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수첩의 촬영을 완벽하게 끝마친 태오는 락커룸 구석의 어둠을 걷어내며 마운드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밤공기는 비릿한 흙먼지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불 꺼진 신월 야구장의 마운드는 거대한 무덤처럼 고요했다. 태오는 오른발 끝으로 투수판을 툭툭 건드렸다. 단단했다. 회귀 전, 이 딱딱한 흙바닥 위에서 어깨가 갈려 나가는 줄도 모르고 던져댔던 기억이 뼈마디를 타고 시리게 올라왔다.
"태오냐?"
어둠을 찢고 끈적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덕아웃 그늘에서 붉은 불빛이 번쩍였다. 타들어 가는 담배 필터 끝이 천민국의 비열한 얼굴을 간헐적으로 비추었다. 천민국은 가래침을 뱉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깨에 걸친 유니폼 자락이 밤바람에 펄럭였다.
"밤늦게까지 마운드를 서성이는 걸 보니, 내일 결승전 생각에 잠이 안 오는 모양이구나."
천민국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담연이 태오의 뺨을 스쳤다. 조롱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승태가 먼저 나간다. 하지만 어깨가 성치 않으니 길게는 못 버티겠지. 결국 네가 뒤를 책임져야 한다. 알겠냐?"
태오는 대답 대신 천민국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밤하늘의 달빛보다 더 차갑고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천민국은 그 건방진 태도가 거슬렸는지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스파이크 앞코로 짓뭉겼다.
"투구 수 따위 신경 쓰지 마라. 내일은 우승기를 가져와야 하는 날이다. 어깨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전력을 다해 던지는 것, 그게 고교 야구의 투혼이고 사나이의 의리다. 네가 던질 수 있을 때까지 던져."
"투혼이라."
태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 투혼의 대가로 감독님은 프로 구단 감독 자리를 얻으시겠지요."
천민국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허공을 가르는 침묵 속에서 사나운 살기가 피어올랐다. 천민국은 태오의 멱살을 잡을 듯이 다가와 낮게 으르렁거렸다.
"주둥이 조심해라, 강태오. 내 사인이 곧 법이고, 내 지시가 곧 네 미래다. 내일 마운드 위에서 헛짓거리했다간 네 야구 인생은 고등학교에서 끝날 줄 알아."
"걱정 마십시오."
태오는 천민국의 어깨를 가볍게 스쳐 지나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제 어깨의 가치는 제가 가장 잘 아니까요. 감독님의 각본대로 움직여 주지는 않을 겁니다."
천민국의 거친 숨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태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락커룸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태오의 눈앞에 푸른빛의 반투명한 인터페이스가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피칭 장부(Pitching Ledger) 활성화] [보유 내구 자산: 92.14%] [경고: 한계 투구 수 초과 시 내구 자산 영구 차감 돌입]
내일은 결승전이다. 그리고 그 마운드는 천민국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제단이 아니라, 강태오라는 포식자의 가치를 증명할 완벽한 쇼케이스가 될 것이다.
***
다음 날, 목동 야구장은 터질 듯한 열기로 끓어 넘치고 있었다.
8월의 폭염이 인조잔디를 달구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관중석을 가득 메운 동문들의 응원가와 밴드의 나팔 소리가 고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백네트 뒤편 명당자리에는 국내 프로 구단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 로고가 박힌 서류 가방을 든 스카우터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덕수고등학교와의 청룡기 결승전.
천민국은 애초에 약속된 승부조작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려 했다. 어깨가 완전히 망가진 백승태를 무리하게 선발로 올려 점수를 내준 뒤, 태오를 구원 등판시켜 혹사 구도로 몰고 가려 한 것이다. 그러나 경기 직전, 승태는 불펜에서 공 세 개를 던지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미 한계를 맞이한 인대가 비명을 지른 탓이었다.
경기장을 찾은 수십 명의 스카우터들과 중계 카메라 앞에서 대놓고 부상 선수를 마운드에 올릴 수는 없는 법. 당황한 천민국은 결국 이빨을 갈며 태오를 선발로 지목할 수밖에 없었다.
"우진아."
장비를 챙기던 포수 송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땀방울이 턱 끝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우진의 눈동자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깊은 우려가 서려 있었다.
"감독님이 오늘 너한테 무조건 150km대 강속구로 윽박지르라고 지시하셨어. 초반부터 기를 죽여 놔야 한다고. 투구 수 조절 따위는 생각지도 말라는데……."
태오는 우진의 가슴 보호대를 툭 쳤다. 가죽의 둔탁한 파열음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감독 사인 보지 마."
우진의 눈이 크게 번져 나갔다.
"무슨 소리야? 결승전에서 감독 사인을 무시하겠다고? 그러다 찍히면……."
"내 어깨는 메이저리그 마운드에서 10년 동안 공을 뿌릴 자산이야. 천민국 그 인간의 KBO 영전용 제물이 아니라고."
태오는 우진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극단적일 만큼 확고한 강박이 서린 눈빛이었다.
