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오! 잠깐만! 내 얘기를 들어봐! 500만 달러! 아니, 원하는 대로 다 맞춰주겠어! 제발 내 계약서에 서명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마운드 위로 쏟아졌다.
윌리엄 해리슨의 얼굴은 이미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잘 정돈되어 있던 금발은 이마에 지저분하게 달라붙었고, 수천 달러짜리 맞춤 정장 바지 무릎에는 붉은 흙먼지가 벌겋게 묻어 있었다. 그가 허겁지겁 들이민 서류 봉투 모서리가 태오의 유니폼 가슴팍 직전에서 사정없이 흔들렸다. 붉은색 직인이 찍힌 추가 보너스 합의서. 메이저리그 거대 에이전시의 수장이 고작 열여덟 살짜리 동양인 고등학생 앞에서 무릎을 꿇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태오는 눈동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귓가를 지배한 것은 해리슨의 비명이 아니었다.
두우우웅-.
머릿속을 잔인하게 긁어내리는 고주파 이명. 망막 위에 붉은색 경고등이 미친 듯이 점멸하고 있었다.
[경고: 종속 수치 95와 수직 무브먼트 98의 강제 비대칭 조절로 인해 좌측 전정기관 및 어깨 관절 부근의 신경 과열 발생.] [경고: 인과율 거래 오차 범위 초과 체증 발생. 한시적 이명 및 두통 유발.] [어깨 내구 자산 잔고: 83.12%]
무중력 낙하구.
타자의 시야에서 공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규격 외의 마구를 던지기 위해 피칭 장부의 슬라이더를 한계치 너머로 비틀어 버린 대가였다.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왼쪽 어깨 깊숙한 곳에서부터 욱신거리는 열감이 뜨겁게 타올랐다. 가쁜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태오는 턱관절을 악물며 표정을 굳혔다.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할 수 없었다. 적들 앞에서 약점을 보이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니까.
뚝. 툭.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굵은 땀방울이 마운드의 거친 흙바닥 위로 떨어져 검게 번졌다.
그때, 묵직하고 단단한 손아귀가 태오의 오른쪽 어깨를 턱 하니 짚었다. 송우진이었다. 우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트를 옆구리에 낀 채, 넓은 등판으로 해리슨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태오의 곁을 지켰다.
"태오야, 가자. 파리새끼들이 꼬여서 공기가 텁텁하다."
우진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이명을 뚫고 들어왔다. 그 든든한 온기가 태오의 감각을 현실로 붙잡아두었다. 태오는 짧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어가자."
태오는 해리슨이 내민 서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어깨를 스쳐 지나가는 태오의 눈길은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는 것처럼 차가웠다.
"강! 강태오! 내 말을 들어야 해! 이 계약이 아니면 넌 미국 땅을 밟지도 못해!"
뒤에서 들려오는 해리슨의 악에 받친 절규를 무시한 채, 태오는 뚜벅뚜벅 마운드를 내려갔다.
***
목동 야구장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원정팀 감독실.
시큼한 땀 냄새와 눅눅한 먼지 냄새가 뒤섞인 가쁜 공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낡은 가죽 소파는 군데군데 틔어 있었고, 구석에 놓인 선풍기가 덜덜거리는 소음을 내며 더운바람을 뿜어냈다.
태오는 가죽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마구를 던지느라 극도로 긴장했던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다리가 저릿한 통증을 보내왔지만, 태오는 그저 다리를 길게 뻗으며 무심하게 양손을 깍지 꼈다. 머릿속의 이명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지만, 피칭 장부의 붉은 경고 메시지는 여전히 망막 구석에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쾅!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해리슨이 들이닥쳤다. 그의 뒤로 사색이 된 비서와 차분한 걸음걸이의 한재이가 차례로 들어섰다.
해리슨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테이블 위로 붉은 직인이 선명한 합의서를 쾅 소리가 나도록 내던졌다.
