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아아앙!
공기를 찢는 파열음이 목동 야구장 전체를 거칠게 뒤흔들었다.
잭슨 밀러가 타석 근처에서 가볍게 몸을 풀며 시뻘건 침을 뱉었다. 그의 터질 듯한 팔뚝 근육이 꿈틀거릴 때마다 단풍나무 배트가 위협적인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마운드 위까지 고스란히 흘러넘쳤다.
동양의 고교생 투수 따위는 단 한 스윙으로 담장 밖으로 날려버리겠다는 오만한 살기. 밀러의 눈빛은 굶주린 야수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태오는 마운드 흙을 가볍게 밟으며 그 기세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어깨 깊은 곳에서 욱신거리는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직전 투구에서 슬라이더의 무브먼트를 강제로 비틀어 올린 대가였다. 귓가에는 삐- 하는 가느다란 이명이 이따금씩 고막을 찔렀다.
하지만 태오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단 0.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강박증이 그의 뇌리를 지배했다.
‘트리플A 홈런왕.’
밀러의 프로필이 태오의 머릿속 계산기 위에서 빠르게 튀어 올랐다. 몸쪽 패스트볼에 강하고, 바깥쪽으로 흘러 나가는 종무브먼트 구종에 약점을 보인다. 그러나 메이저리그급 배트 스피드를 지닌 타자다. 어설픈 슬라이더나 150킬로미터 초반대의 밋밋한 직구는 먹잇감이 될 뿐이다.
체면치레 수준의 피칭으로는 저 괴물의 배트를 헛돌릴 수 없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눈을 완전히 멀게 만들고, 윌리엄 해리슨의 얄팍한 콧대를 완전히 꺾어놓기 위해서는 상식을 초월하는 무기가 필요했다.
스윽.
태오가 눈을 감았다가 뜨자, 그의 망막 위로 푸르스름한 반투명 스크린이 펼쳐졌다.
[피칭 장부 (Pitching Ledger)] - 보유 내구 자산: 84.12% - 제구력: 99/100 (완전무결) - 구종별 스펙 제어 패널 활성화 중.
태오는 슬라이더 바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횡무브먼트의 강화가 아니다. 이번에는 종속(Terminal Velocity)과 수직 무브먼트의 수치를 비대칭적으로 조절하는 특수 영역을 건드렸다. 이름하여 ‘종속 가치 파킹 영역’.
이 영역은 회귀 전 태오가 어깨를 완전히 잃기 직전까지 가보지 못했던 미지의 심연이었다.
손끝으로 가상의 파킹 영역을 해제하자, 망막 전체가 붉은빛으로 점멸하며 차가운 시스템 경고음이 고막을 때렸다.
[위험: 종속 및 수직 무브먼트의 비대칭 강제 조절을 시도합니다.] [경고: 해당 조율은 투구 인대에 극심한 과부하를 초래합니다. 승인 시, 일일 수명 영구 자산에서 0.5%가 한시적으로 즉각 차감됩니다. 영구 은퇴 위험도가 상승합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0.5%.
숫자가 주는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한 번 깎인 수명 자산은 쉽게 복구되지 않는다. 어깨의 수명을 깎아 먹는 행위는 회귀 전의 비극적인 혹사를 스스로 재현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태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냉혹한 비즈니스맨의 눈빛이 그의 눈동자에서 번뜩였다.
‘0.5%의 수명을 지불하고,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입찰 경쟁액을 최소 500만 달러 이상 폭등시킬 수 있다면.’
이것은 손해가 아니다. 가장 확실하고 남는 장사다. 리스크를 짊어지지 않는 투자자는 시장에서 도태될 뿐이다. 자신의 몸값을 스스로 가공해 역으로 구단들을 입찰 입구로 몰아넣기 위한 완벽한 미끼가 될 터였다.
태오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승인 버튼을 내리눌렀다.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수명 영구 자산 0.5% 차감. 현재 잔고: 83.62%] [신규 변형 궤적 활성화: '무중력 낙하구(Anti-Gravity Drop)']
즛, 즈즈즉.
머릿속에서 전선이 타들어 가는 듯한 날카로운 청각적 노이즈가 울려 퍼졌다. 어깨 관절 부근이 화끈거리며 열기를 뿜어냈다. 뼈와 인대가 삐걱거리며 새로운 투구 메커니즘을 강제로 받아들이는 고통이 수반되었다. 태오는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를 삼켰다. 흐르는 땀방울이 턱끝을 타고 뚝뚝 떨어져 마운드의 흙을 적셨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마구를 온전히 받아낼 파트너의 존재였다.
태오가 홈플레이트 뒤편에 앉아 있는 송우진을 바라보았다.
