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전 완투를 지시하러 마운드로 걸어오는 청룡고 천민국 감독의 거만한 실루엣 위로, 장부의 첫 정산이 시작되고 눈앞에 번뜩이는 무한의 숫자가 그를 전율케 한다.
망막을 가득 채운 핏빛 알림창이 거칠게 점멸했다.
[★ 긴급 돌발 퀘스트 발생 ★] [천민국의 검은 거래를 차단하라] - 상세: 천민국 감독이 내일 결승전의 승부조작 및 특정 대학 입시 청탁을 위해 상대 팀과 은밀한 거래를 시도 중입니다. - 패널티: 퀘스트 실패 시, 내일 경기 중 어깨 내구 자산 강제 차감 (-30.00%)
30퍼센트. 은퇴의 지옥으로 직행하는 급행열차 티켓이나 다름없는 수치였다. 회귀 전, 어깨 관절와순이 찢어져 걸레짝이 되었던 그 순간의 비명이 귓가를 스쳤다. 얼음장 같은 냉기가 척추를 타고 내리꽂혔다.
천민국이 흙먼지를 털어내며 불펜 마운드로 턱을 치켜세웠다. 한 걸음씩 다가오는 그의 구두 굽 소리가 불펜의 침묵을 짓밟았다. 입에 문 담배 필터가 침에 젖어 눅눅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너 방금 던진 거 뭐냐?"
천민국의 목소리는 축축했다. 경이로움보다는 날 것 그대로의 탐욕이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태오는 오른팔의 잔열을 느끼며 투구판에서 내려섰다. 시선은 천민국의 눈동자에 고정했다. 흔들림 없는 검은 눈동자가 감독의 비열한 안면을 파고들었다.
"포심입니다."
"포심? 지랄하네. 고교 야구판에 이런 볼을 던지는 새끼는 없어. 승태 그놈도 이 속도는 안 나와."
천민국이 침을 뱉었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가 흙먼지 속으로 짓눌렸다. 그는 태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침이 튀는 주둥이가 태오의 귀밑까지 다가왔다.
"태오야. 내일 결승이다. 네 어깨에 우리 학교 명예뿐만 아니라, 내 목줄도 걸려 있어. 알지? 네가 선발로 올라가서 끝까지 책임진다. 9회까지 다 던져. 네 놈 어깨가 부서지든 말든, 내일 우승기만 가져오면 서울대든 고려대든 내가 다 꽂아줄 테니까."
"80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태오의 목소리가 불펜의 공기를 얼려버렸다.
옆에서 미트를 껴안고 숨을 죽이고 있던 송우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우진의 손가락이 미트 가죽을 꽉 움켜쥐었다.
천민국의 미소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구겨진 가죽처럼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목덜미의 핏대가 터질 듯이 솟아올랐다.
"이 새끼가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80구? 야, 강태오. 네가 언제부터 투구 수 조절해가면서 야구했다고 그래? 감독이 던지라면 던지는 거야! 고작 고등학교 투수 새끼가 어디서 머리를 굴려? 내일은 무조건 완투야. 140구를 던지든, 150구를 던지든 이기고 내려와!"
"제 어깨는 제 자산입니다. 감독님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뭐라구?"
천민국이 태오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태오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젖히며 천민국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찰나의 순간, 태오의 망막 위에 떠 있는 '피칭 장부'의 슬라이더 바가 요동쳤다.
[피칭 장부(Pitching Ledger) 세부 조정 가동] - 보유 내구 자산: 99.90% - 현재 피칭 세팅: 포심 패스트볼 (구속 152km/h / 제구력 B / 무브먼트 C) - 소모 예측도: 구당 0.10% 차감
태오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내일 경기 내내 뿌려댄다면? 100구만 던져도 내구 자산이 10% 가까이 날아간다. 게다가 천민국의 검은 거래 퀘스트 패널티까지 더해지면 내일 하루 만에 어깨의 거의 절반이 날아간다는 소리였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내 야구는 비즈니스다. 내 몸은 가장 비싼 가격에 메이저리그에 팔려야 할 최고의 상품이다. 이런 싸구려 고교 대회, 그것도 비리 감독의 영전을 위해 소모품처럼 쓰일 순 없었다.
태오는 망막 위의 가상 슬라이더 바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허공을 만지듯, 뇌파가 인과율의 장부를 흔들었다.