"오늘 난 단 1%의 내구도도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는다. 전력 투구는 없어. 오직 완벽한 제구와 변형 패스트볼로 맞춰 잡는다. 이닝당 투구 수는 딱 세 개면 충분해."
"세 개? 상대는 덕수고야. 전국에서 가장 배트가 빠르게 도는 놈들이라고!"
"그러니까 세 개다. 그놈들은 내 속구를 노리고 초구부터 거칠게 달려들 테니까. 그걸 역이용하는 거야. 우진아, 넌 내 미트만 보고 앉아 있어라. 감독이 벤치에서 무슨 지랄을 하든, 사인은 네가 내는 거다."
우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태오의 거칠고 냉혹한 독설 뒤에 숨겨진, 살아남고자 하는 처절한 갈망이 우진의 가슴을 때렸다. 이 미친 투수가 가고자 하는 길에 기꺼이 포수가 되어 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진이 미트를 강하게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미친 새끼. 그래, 갈 데까지 가 보자. 네 공은 내가 책임지고 다 잡아낼 테니까, 네 마음대로 던져 봐."
[포수 송우진과의 동조율 상승: 95%] [시스템 보정: 제구력 능력치 +1.5% 추가 보너스 적용]
망막 위에 녹색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태오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마운드로 걸어 올라가는 태오의 등 뒤로 천민국의 매서운 시선이 꽂혔다. 덕아웃 난간을 부서져라 움켜쥔 천민국의 얼굴은 탐욕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태오는 그 비열한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채 마운드 정중앙에 섰다.
1회초, 덕수고등학교의 공격.
1번 타자 이강민이 배트를 가볍게 돌리며 타석에 들어섰다. 출루율 5할이 넘는, 끈질기게 공을 골라내기로 유명한 리드오프였다. 그는 태오의 고속 직구를 노리고 초구부터 배트를 돌릴 심산으로 타격 자세를 취했다.
태오는 홈플레이트를 바라보았다. 우진이 약속대로 감독의 사인을 완전히 무시한 채, 바깥쪽 낮은 코스에 미트를 댔다.
[피칭 장부 조율] - 선택 구종: 투심 패스트볼 (Two-Seam Fastball) - 설정 구속: 138km/h (내구 자산 소모 최소화 설정) - 회전수: 2,450 RPM - 횡무브먼트: 우타자 몸쪽 테일링 공간 4cm 확장 - 예상 내구도 소모: 0.01%
태오의 상체가 부드럽게 회전했다. 회귀 전의 거칠고 폭력적인 투구 폼이 아니었다. 물 흐르듯 유려하고, 관절의 마찰을 극한으로 줄인 완벽한 메커니즘.
손끝을 떠난 공이 허공을 갈랐다.
슝!
이강민의 눈이 번쩍였다.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오는 밋밋한 아리랑 볼이라 생각했다. 구속은 고작 138km. 실투라고 판단한 이강민의 배트가 거침없이 매서운 호를 그리며 돌아갔다.
하지만 공이 홈플레이트 직전에서 기이하게 꺾였다. 우타자의 몸쪽 깊숙한 곳으로 급격하게 휘어 들어가는 투심의 궤적.
깡!
배트의 가장 가느다란 목 부분에 공이 얹혔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이강민의 손바닥이 부르르 떨렸다. 힘없이 굴러간 공은 3루수 정면으로 힘없이 굴러갔다.
"아웃!"
단 1구. 1루로 뛰던 이강민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배트를 내려다보았다.
덕아웃의 천민국이 벌떡 일어났다. "저 새끼가 미쳤나! 첫 타자부터 왜 저딴 아리랑 볼을 던져!"
천민국은 전력 투구로 타자를 윽박지르는 그림을 원했다. 그래야 스카우터들의 눈에 태오의 '투혼'이 화려하게 포장될 테니까. 하지만 태오는 천민국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고 있었다.
2번 타자 박태양이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앞선 타자의 허무한 아웃에 독이 바짝 오른 상태였다. 배트를 강하게 쥐며 태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우진이 미트를 몸쪽 낮게 붙였다.
[피칭 장부 조율] - 선택 구종: 커터 (Cutter) - 설정 구속: 134km/h - 예상 내구도 소모: 0.01%
태오의 와인드업은 이전과 완전히 동일했다. 타자의 입장에서는 구종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완벽한 디셉션(Deception)이었다.
공이 뻗어 나갔다. 이번에도 타자가 치기 가장 좋은 높이로 흘러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박태양은 주저하지 않고 배트를 힘껏 휘둘렀다.
찰나의 순간, 공이 바깥쪽으로 예리하게 미끄러졌다. 배트 끝에 살짝 걸린 공이 높게 솟구쳤다.
툭.
2루수 정면으로 통통 떠가는 평범한 플라이 볼. 2아웃.
"……두 개?"
관중석의 스카우터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스피드건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구속은 140km도 안 되는데, 타자들이 타이밍을 전혀 못 맞추고 있어. 무브먼트가 지저분한 것도 그렇지만, 투구 폼에 낭비가 아예 없잖아?"