우진은 태오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태오가 또다시 자신의 몸을 깎아 먹는 괴물 같은 공을 던지려 한다는 것을, 오랜 시간 배터리를 맞춰온 본능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우진의 미트가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태오야. 또 무리하는 거냐.’
그의 눈빛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우진은 언제나 태오의 어깨를 걱정했다. 하지만 동시에, 태오가 마운드 위에서 보여주는 그 압도적인 완벽함에 가장 깊이 매료된 존재이기도 했다.
태오는 우진을 향해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가로저었다. 그리고 포심 패스트볼 그립에서 검지와 중기를 미세하게 벌려 실밥의 변칙적인 지점을 짚는 그립을 보여주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미세한 움직임 속에서, 우진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 그립은…….’
처음 보는 변칙 그립이었다. 실밥을 비스듬히 움켜쥔 태오의 손가락 끝에 엄청난 악력이 집중되고 있었다.
우진은 즉각 깨달았다. 방금 전의 슬라이더보다 훨씬 더 기괴하고 빠른 종변화구가 올 것이다. 포구 메커니즘을 완전히 새로 고쳐 잡아야 했다.
우진의 뇌가 빠르게 굴러갔다. 태오의 공 끝이 어느 방향으로 휘어질지, 낙하 각도는 어느 정도일지 머릿속으로 궤적을 그렸다. 단 3초의 침묵.
스카우터들이 숨을 죽인 그 정적의 시간 속에서, 두 소년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히며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우진이 미트를 살짝 왼쪽 아래로 내리며 단단히 고정했다.
‘던져라, 태오야. 내가 무조건 잡는다.’
우진의 눈빛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태오에 대한 맹목적이고도 완벽한 신뢰. 그것이 태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태오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어깨의 통증은 이미 아드레날린의 폭발 속에 묻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운드 위에 오직 자신과 타자, 그리고 우진만이 존재하는 듯한 기묘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타석의 잭슨 밀러가 배트를 고쳐 잡으며 헬멧을 툭툭 쳤다.
"헤이, 꼬맹이. 어디 한번 던져봐라. 담장 밖으로 넘겨줄 테니."
밀러가 영어로 중얼거리며 살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태오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올라갔다.
‘넘길 수 있다면 넘겨봐라. 괴물아.’
태오가 왼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온몸의 근육이 스프링처럼 수축했다가 한순간에 폭발할 준비를 마쳤다. 중심 이동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며, 오른팔이 채찍처럼 뒤에서 앞으로 휘어져 나왔다.
그의 손끝을 떠난 공이 허공을 갈랐.
슝-!
공은 처음에는 평범한 140킬로미터 중반대의 패스트볼처럼 밋밋하게 날아갔다. 밀러의 눈이 번쩍였다. 그의 허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단풍나무 배트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뻗어 나왔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배트 중심에 공이 맞닥뜨리기 직전, 밀러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번지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밀러의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슈우우우-!
공이 타자 앞에서 갑자기 중력을 상실한 듯 허공으로 찰나의 순간 떠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수직으로 뚝 떨어졌다. 단순한 싱커나 포크볼의 낙하 궤적이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연기처럼, 공이 허공에서 한 차례 멈췄다가 아래로 꺾여 내려가는 기괴한 비행이었다.
"왓, 왓 더……?!"
밀러의 비명이 타석에서 터져 나왔다.
이미 체중이 앞으로 쏠린 밀러는 헛스윙을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육중한 배트가 공이 지나간 한참 위쪽의 허공을 쓸데없이 갈랐다.
휘이익-!
풍압만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공은 밀러의 무릎 아래쪽, 우진이 정확히 대기하고 있던 미트 속으로 마법처럼 빨려 들어갔다.
콰앙-!
목동 야구장에 묵직한 포구음이 메아리쳤다.
정적.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이 경기장을 지배했다.
자신의 스윙이 완전히 헛돌아갔음을 깨달은 밀러는 멍하니 마운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경악과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방금 자신이 본 궤적이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말도 안 돼……."
관중석 뒤편에서 지켜보던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의 손에 들린 스피드건과 수첩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군데군데에서 들려왔다.
"방금 그 공 봤어? 수직 무브먼트가 어떻게 저렇게 나올 수가 있지?" "공이 멈췄다 떨어졌어! 세이버메트릭스 데이터상으로 저런 궤적은 존재할 수 없어!"
스카우터들의 눈이 탐욕과 전율로 번뜩였다. 윌리엄 해리슨조차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태오가 선보인 ‘무중력 낙하구’는 그들이 평생 보아온 그 어떤 마구보다도 경이로웠다.