[구속 슬라이더 강하: 152km/h → 141km/h] [제구력 슬라이더 상승: B → S] [무브먼트(횡/종) 슬라이더 상승: C → A+] [정산 반영: 내구 자산 소모율 극소화 모드 전환] - 변경 후 소모 예측도: 구당 0.01% 차감 (기존 대비 10분의 1 수준 감소)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팽팽한 긴장감이 한순간에 느슨해졌다. 대신 손끝의 감각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예리하게 살아났다. 실밥 하나하나의 마찰이 손가락 지문에 고스란히 각인되는 느낌이었다. 160km의 마구는 지금 필요 없다. 어깨를 완벽하게 보존하면서도 타자를 요리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경제적 피칭'. 그것이 회귀한 강태오가 선택한 방식이었다.
"미친 새끼가 미쳤나 보구나. 감히 감독 손을 쳐내?"
천민국이 눈을 부릅뜨며 다시 다가왔다.
태오는 한 걸음 물러서며 차가운 어조로 받아쳤다.
"내일 던질 겁니다. 대신 제 방식대로 던집니다. 완투를 원하신다면, 제가 어깨를 아끼면서도 이길 수 있다는 걸 마운드에서 보여드리죠. 다만."
태오의 눈빛이 천민국의 심장을 꿰뚫을 듯 가라앉았다.
"감독님도 감독님의 약속을 지키셔야 할 겁니다."
"약속? 무슨 약속?"
"내일 경기가 끝나면 알게 되실 겁니다."
태오는 더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우진아, 가자."
"어? 어, 태오야!"
우진이 서둘러 장비를 챙겨 태오의 뒤를 따랐다.
뒤에서 천민국의 거친 욕설과 고함이 불펜 벽을 때렸다. "저 빌어먹을 새끼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진짜!" 분노가 가득 찬 쇳소리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불펜을 빠져나와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밤바람이 이마의 땀을 식혀주었다.
우진이 눈치를 보며 태오의 어깨를 툭 쳤다. 그의 넓적한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야, 태오야. 너 진짜 괜찮겠냐? 천 감독 저 양반, 성깔 보통 아닌 거 알잖아. 내일 진짜 선발 안 올릴지도 몰라. 승태로 밀어붙일 수도 있다고."
"안 올려?"
태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 양반 우승에 미친 인간이야. 승태 어깨는 이미 지난 준결승에서 120구 던지면서 맛이 갔어. 쓸 수 있는 카드는 나밖에 없어. 지가 아쉬워서라도 나를 올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아까 던진 공은 진짜 미친 수준이었어. 나 아직도 손바닥이 얼얼하다니까? 근데 내일은 140km대로 던지겠다고? 제구로만 잡겠다는 거야?"
"내 어깨는 메이저리그용이야. 여기서 낭비할 수 없어."
태오는 우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진아. 넌 내 공만 받아. 미트 움직이지 말고, 내가 던지는 곳에 가만히 대고만 있어. 그럼 알아서 빨려 들어갈 테니까."
우진은 침을 삼켰다. 태오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확신이 있었다.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다. 아까 불펜에서 받았던 그 묵직한 회전력과 가죽 타는 냄새가 여전히 우진의 감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알았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가자, 락커룸 정리해야지."
태오는 우진의 뒤를 따르며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은 이미 다음 단계의 계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민국의 검은 거래. 승부조작과 입시 청탁. 이것을 방치했다간 내일 마운드 위에서 내구 자산 30%가 강제로 날아간다. 시스템의 경고는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천민국의 목줄을 완전히 쥘 수 있는 실증적인 무기를 확보하는 것.
회귀 전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캔 되었다. 2014년 8월 말. 천민국 감독이 청룡고를 우승시킨 직후, 대학 입시 비리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천민국은 꼬리 자르기로 빠져나갔지만, 그에게 뇌물을 바쳤던 학부모들과 대학 관계자들의 명단이 적힌 수첩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야구계에 파다했다.
'분홍색 비밀 수첩.'
천민국은 지독할 정도로 아날로그적인 인간이었다. 중요한 장부나 은밀한 기록은 스마트폰 대신 항상 손때 묻은 작은 수첩에 직접 적어 보관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수첩의 보관 장소는 늘 같았다.
아무도 없는 야간의 청룡고 락커룸. 감독실 캐비닛 가장 안쪽.
태오의 발걸음이 미세하게 빨라졌다.
"우진아, 너 먼저 샤워실 가 있어라. 나 불펜에 두고 온 장비가 있는 것 같아서 락커룸 들렀다 갈게."
"어? 내가 같이 가줄까?"
"됐어. 금방 가."
태오는 우진을 샤워실로 보내고, 어두컴컴한 행정동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에는 가로등 불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아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낡은 고등학교 건물 특유의 왁스 냄새와 먼지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태오는 소리 없이 걸었다. 스파이크 징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발뒤꿈치를 들고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
감독실 문 앞에 도착했다.