"강, 너 지금 미친 짓을 한 거야! 내 제안을 거절하고 네가 무사할 것 같아? KBO의 타이탄즈 단장이 들고 있던 공문서 봤지? 걔들이 마음만 먹으면 넌 해외 진출 제한 규정에 묶여서 평생 한국 땅에서 썩어야 해!"
해리슨의 넥타이는 이미 삐뚤어져 있었고, 호흡은 가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갑'의 위치에 있다고 믿고 싶어 발버둥 치고 있었다.
태오는 소파에 기대어 앉은 자세 그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갑게 되물었다.
"그래서?"
"뭐, 뭐시라?"
"500만 달러. 참 대단한 금액처럼 말하네."
태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가 뱀처럼 가늘어지며 해리슨의 얼굴을 꿰뚫었다.
"윌리엄. 내가 고교 야구만 하니까 메이저리그 규약(CBA)도 모르는 까막눈으로 보였나?"
태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방 안의 모든 공기를 얼려버릴 만큼 날카로웠다.
"네가 들고 온 그 500만 달러 합의서. 그 밑바닥에 숨겨진 독소 조항들을 내가 읊어줄까?"
해리슨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첫째, 국제 계약금 상한선(International Signing Bonus Pools) 규정을 핑계로 실제 보장액은 150만 달러로 제한하고, 나머지 350만 달러는 달성 불가능한 마이너리그 옵션으로 채워 넣었지.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150일 이상 잔류해야만 발동하는 조건들로 말이야."
태오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톡, 톡,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그 소리가 마치 사형 집행인의 발걸음 소리처럼 해리슨의 심장을 압박했다.
"둘째, 마이너리그 거부권 없음. 구단이 나를 마이너리그에 처박아두고 서비스타임을 늘리려고 꼼수를 부려도, 난 군말 없이 메이저리그 최저 연봉만 받으며 6년을 버텨야 해. 내 어깨가 갈려 나가는 동안 당신은 뒤에서 구단주들과 웃으며 내 가치를 빨아먹겠지."
"그, 그건 일반적인 루키 계약의 관행일 뿐이야! 누구나 다 그렇게 시작해!"
해리슨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그의 눈가를 적셨다.
"관행?"
태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188cm의 압도적인 피지컬이 뿜어내는 위압감이 좁은 감독실을 가득 채웠다. 태오는 해리슨의 코앞까지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남미나 아시아의 가난한 유망주들을 후려칠 때나 쓰는 개수작이고. 난 내 어깨의 수명을 단 1%도 낭비할 생각이 없다. 6년 동안 노예처럼 부려 먹히다가 부상당하면 버려지는 레몬법의 피해자가 될 생각은 더더욱 없고."
태오는 테이블 위의 합의서를 집어 올려, 해리슨의 가슴팍에 툭 던지듯 돌려주었다.
"당신이 제안한 계약은 '어린 유망주 수탈의 시간' 그 자체야. 내 가치를 이따위 쓰레기 종이에 묶어두려 하지 마."
"강태오...! 너, 감히 메이저리그 거대 에이전시를 상대로..."
"오늘부로 윌리엄 해리슨, 당신과의 모든 협상은 전면 종료다."
태오의 냉엄한 선언이 방 안을 울렸다.
"그리고 내일 오전 9시를 기해, 나 강태오는 메이저리그 5개 빅마켓 구단을 대상으로 한 '블라인드 입찰(Blind Bidding)'을 전격 개시한다."
"블... 블라인드 입찰?!"
해리슨의 입이 떡 벌어졌다.
블라인드 입찰은 구단들이 서로의 제시액을 모른 채 오직 선수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맞춰 최고가를 적어내야 하는, 철저히 '초특급 FA'들에게만 허용되는 시장 지배적 방식이었다. 고작 고등학생 투수가 메이저리그 구단들을 상대로 입찰 경쟁을 붙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미쳤군! 미쳤어! 에이전트도 없는 고딩 놈이 무슨 수로 메이저리그 구단들을 움직이겠다는 거야! 네가 입찰을 선언한다고 해서 구단들이 움직일 것 같아?!"