태오는 후끈거리는 오른팔을 가볍게 내리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수명 0.5%의 가치. 그 대가는 확실했다. 메이저리그의 자본가들이 이제 자신을 단순한 아시아의 유망주가 아닌, 마운드를 지배할 절대적인 포식자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태오가 다시 공을 건네받기 위해 우진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미소 지었다. 우진 역시 미트 속의 공을 꽉 쥐며 태오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완벽한 승리였다. 구시대의 사슬과 자본의 덫을 한 번에 깨부순 마구의 등장이었다.
태오가 다음 투구를 위해 플레이트에 발을 올렸다. 다시 한번 허리를 비틀며 와인드업 동작으로 이행하려는 찰나였다.
그의 자비 없는 시야 구석에, 1루측 관람석 뒤편의 그늘진 통로가 걸려들었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중견 메이저리그 스카우터 한 명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한 소년.
백승태였다.
승태는 주위를 극도로 경계하며 자신의 가방에서 가죽으로 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스카우터의 손에 쥐여주고 있었다. 스카우터는 익숙하다는 듯 봉투 안을 슬쩍 확인하더니, 승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부정한 뒷거래. 거액의 스폰 로비 현장이었다.
태오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내려갔다. 와인드업을 하던 그의 몸이 멈칫하며, 날카로운 시선이 백승태의 혐오스러운 뒤태를 전면으로 내리꽂았다.
"타임!"
주심의 날카로운 콜이 마운드를 때렸다. 태오가 투구 동작을 멈추고 플레이트에서 발을 뺐다. 관중석과 덕아웃에서 순식간에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태오는 미트를 낀 왼손으로 모자챙을 가볍게 만지며, 관람석 뒤쪽의 한재이를 향해 턱끝을 살짝 비틀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 그리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한재이의 동물적인 감각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태오의 시선이 닿은 1루측 통로로 초고해상도 망원 카메라의 렌즈를 빠르게 돌렸다.
액정 화면에 백승태의 땀에 젖은 옆얼굴이 선명하게 잡혔다. 그의 손에서 뚱뚱한 가죽 봉투가 메이저리그 중견 스카우터의 주머니로 매끄럽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이 줌인되었다. 스카우터의 옷깃에 달린 배지는 'LA 엔젤스'의 로고였다.
찰칵.
재이의 손가락이 태블릿의 셔터를 가볍게 눌렀다. 단 일 초 만에 부정한 자금의 흐름이 디지털 데이터로 박제되었다. 재이가 태오를 향해 보이지 않게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태오가 다시 플레이트를 밟았다.
머릿속에서 쇠사슬이 엉켜 들어가는 듯한 기분 나쁜 소음이 고막을 긁어댔다.
지이이이잉-!
[경고: 인대 열화 현상 감지. 비대칭 구종 제어의 부작용이 누적되고 있습니다. 다음 한계 돌파 투구 시 내구 자산의 영구 손실율이 배가됩니다.]
붉은 경고등이 망막 안쪽에서 미친 듯이 소용돌이쳤다. 어깨 뒤쪽이 찢어지는 듯한 작열감이 척추를 타고 내려왔다. 태오는 어금니를 사정없이 맞물렸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그럼에도 그의 제구력 수치는 여전히 99를 유지하고 있었다. 완벽을 향한 강박이 통증마저 차갑게 억누르고 있었다.
타석의 잭슨 밀러는 잔뜩 독이 오른 채 배트를 으스러지게 움켜쥐고 있었다. 방금 전의 굴욕을 씻어내겠다는 듯, 그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마운드까지 닿았다.
태오가 우진의 미트를 응시했다. 우진은 태오의 어깨 상태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직감하고, 몸쪽 낮게 미트를 갖다 댔다.
'직구다.'
우진의 무언의 신호. 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오의 오른팔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콰아아아앙!
156킬로미터의 불화살이 밀러의 몸쪽 깊숙한 곳을 정확히 찔렀다. 궤적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밀러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우렁찬 콜과 함께 두 번째 아웃카운트 직전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스카우터들의 탄성이 목동 야구장을 가득 메웠다.
바로 그때였다.
백승태에게 봉투를 건네받았던 LA 엔젤스의 중견 스카우터, 로버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품에서 붉은색 규정집을 꺼내 들며 마운드를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잠깐! 저 투수의 투구 궤적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공이나 손가락에 부정 이물질을 바른 게 분명해! 즉각적인 글러브 검사를 요청한다!"
정적이 흘렀다.
부정투구 의혹. 메이저리그 쇼케이스에서 이보다 치명적인 오명은 없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검사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선수의 가치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백승태가 통로 그늘 속에서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윌리엄 해리슨 역시 기회를 잡았다는 듯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귀를 찢는 이명 속에서, 태오가 천천히 글러브를 벗어 쥐었다. 마운드 위로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