문틈으로 불빛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천민국은 아직 불펜에서 분을 삭이고 있거나, 상대 팀 감독과 은밀한 통화를 하느라 자리를 비웠을 터였다.
끼이익-.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렸다.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려는 것을 손아귀 힘으로 억누르며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태오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 밝기를 최저로 낮추고, 플래시 대신 액정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방 안을 탐색했다.
천민국의 책상 위에는 재떨이와 어지럽게 널린 서류들뿐이었다. 목표는 책상이 아니다. 구석에 있는 낡은 철제 캐비닛. green 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그 흉물스러운 캐비닛 앞으로 다가갔다.
달칵.
다행히 잠겨 있지 않았다. 천민국은 학교 안에서 자신의 물건을 뒤질 대담한 녀석이 존재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교 야구단에서 감독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이었으니까.
캐비닛 문을 열자 땀에 찌든 야구 유니폼과 악취 나는 구두들이 들어차 있었다. 태오는 인상을 찌푸리며 유니폼 안쪽을 뒤졌다. 깊숙한 안 주머니, 그리고 예비용 가방 내부까지 손을 뻗었다.
서걱.
가방 가장 아래쪽, 낡은 전술 노트 사이에 끼어 있는 얇은 물체가 손끝에 걸렸다. 꺼내어 액정 불빛을 비추었다.
촌스러운 분홍색 가죽 커버. 겉면에는 아무런 글씨도 적혀 있지 않았다.
태오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귓가에 피가 도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조심스럽게 첫 페이지를 넘겼다.
[2014년 체육특기자 수시 전형 정리] - 연세대: OOO (3,000) - 전달 완료 - 고려대: XXX (5,000) - 2차 대기 - 한양대: LYY (2,500) - 확인 요망
그 뒤로 이어지는 장장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이름들과 금액들. 학부모들의 서명과 날짜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 날짜인 어제 자 기록에는 붉은색 볼펜으로 굵은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결승전 대비 거래] - 덕수고 감독 협의 완료. 5회 이전 태오 등판 지연 및 승태 조기 강판 조건. - 대가: 대학 쿼터 2석 확보 및 발전기금 명목 8,000만 원 계좌 이체.
"미친 새끼."
태오의 입에서 차가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승부조작이었다. 자신을 선발로 올리지 않거나, 혹은 이미 어깨가 망가진 백승태를 무리하게 선발로 올려 점수를 내준 뒤에야 자신을 올리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대학 입시 쿼터와 거액의 뒷돈을 챙기려는 속셈.
이러니 내일 경기에서 퀘스트 패널티가 터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천민국의 각본대로 움직였다면, 태오는 엉망진창이 된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 어깨를 갈아 넣으며 억지로 경기를 뒤집어야 했을 테니까.
"네 출세 가도에 내 어깨를 제물로 바치겠다?"
태오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스마트폰 카메라 앱을 켰다. 무음 카메라 설정을 확인한 뒤, 수첩의 첫 페이지부터 빠르게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찰칵.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액정의 푸른 불빛이 태오의 무표정한 얼굴을 간헐적으로 비추었다. 한 장도 빼놓지 않았다. 이름, 금액, 날짜, 그리고 덕수고 감독과의 구체적인 거래 조건이 적힌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벽하게 프레임 안에 담았다.
[데이터 전송 완료: 클라우드 서버 실시간 백업 성공]
마지막 페이지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망막 위에 녹색의 알림창이 새롭게 떠올랐다.
[★ 긴급 돌발 퀘스트 진행 상황 업데이트 ★] - 단서 확보: 천민국의 검은 거래 증거 (분홍색 수첩) 획득 완료 (진행률 80%) - 활성화 조건: 내일 결승전 중 천민국의 승부조작 시도를 실시간으로 무력화할 것.
태오는 수첩을 원래 있던 자리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되돌려 놓았다. 먼지 하나, 가방의 각도 하나까지 처음 그대로 맞추었다. 극단적인 강박증이 이럴 때는 꽤 유용하게 작용했다.
캐비닛 문을 소리 없이 닫고 감독실을 나섰다. 복도의 어둠이 태오의 신형을 집어삼켰다.
이제 무기는 쥐어졌다. 천민국이 내일 어떤 음모를 꾸미든, 마운드 위에서 그것을 완전히 박살 내버리면 그만이었다. 제구를 극대화한 '내구도 소모 0.01%'의 피칭으로 경기판을 지배하는 동시에, 이 더러운 카르텔의 우두머리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 주마.
태오는 락커룸 구석의 어둠을 걷어내며 마운드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 한국 고교 야구의 추악한 '투혼' 카르텔이 어떤 식으로 무너지는지 똑똑히 보여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