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심판의 장소인 고척 스카이돔 쇼케이스 마운드의 흰색 플레이트를 단단한 가죽 슈즈로 질끈 밟는 순간, 관람석의 수백만 달러를 쥔 큰손들의 열광 어린 눈들이 태오의 투구 끝에 집중된다.
돔구장의 천장을 메운 수백 개의 백색 서치라이트가 태오의 어깨 위로 차갑고도 강렬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인조잔디의 퀴퀴한 고무 냄새와 에어컨이 뿜어내는 서늘한 바람이 마운드 주변의 공기를 차갑게 얼려버렸다.
태오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폐허 같았던 회귀 전의 기억이, 관절와순이 찢겨 실처럼 너덜너덜해진 채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던 그 비참한 은퇴의 순간이 이 백색 광원 아래에서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발아래에 놓인 것은 단단한 플레이트였고, 그의 어깨는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상태로 박동하고 있었다.
"태오야! 눈치 볼 것 없다! 네가 가진 걸 다 보여줘!"
홈플레이트 뒤편에서 송우진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우진의 두 눈은 확신과 신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태오의 고독과 광기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유일한 동반자였다. 우진이 미트를 가볍게 두드리자, 퍽, 퍽 하는 무거운 파열음이 돔구장의 돔형 천장을 치고 되돌아왔다.
관중석에 앉아 있는 메이저리그 15개 구단의 단장들과 스카우터들은 이미 숨소리마저 죽인 상태였다. 그들의 손에는 속도 측정기와 노트북, 그리고 수천만 달러의 계약금이 걸린 장부들이 들려 있었다.
타석에 들어선 사내는 메이저리그 급 트리플A 초청 용병 타자, 헥터 알바레스였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에 통나무처럼 굵은 팔뚝을 지닌 그는 아시아의 고교 투수 따위는 우습다는 듯, 거만하게 배트를 붕붕 휘둘렀다. 그의 스윙이 만들어내는 바람 소리가 마운드까지 생생하게 전해졌다.
태오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트리플A 최정상급 타자라.'
메이저리그의 검증망은 집요하고 잔인했다. 그들은 고교 야구의 성적 따위는 믿지 않았다. 진짜 메이저리그 수준의 타자를 상대로 어떤 구위를 보여줄 수 있는가, 오직 그것만이 그들이 지갑을 여는 유일한 기준이었다.
태오의 손가락이 야구공의 붉은 실밥을 감싸 쥐었다. 손끝에 닿는 실밥의 감촉이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하게 뇌리로 전달되었다. 제구력 99/100의 경지.
첫 구는 몸풀기용 체인지업이었다.
태오가 상체를 가볍게 숙였다가, 이내 채찍처럼 부드럽고도 역동적인 투구 동작으로 팔을 뻗었다. 중심 이동은 물 흐르듯 매끄러웠고, 디딤발인 왼발은 마운드의 흙을 깊게 파고들며 완벽한 축을 형성했다.
스르륵.
태오의 손끝을 떠난 공이 공기를 가르며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타자의 턱밑을 향해 날아가던 포심의 궤적. 알바레스의 어깨가 찰나의 순간 움츠러들었다. 직구라고 판단한 그의 배트가 나오려는 순간, 공은 홈플레이트 바로 앞에서 마법처럼 속도를 줄이며 바깥쪽 가장자리로 뚝 떨어졌다.
팍-!
우진의 미트가 바깥쪽 보더라인의 미세한 코너에 정확히 걸친 공을 사정없이 꽂아 넣었다. 미트 안에서 공이 요동치는 소리가 고척돔 전체에 메아리쳤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알바레스는 배트를 멈춘 채 멍한 표정으로 우진의 미트를 내려다보았다. 방금의 공은 단순한 체인지업이 아니었다. 직구와 완벽하게 동일한 폼에서 터져 나온, 타자의 시각적 터널링을 완벽히 교란한 극상의 변구였다.
"이게... 몸풀기라고?"
관람석의 스카우터 중 한 명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들의 노트북 화면 위로 방금 투구의 궤적 분석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입력되고 있었다. 보더라인의 맨 끝 모서리를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통과한 궤적이었다.
하지만 태오의 망막 위에는 다른 화면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위험: 종속(Late Life) 및 수평 무브먼트 비대칭 조절 감지!]
이이이이잉-
귓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고주파 소음이 태오의 고막을 때렸다. 피칭 장부 시스템 내 구종별 수치에서 '종속'과 '수평/수직 무브먼트'를 강제로 비대칭 조절할 때 발생하는 청각적 노이즈이자 과열 위험 경고였다. 회귀 전, 어깨를 갈아 넣으며 던졌던 무리한 투구의 트라우마가 이 소음과 함께 육체적 기억으로 되살아나려 했다.
