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태오가 플레이트를 디딘 오른발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사인을 주고받은 태오가 허리를 비틀며 와인드업을 하는 찰나, 백승태가 관람석 뒤쪽에서 한 중견 스카우터에게 거액의 스폰 로비를 하는 혐오스러운 뒤태를 태오가 날카롭게 전면 포착한다.

백승태의 거친 손끝에서 빠져나간 두툼한 가죽 봉투가 LA 엔젤스의 중견 스카우터, 로버트의 양복 안주머니로 매끄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더러운 뒷거래가 완료된 것은 단 1초도 걸리지 않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로버트가 관람석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잠깐! 저 투수의 투구 궤적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공이나 손가락에 부정 이물질을 바른 게 분명해! 즉각적인 글러브 검사를 요청한다!"

목동 야구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스카우터들의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졌다. 부정투구. 야구 선수에게 있어 이보다 더한 불명예는 없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의혹이 제기되는 순간, 선수의 가치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그것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둔 쇼케이스라면 더더욱 치명적이었다.

통로 음영 속에서 백승태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윌리엄 해리슨 역시 안경테를 치켜올리며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서울 타이탄즈 단장 또한 팔짱을 낀 채 흥미진진하다는 듯 마운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로버트와 백승태를 번갈아 응시할 뿐이었다.

귀청이 터질 듯한 이명이 뇌리를 사정없이 긁어댔다.

지이이이잉-!

망막 위로 붉은색 경고등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경고: 인대 열화 현상 감지. 비대칭 구종 제어의 부작용이 누적되고 있습니다. 다음 한계 돌파 투구 시 내구 자산의 영구 손실율이 배가됩니다.]

어깨 뒤쪽에서 불에 달군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작열감이 치밀어 올랐다. 척추를 타고 내려오는 오한에 태오는 어금니를 사정없이 맞물렸다. 입안에서 비릿한 쇠 맛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제구력 수치는 여전히 '99/100'를 단단히 유지하고 있었다. 완벽을 향한 냉혹한 강박증이 육체의 통증 따위는 가볍게 짓눌러 지워버렸다.

"부정투구라니?"

포수 송우진이 마스크를 벗어 던지며 마운드로 척척 걸어왔다. 그의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마운드를 덮었다. 우진의 눈에 서린 분노는 날것 그대로였다.

"어디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우리 태오 공을 제대로 보기는 한 거야?"

"우진아."

태오가 낮게 읊조렸다. 우진이 우뚝 멈춰 서며 태오를 바라보았다. 태오는 아무런 표정 없이 왼손의 글러브를 벗었다. 그리고 주심을 향해 글러브를 툭 던졌다.

"검사해."

태오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해서 오히려 듣는 이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글러브든, 내 손가락끝이든, 유니폼 바지든 마음대로 다 훑어봐. 이물질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야구를 은퇴해 주지. 하지만."

태오가 고개를 돌려 관람석의 로버트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안 나오면, 당신은 뭘 걸래? 메이저리그 스카우터 자격이라도 걸 배짱은 있고 지껄이는 건가?"

"뭐, 뭐라고?!"

로버트의 얼굴이 순간 붉으락푸락하게 달아올랐다.

주심이 엄숙한 표정으로 태오의 글러브를 건네받아 샅샅이 살폈다. 손가락 끝의 감촉을 확인하고, 공인구의 실밥까지 정밀하게 검사했다. 사방을 둘러싸고 지켜보는 수십 명의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눈이 주심의 손끝에 집중되었다.

1분 같은 10초가 흘렀다.

주심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글러브를 태오에게 다시 던져주었다.

"이물질 없음. 완벽히 깨끗합니다. 부정투구 의혹은 기각합니다. 투구 재개하세요."

순간 관람석에서 야유와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백승태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로버트는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슬그머니 앉으려 했다.

하지만 태오는 그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태오가 다시 마운드 플레이트를 밟았다. 그의 눈앞에 피칭 장부의 반투명한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구종 설정: 포심 패스트볼] [수치 조정 적용 중...] - 종속: 95 (극대화) - 수평 무브먼트: 98 (임계치 초과) - 수직 무브먼트: -40 (극단적 하강)

두통이 두개골을 깨뜨릴 듯 밀려왔다. 고막을 찢는 듯한 노이즈가 머릿속에서 폭발했다.

피이이이이익-!

[위험: 종속과 무브먼트의 비대칭 조절로 인해 시스템 과열이 발생했습니다. 인대 내구 자산의 영구적 차감이 시작됩니다.] [현재 내구 자산: 83.62% -> 83.10%]

0.52%의 수명이 단 한 구의 설계를 위해 바스라져 사라졌다. 어깨 인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눈앞이 잠시 아득해졌으나, 태오는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붙잡았다.

'이 한 구로, 저 벌레새끼들을 완전히 밟아버린다.'

타석의 잭슨 밀러가 잔뜩 독이 오른 채 배트를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 미국의 수위 타자 유망주라는 자존심이 방금 전의 헛스윙으로 갈기갈기 찢긴 상태였다. 그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마운드까지 닿을 듯 주위를 압도했다.

송우진이 태오의 눈빛을 읽었다. 태오의 어깨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을, 그의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통해 직감했다. 우진은 껌을 질겅 씹으며 몸쪽 가장 낮은 곳에 미트를 댔다.