"맞춰 잡는 예술이네. 고교 수준의 제구력이 아니야."
야구계의 구시대적 근성론에 찌든 지도자들은 태오의 부드러운 투구를 '겁먹은 피칭'이라 비하하겠지만, 세이버메트릭스와 데이터를 신봉하는 현대 야구의 전문가들에게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예술이 없었다.
3번 타자이자 덕수고의 4번 타자급 강타자, 최현우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앞서 두 명의 타자가 단 두 구 만에 아웃되는 과정을 보며 입술을 바짝 깨물었다.
'노려 치려고 대기하고 있으면 가차 없이 건드려서 아웃을 만든다. 그렇다면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치되, 약간 뒤에서 받아친다!'
최현우는 타석 가장 뒤쪽에 발을 디뎠다. 변화구의 궤적을 끝까지 보고 대처하겠다는 계산이었다.
태오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머리싸움에서 이미 이겼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진이 미트를 한가운데에서 약간 아래쪽으로 내렸다.
[피칭 장부 조율] - 선택 구종: 체인지업 (Change-up) - 설정 구속: 121km/h - 예상 내구도 소모: 0.01%
똑같은 폼, 똑같은 팔 각도.
최현우의 배트가 본능적으로 돌기 시작했다. 직구 타이밍에 맞춰 돌아가던 배트는 반박자 늦게 가라앉는 체인지업의 궤적에 허공을 갈랐다. 아니, 완전히 빗맞았다.
툭.
투수 앞으로 굴러오는 평범한 땅볼.
태오는 마운드에서 가볍게 두 걸음 내려와 공을 글로브로 낚아챘다. 그리고 1루수를 향해 가볍게 토스했다.
"아웃! 공수 교대!"
1회초 종료. 전체 투구 수: 3구. 소모된 어깨 내구도: 단 0.03%.
마운드를 내려오는 태오의 이마에는 땀방울조차 맺혀 있지 않았다.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무결점의 피칭이었다.
덕아웃으로 들어오는 태오를 향해 천민국이 거칠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야, 강태오! 너 지금 장난하냐? 전력으로 던지라고 했지! 왜 그딴 똥볼만 툭툭 던져 대는 거야? 관중석에 프로 스카우터들이 널려 있는 거 안 보여?"
태오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얼굴로 천민국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단 3구 만에 이닝을 끝냈습니다, 감독님. 이보다 완벽한 피칭이 어디 있습니까?"
"이 새끼가 진짜……!"
"혹사를 당해 주지 않아서 아쉬우신 건 아니겠지요."
태오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큼 차가웠다. 주변의 팀원들이 숨을 죽였다. 감독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에이스 투수의 서슬 퍼런 기세에 덕아웃 전체가 얼어붙었다. 천민국은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쥐었지만, 전광판에 선명하게 박힌 '0'이라는 실점과 '3'이라는 투구 수 앞에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진이 태오의 어깨를 툭 치며 음료수 병을 건넸다. 미소 띤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 역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독한 놈. 감독 얼굴 썩어 들어가는 것 봐라."
"아직 시작도 안 했어."
태오는 벤치에 깊숙이 기대앉으며 망막 위의 장부를 확인했다.
[내구 자산 잔액: 92.11%]
안도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지독한 승부욕이 심장 깊은 곳에서 요동쳤다. 이 마운드는 내 놀이터다. 누구도 내 어깨를 망가뜨릴 수 없고, 누구도 내 미래를 가로막을 수 없다.
공수 교대가 이루어지고 청룡고의 공격이 허무하게 삼자범퇴로 끝나자, 다시 2회초가 시작되었다.
태오가 다시 마운드로 걸어 올라갔다.
상대팀인 덕수고의 덕아웃 분위기는 기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3구 만에 이닝이 지워진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그들의 타격 메커니즘 자체가 송두리째 부정당한 느낌이었을 터였다.
그때, 덕수고의 다음 타자가 타석을 향해 걸어 나왔다.
덕수고의 에이스이자 고교 최고의 괴물 타자로 불리는 4번 타자, 임대호였다. 프로 1라운드 지명이 확실시되는,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하는 거구였다.
임대호는 타석에 들어서기 전, 태오를 빤히 쏘아보았다. 그의 눈빛이 기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태오의 정밀한 투구에 무언가 자극을 받은 모양이었다.
타석에 들어선 임대호는 예의 바른 준비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배트를 거꾸로 쥐었다. 배트의 헤드 부분을 잡고 손잡이 부분을 아래로 향하게 한, 극단적으로 짧고 기이한 초공격 대형이었다. 배트 컨트롤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태오의 정밀한 변형 패스트볼을 어떻게든 맞추어 내겠다는, 이례적이고도 모욕적인 선언이었다.
임대호가 거꾸로 쥔 배트 끝을 태오의 얼굴을 향해 겨누며 마운드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마운드 위의 태오와 타석의 임대호 사이로 팽팽한 불꽃이 튀겼다.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야구장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