 듯한 오만한 몸짓이었다.
"남은 이닝은 제 방식대로 던집니다. 감독님은 그냥 벤치에 얌전히 앉아 계세요. 우승 감독 타이틀은 챙겨 드릴 테니까."
태오는 그대로 돌아서서 벤치 깊숙이 몸을 묻었다.
천민국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신음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덕아웃의 부원들은 태오가 감독에게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영문을 몰라 마른침만 삼켰다.
"태오 너 방금……."
우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태오는 눈을 감은 채 차갑게 대꾸했다.
"신경 끄고 다음 이닝 준비나 해. 저 인간은 이제 이 마운드에 간섭 못 하니까."
망막 위로 푸른빛의 스크린이 다시 떠올랐다.
[내구 자산 잔액: 91.95%]
RPM을 무리하게 끌어올린 대가로 0.16%의 자산이 추가로 깎여 있었다. 메이저리그 진출 전까지 이 어깨의 수명을 철저히 보존해야 한다. 힘으로만 찍어 누르는 투구는 비효율적이다.
'이제부턴 제구와 무브먼트의 영역이다.'
공수 교대. 청룡고의 2회말 공격이 득점 없이 끝났다. 경기 속도는 빨랐다.
3회초가 시작되자 태오는 가볍게 마운드로 걸어 올라갔다.
덕수고의 5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임대호의 삼진으로 잔뜩 위축된 기색이 역력했다.
태오는 장부의 슬라이더 바를 조절했다.
[투구 옵션 조정] ▶ 슬라이더 횡 무브먼트: +3인치 (내구도 소모 극소화 세팅) ▶ 타겟 포인트: 바깥쪽 보더라인 하단 하프인치 오차 범위 설정.
우진의 미트가 바깥쪽 낮게 깔렸다. 태오의 손끝에서 백색 광풍이 뿜어져 나왔다. 직구처럼 날아가던 공이 홈플레이트 직전에서 자를 댄 듯 날카롭게 꺾였다.
"스트라이크!"
타자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공의 회전축을 완벽하게 읽은 우진의 미트가 마치 자석처럼 공을 빨아들였다. 퍽, 퍽, 퍽. 단 세 구 만에 또 하나의 삼진이 전광판에 새겨졌다.
관중석의 롭 맥도널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속을 140km대 중반으로 늦추는 대신 무브먼트를 극한으로 살렸어. 경기 상황에 따라 자신의 어깨를 조절하는 능력이 고교생 수준이 아니야. 이건 완벽하게 계산된 기계의 피칭이다!"
그의 동료 역시 흥분으로 미쳐가고 있었다.
"저 녀석은 당장 마이너리그를 건너뛰고 상위 싱글A나 더블A에 처넣어도 통할 거야. 미친 재능이야!"
4회초, 5회초가 야구장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순식간에 지워졌다. 태오의 투구 수는 단 18구. 단 한 명의 주자도 루상에 내보내지 않은 퍼펙트 행진이었다. 땀방울이 그의 턱선을 타고 마운드의 흙바닥으로 점점이 떨어졌다. 육체의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조율하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이 청룡고를 향해 미소 짓던 바로 그 순간.
덕아웃에서 믿기 힘든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투수 교체! 강태오 내려오고, 백승태 올라가!"
파랗게 질린 채 벤치 구석에 처박혀 있던 천민국 감독이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심을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든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광기와 극단적인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자신의 목줄을 쥔 태오를 이대로 마운드 위에 둘 수 없다는, 쥐새끼 같은 발악이었다.
야구장 전체에 무거운 침묵과 경악이 내려앉았다. 퍼펙트 피칭을 이어가던 에이스를 5회에 강판시킨다는 전대미문의 결정에 관중석의 스카우터들은 비명을 질렀고, 마운드 위의 태오는 차가운 눈빛으로 덕아웃을 쏘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