해리슨이 광분하며 소리쳤다.
그때, 뒤에서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한재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태블릿 PC 화면이 푸른빛을 발하며 방 안의 어둠을 밝혔다.
"구단들은 움직입니다, 해리슨 씨."
재이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승리의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태오 선수의 오늘 쇼케이스 데이터는 이미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단장들의 메일함에 실시간으로 전송되었습니다.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 154km/h, 분당 회전수(RPM) 2,600회 돌파. 그리고 방금 던진 '무중력 낙하구'의 수평/수직 무브먼트 데이터는 역사상 그 어떤 투수에게서도 측정된 적 없는 규격 외의 수치입니다."
재이가 화면을 스와이프하자, 복잡한 그래프와 숫자들 위로 굵은 로고 두 개가 떠올랐다.
"그리고 에이전트가 없다는 걱정은 접어두셔도 좋습니다."
재이가 해리슨을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미국 최대 스포츠 에이전시인 CAA와 보라스 코퍼레이션(Boras Corporation)의 아시아 총괄 법률 대리인들이 이미 강태오 선수의 한국 내 공동 법률 대리인으로 매칭 완료되었습니다. 두 에이전시가 공동으로 이번 블라인드 입찰의 에스크로 펀드와 계약서 검토를 대행할 예정입니다."
"보, 보라스...? CAA가 동시에?!"
해리슨의 무릎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 두 에이전시는 메이저리그의 악마라 불리는 거물들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그들이 움직였다는 것은 이미 강태오의 가치가 메이저리그 역사상 전무후무한 '메가톤급 유망주'로 공인받았다는 뜻이었다.
독점 대리인 지위를 이용해 태오를 헐값에 선점하려던 해리슨의 음모는, 태오가 설계한 정밀한 세이버메트릭스 데이터 역정보와 한재이의 완벽한 조력 앞에 완벽하게 찢겨 나갔다.
"설마... 처음부터 나를 이용해 몸값을 올릴 생각이었나?"
해리슨이 핏발 선 눈으로 태오를 노려보며 물었다.
태오는 대답 대신 차가운 냉소를 흘렸다.
침묵.
그 어떤 폭언보다 잔인한 침묵이 해리슨의 가슴을 짓눌렀다. 자신이 메이저리그의 거대 자본을 쥐고 흔드는 포식자인 줄 알았으나, 결국 태오가 짜놓은 거대한 덫에 걸려든 사냥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해리슨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더러운 자본의 힘으로 내 재능을 가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태오가 낮게 읊조렸다.
"이제 판은 내가 흔든다."
그 순간이었다.
잉-. 잉-. 잉-.
정적을 깨고 한재이의 태블릿과 개인 단말기가 동시에 요란한 진동음을 울려댔다. 단발적인 알림이 아니었다. 붉은색 경고등처럼 화면 가득 긴급 이메일과 국제 전화 알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재이가 급히 단말기를 확인했다. 화면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태오 씨..."
재이의 목소리가 흥분과 경악으로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방금... 방금 공항 법률 대리인으로부터 들어온 속보입니다."
방 안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해리슨 역시 넋이 나간 얼굴로 재이를 바라보았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벤 체링턴 단장과 뉴욕 양키스의 브라이언 캐시먼 단장... 그리고 LA 다저스의 사장단 전원이 보낸 전용 제트기 3대가..."
재이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방금 영종도 국제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지금 목동 야구장으로 직행하고 있답니다."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태평양 너머 메이저리그의 심장부가, 강태오라는 단 한 명의 괴물을 차지하기 위해 한국 땅으로 직접 날아온 것이다.
태오는 서서히 입꼬리를 올렸다.
진짜 전쟁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