구종의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장부의 슬라이더를 한계치 너머로 끌어올릴 때마다, 어깨 관절에는 엄청난 비틀림 부하가 걸린다. 보통의 투수라면 이 단계에서 어깨 인대가 과열되어 찢어지거나 영구적인 내구 자산 손실을 입었을 터였다.
그러나 태오는 이미 이 위험 요소를 간파하고 있었다.
'천민국이나 한국 야구계가 원했던 건 이 통증을 무시하고 던지는 미련한 투혼이었겠지.'
태오는 냉혹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그런 구시대의 노예가 아니었다.
태오는 한재이와 함께 설계했던 세이버메트릭스 역학 데이터와 장부의 시스템을 융합한 '안전 우회 알고리즘'을 머릿속으로 가동했다.
[우회 제어 시스템 작동.] [비대칭 회전 부하를 흉추 회전각 및 하체 힙 드라이브로 강제 분산.] [어깨 관절 내구 자산 소모율: 0.00%로 동결.]
머릿속을 지배하던 고주파 이명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관절을 짓누르던 묵직한 마찰열과 둔탁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어깨는 차갑고 맑은 물속에 잠겨 있는 듯한 극상의 쾌적함을 유지했다. 관절의 무부상 통증 0의 감각. 오직 완벽하게 통제된 힘만이 태오의 전신을 관통하고 있었다.
태오는 마운드 위에서 가볍게 어깨를 돌렸다. 아무런 저항도, 아무런 걸림돌도 없었다. 장부의 신비적 거래량과 철저한 데이터 피드백이 결합하여, 회귀 전 자신을 망쳐놓았던 부상의 공포를 완벽히 극복해 낸 순간이었다.
"우진아. 낮게 간다."
태오의 짧은 혼잣말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2구째. 태오는 시속 145km/h의 속도로 무려 40cm 이상 횡으로 휘어지는 규격 외의 강력한 슬라이더를 선택했다.
태오의 손끝이 허공을 채찍질했다. 공은 타자의 몸쪽을 향해 날아가다가, 홈플레이트 직전에서 기형적인 궤적을 그리며 바깥쪽으로 급격히 꺾였다. 타자의 시야에서 공이 통째로 증발하는 듯한 무중력의 궤적이었다.
휘익!
알바레스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너무 빠른 대처를 하려다 상체가 완전히 무너진 엉성한 스윙이었다.
팍!
"스트라이크 투!"
관중석에서 탄성이 아니라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스카우터들의 눈은 이미 충격으로 뒤덮여 있었다.
"저 슬라이더의 횡무브먼트 수치 봤어? 145킬로미터인데 40센티미터가 넘게 휘었어!"
"이건 메이저리그에서도 상위 1% 급 무브먼트다. 그것도 완벽한 제구력을 동반한 채로!"
관람석 중간에 자리 잡은 에이전트 윌리엄 해리슨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태오의 투구 메커니즘을 분석해 결점을 찾아내려 소형 캠코더를 들고 촬영 중이었다. 하지만 뷰파인더 너머로 보이는 태오의 투구 폼은 결점은커녕,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완벽한 기계의 움직임 같았다.
태오의 투구가 이어질 때마다 해리슨의 심장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자신이 헐값에 강태오를 쭘쳐먹으려 했던 대리인 계약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이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지금 어떤 괴물의 역린을 건드렸는지 온몸의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저런 궤적을 던지면서 어떻게 어깨에 아무런 무리가 안 갈 수가 있지? 저 투구 폼은 역학적으로 불가능해...!"
해리슨의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손끝의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힘이 풀렸다.
툭, 쨍그랑!
그가 들고 있던 고가의 소형 캠코더가 콘크리트 바닥으로 사정없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렌즈가 깨지고 부품이 튀어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해리슨은 그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이건 사기야! 저 녀석의 몸은 철로 만들어진 거냐?!"
그의 떨리는 목소리는 절망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이미 협상의 주도권은커녕, 태오의 눈빛 한 번에 압도당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처지였다.
태오는 해리슨의 소란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우진의 미트, 그리고 타석의 알바레스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볼카운트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알바레스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려 흙바닥을 적셨다. 그는 메이저리그의 쓴맛을 본 베테랑 타자였지만, 지금 마운드 위에 서 있는 18세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중압감은 메이저리그 최고의 에이스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언제 부러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살기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우진이 미트를 정중앙에서 약간 안쪽 높은 코스로 치켜들었다.
'태오야, 네 최고의 무기를 보여줘라. 저 거만한 미국 놈들의 콧대를 완전히 꺾어버리자고.'