'태오야, 네 맘대로 던져라. 지구가 무너져도 내가 다 받아낼 테니까.'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허리를 활처럼 젖혔다. 오른발이 마운드의 흙을 완벽하게 움켜쥐었다. 체중이 뒤쪽에서 앞쪽으로 무시무시한 가속도를 타며 이동했다. 오른팔이 채찍처럼 허공을 갈랐다.

슝-!

손끝을 떠난 공은 평범한 포심 패스트볼의 궤적을 그리는 듯했다. 시속 155킬로미터에 육박하는 강속구. 밀러의 눈이 번쩍였다. 직전의 궤적을 머릿속에 그린 밀러가 가차 없이 배트를 돌렸다.

그 순간, 물리 법칙이 붕괴했다.

타자 앞 5미터 지점까지 일직선으로 뻗어오던 공이, 마치 공기 저항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상실한 것처럼 허공에서 뚝 멈춰 서듯 궤적을 꺾었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었다.

회전축이 비대칭으로 급격히 뒤틀리며, 수평으로 무려 40센티미터 이상 휘어지는 동시에 아래로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중력을 이탈해 제멋대로 기동하는 듯한 기괴한 움직임.

"?! No...!"

밀러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미 체중을 싣고 돌아가기 시작한 배트는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공은 밀러의 허리춤을 지나가야 했을 타이밍에, 이미 그의 무릎 아래에서 한참을 벗어나 우진의 미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콰아아앙-!

포수 미트가 찢어질 듯한 파열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스트라이크 아웃!"

주심의 우렁찬 콜이 목동 야구장에 메아리쳤다.

밀러는 배트를 쥔 채 그대로 타석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의 동공은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뇌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관람석의 스카우터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손에 들린 스피드건과 태블릿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방금 그 무브먼트는 뭐지? 슬라이더가 아니야. 싱커도 저 속도에서 저런 궤적을 그릴 순 없어!" "종속이 줄어들지 않았어! 공이 타자 앞에서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무중력구(Gravity Ball)... 이건 신의 영역이다!"

그 경악과 혼란이 극에 달한 순간, 관람석 뒤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정투구라고 하셨나요, 로버트 씨?"

한재이였다. 그녀가 자신의 태블릿을 높이 치켜들며 스카우터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태블릿 화면에는 고화질로 촬영된 영상이 선명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방금 전, 백승태 선수가 로버트 스카우터에게 거액의 자금이 담긴 가죽 봉투를 전달하는 장면입니다. 부정투구 의혹을 제기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말이죠."

"뭐, 뭐라고?!"

주변의 스카우터들이 일제히 로버트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화면 속에는 백승태의 얼굴과 로버트의 얼굴, 그리고 돈 봉투의 실물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찍혀 있었다. 한재이의 분석 알고리즘과 카메라 렌즈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더러운 현장을 박제해 두었던 것이다.

"이, 이건 음해다! 그냥 개인적인 거래였을 뿐..."

로버트가 사색이 되어 변명하려 했지만, 이미 주위의 눈빛은 그를 범죄자 취급하고 있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터 연합에서 부정 청탁과 뇌물 수수는 즉각적인 퇴출이자 영구 제명 사유였다.

백승태는 다리가 풀린 듯 관람석 계단에 주저앉았다. 그의 야구 인생이, 그리고 그가 쌓아 올렸다고 믿었던 모든 명예가 한순간에 시궁창으로 처박히는 순간이었다. 태오를 무너뜨리기 위해 던진 최후의 승부수가 역으로 자신의 목을 옭아맨 올가미가 되었다.

"더러운 자본으로 재능을 가릴 수 있다고 믿었나?"

태오가 마운드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비웃었다.

그 난장판 속에서, 송우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껌을 쩝쩝 씹으며 태오에게 공을 던져주었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태오야, 공 더럽게 좋네. 다음엔 더 가라앉혀 봐. 내가 다 잡아줄 테니까."

우진의 담담한 목소리가 마운드에 울렸다. 비현실적인 무중력구를 아무런 충격도 없다는 듯, 마치 동네 야구의 캐치볼을 하듯 가볍게 받아낸 우진의 포구 기술과 대담함은 주위 스카우터들을 또 한 번 경악하게 만들었다.

저 괴물 같은 마구를 완벽하게 제어하고 받아내는 배터리가 한국의 고등학교 마운드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포수 녀석도 물건이군..." "괴물이 괴물을 키워냈어."

스카우터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윌리엄 해리슨의 얼굴은 완전히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가 준비했던 150만 달러짜리 사전 가계약서는 이제 쓰레기통에 들어갈 종이조각에 불과했다. 이 쇼케이스가 끝나는 순간, 메이저리그의 모든 빅마켓 구단들이 강태오를 잡기 위해 백지수표를 들고 달려들 것이 자명했다.

자신의 독점 대리인 지위가, 수천만 달러의 수수료가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안 돼... 이렇게 끝낼 순 없어."

해리슨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는 자신의 고급 가죽 가방을 허겁지겁 뒤집어엎었다. 서류 뭉치들이 바닥에 흩어지는 와중에, 그는 붉은색 직인이 찍힌 초고액 추가 보너스 계약서를 손에 쥐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신사적인 척하던 가면은 이미 찢어진 지 오래였다. 해리슨은 사색이 된 얼굴로 마운드를 향해 발광하듯 소리치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강태오! 잠깐만! 내 얘기를 들어봐! 500만 달러! 아니, 원하는 대로 다 맞춰주겠어! 제발 내 계약서에 서명해!"

그 처절하고도 추악한 몸부림을 보며, 태오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마운드의 지배자가 판을 완전히 흔들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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