우진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칭 장부의 포심 패스트볼 구위 슬라이더를 한계치 너머로 조절했다.
[경고: 일시적 과부하 발생!] [안전 우회 장치 최대 출력 가동. 하체 및 코어 근육의 회전력을 120% 활용.]
태오의 전신 근육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갔다. 왼발이 마운드를 딛는 순간, 고척돔의 마운드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의 오른팔이 허공을 가르는 궤적은 너무 빨라 잔상조차 남지 않았다.
쿠우우웅-!
공기가 찢어지는 굉음이 고척돔 내부를 가득 메웠다.
태오의 손끝을 떠난 야구공은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기세로 타자의 바깥쪽 높은 코스로 빨려 들어갔다. 그냥 직구가 아니었다. 궤적의 끝에서 타자의 바깥쪽으로 날카롭게 휘어 올라가는, 극상의 역회전 무브먼트가 실린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알바레스는 공이 손에서 떠나는 순간부터 궤적을 쫓았지만, 그의 뇌는 그 무지막지한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배트를 내밀어야 한다는 명령이 그의 근육에 도달하기도 전에, 공은 이미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콰아아아앙-!
우진의 가죽 미트가 찢어질 듯한 비명성을 지르며 공을 움켜쥐었다. 고척돔의 전광판에 선명한 숫자가 떠올랐다.
[101 mph]
시속 162.5킬로미터.
타석의 강타자가 태오의 연속 8구째 101마일(162.5km) 역회전 포심에 배트를 돌리지도 못한 채 멍하니 루킹 삼진을 당하자 단상 위 전원이 자리를 이탈해 기립했다.
고척돔의 전광판에 박힌 숫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101마일. 시속 162.5킬로미터.
정적은 찰나였다. 비현실적인 광경을 목도한 관중석에서 먼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메이저리그의 베테랑 스카우터들이 들고 있던 스피드건을 떨어뜨렸다. 뉴욕 양키스의 단장은 입에 물고 있던 만년필을 뱉어내듯 떨어뜨렸고, 보스턴의 보좌역은 머리를 감싸 쥔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타석의 헥터 알바레스는 방망이를 쥔 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공이 포수 미트에 박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뒤늦게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생경한 공포가 서렸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평균 구속 100마일을 던지는 투수는 손에 꼽혔다. 하물며 끝이 날카롭게 꺾여 올라가는 101마일의 역회전 포심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궤적이었다.
"태오야! 봤냐! 101마일이다! 101마일!"
송우진이 포수 마스크를 벗어 던지며 마운드로 거칠게 뛰어왔다.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이 극도의 흥분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우진은 태오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툭 치며 호쾌하게 포효했다. 단 한 명의 타자도, 그 어떤 거대 자본의 검증망도 태오의 팔끝에서 뿜어져 나온 괴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태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깨뼈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팽팽한 열기가 느껴졌다.
스르륵.
망막 위에 푸른빛을 띠는 재무제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피칭 장부 (Pitching Ledger) — 실시간 자산 결산] - 기초 내구 자산: 83.62% - 당기 투구 소모 (101마일 극한 포심): -0.40% (우회 알고리즘 적용 완료) - 현재 기말 잔고: 83.22% (안정 상태) - 특이사항: 관절 내 염증 반응 0.00%. 한계 돌파에 따른 영구 마모 차단 성공.
태오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회귀 전, 어깨가 조각나며 마운드를 내려왔던 그 지옥 같은 통증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철저한 데이터 계산과 장부의 거래 조건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몸을 갉아먹는 고질적인 부상의 사슬을 완벽하게 끊어냈다.
그때, 3루 측 덕아웃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구두 굽이 인조잔디를 짓밟는 불쾌한 소리가 고척돔의 소란을 뚫고 다가왔다. 서울 타이탄즈의 송 단장이었다. 그의 뒤로 KBO 마크가 선명한 단복을 입은 협회 직원들과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떼를 지어 몰려나왔다.
"투구 중단해! 더 이상의 투구는 인정하지 않는다!"
송 단장의 손에 들린 공문서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은 질투와 탐욕, 그리고 통제권을 잃은 권력자의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강태오는 KBO 드래프트 대상자다! 협회의 공식 승인 없이 치러지는 이 쇼케이스는 명백한 불법 규정 위반이다! 미국 야구협회(MLB)에도 이미 공식 항의 서한을 발송했다. 이 상태로 계약을 강행한다면, 강태오 너는 평생 한국 땅에서 야구를 하지 못할 줄 알아라!"
그의 목소리가 에코를 타고 돔구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단상 위의 메이저리그 단장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괴물 같은 유망주라 해도 법적 분쟁에 휘말린 선수를 거액에 영입하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컸다. 계약 자체가 무효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그들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혼란을 틈타 윌리엄 해리슨이 징검다리를 건너듯 마운드 근처로 다가왔다. 깨진 캠코더를 바닥에 버려둔 그의 얼굴에는 비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태오 강. 내가 경고했지? 한국 야구계의 카르텔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집요해. 하지만 내 에이전시와 손을 잡는다면, 이 모든 도덕적, 법적 문제를 단숨에 세탁해 줄 수 있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내 계약서에 서명해라."
해리슨이 품 안에서 붉은 인장이 찍힌 서류를 꺼내 들었다. 족쇄나 다름없는 노예 계약서였다. 송 단장의 억압과 해리슨의 기회주의적 덫이 태오의 목을 양방향에서 조여오는 형국이었다.
우진이 미트를 움켜쥐며 송 단장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이 비겁한 놈들이 어디서 숟가락을 얹으려고—!"
"우진아, 가만히 있어라."
태오가 우진의 어깨를 짚어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의 눈빛은 고요하다 못해 깊은 심해처럼 차가웠다. 비즈니스의 판을 설계한 포식자에게, 사냥감들의 발악은 지극히 가소로운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태오가 관중석 한편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 신호와 함께, 관중석의 VIP 부스 문이 열리며 한재이가 걸어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세련된 디자인의 태블릿 PC와 공증 직인이 찍힌 영문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송 단장님. 그리고 해리슨 씨. 헛수고하셨습니다."
재이의 맑고 냉정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돔구장 전체에 내리꽂혔다.
"강태오 선수는 KBO의 관할권 밖에 있습니다. 어제 자로 도미니카 공화국 체육부의 특별 영주권 취득 절차가 완료되었습니다. 아울러 계약금과 연봉은 메이저리그의 사치세 및 국제 계약금 상한선 페널티를 우회하기 위해, 제3국 에스크로 펀드(Escrow Fund)를 통해 전액 자산 신탁 관리될 예정입니다."
순간, 해리슨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도, 도미니카 영주권...? 에스크로 신탁이라고?!"
"그렇습니다. 강태오 선수는 법적으로 한국 아마추어 선수가 아닌, '제3국 소속의 독립적 국제 자유 계약(FA) 상대자'로 분류됩니다. KBO의 드래프트 규정도,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국제 유망주 캡 제한 조항도 적용되지 않는 완벽한 법적 자유 신분이라는 뜻입니다."
재이가 서류를 송 단장의 가슴팍에 툭 던지듯 안겨주었다. 송 단장은 서류에 찍힌 국제 공증 도장을 번갈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자신이 휘두르던 법적 공문서가 단숨에 휴지 조각으로 변해버린 순간이었다.
태오가 해리슨을 내려다보며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말했지. 당신들이 만든 그 하찮은 울타리, 내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다고."
그 선언이 떨어지기 무섭게, 관중석의 침묵이 깨졌다.
"5년 7천만 달러! 즉시 계약금 1,500만 달러 보장!"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단장이 단상 난간을 붙잡고 소리쳤다.
"우리는 8천만 달러에 전담 트레이닝 팀 지원을 약속하겠소! 지금 즉시 사인합시다!"
뉴욕 양키스의 단장이 달러 수치를 적은 메모지를 허공에 흔들었다. 수천만 달러의 자본을 쥔 메이저리그의 포식자들이, 이제는 강태오라는 압도적인 재능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는 하이에나로 돌변해 있었다. 계약 경쟁의 판도가 완전히 강태오의 손아귀 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승리의 확신이 마운드를 지배하려던 그 찰나였다.
이이이이이이이잉-!
귓가를 찢는 듯한 고주파의 청각적 노이즈가 다시금 태오의 고막을 사정없이 찔렀다. 이전의 경고음과는 차원이 다른,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동반되었다.
태오가 비틀거리며 마운드 흙을 짚었다.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심각한 오류: 호환되지 않는 외부 데이터 동기화 시도 감지!] [시스템 강제 해킹 시도 — 발신원: 윌리엄 해리슨의 모바일 단말기.] [내구 자산 동결 알고리즘이 강제로 해제됩니다. 잔여 수명이 급격히 재계산됩니다.]
태오의 고개가 번개라도 맞은 듯 꺾였다.
저 멀리 서 있는 해리슨의 손에 들린 특수 위성 단말기의 화면이 기괴한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해리슨의 입가에 광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태오 강. 내가 순순히 물러날 것 같았나? 네 그 잘난 몸뚱이의 '비밀', 내가 모를 줄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