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일기장 표면에서 번져 나간 은색 낙엽 같은 빛무리가 아틀리에의 구석구석을 채워 갑니다. 먼지 더미 속에서도 오래된 삼나무와 소나무 가구들이 그 다정한 온기를 머금고 부드러우면서도 쌉싸름한 향기를 내뿜어옵니다. 당신이 조심스레 안아 든 푸른 여우의 숨소리가 조금씩 잔잔해지던 그때, 열려 있는 유리창 틈으로 차가운 밤바람 한 자락이 스며듭니다. 가구 틈새에 매달려 있던 나무 모빌이 청아하게 흔들립니다.
*딸랑.*
맑고 투명한 소리가 아틀리에 안을 공명하듯 긴 잔향을 남기며 조용히 퍼져 나갑니다. 그 맑은 소리에 여우가 천천히 밤하늘을 닮은 파란 눈동자를 뜹니다. 촉촉하게 젖은 그 고운 눈에서 맑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져 내립니다. 슬픔으로 가득 찬 여우의 눈빛이 당신에게 온전히 가닿는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여우가 절뚝이는 발을 내딛어 당신의 부드러운 손등에 조심스레 촉촉한 코끝을 대자, 눈앞의 공간이 물결치듯 일렁이기 시작합니다.
두 눈 속으로 주홍 빛을 뚫고 스며드는 것은 여우가 간직하고 있던 숲의 기억입니다.
—이것은 이 가여운 영혼이 지니고 온 깊은 마음에 새겨진 흉터구나.—
환영 속 세상은 보석처럼 빛나는 비취색 숲이었습니다. 영롱한 빛을 머금은 이파리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평화로운 대지, 그리고 그곳을 포근한 온기로 감싸 안던 수많은 영물들. 하지만 그 평화는 무자비한 기계음과 함께 찢겨 나갑니다. 거대한 철제 기계들이 들이닥치며 천 년을 살아온 아름다운 나무들을 사정없이 쓰러뜨리고, 포근했던 대지는 차갑게 파헤쳐집니다. 붉은 흙먼지와 차가운 회색 매연 속에서 길을 잃은 어린 동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깃털이 부러진 영조들이 잿빛 하늘을 헤매고, 다리를 다친 아기 사슴들이 쓰러져 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당신의 마음에 전해집니다. 여우 역시 그 혼돈 속에서 날카로운 바위틈에 다리가 끼여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환영이 서서히 걷히며 다시 눈앞에 아틀리에의 아늑한 주홍색 전등 빛이 돌아옵니다. 하지만 여우가 전해준 서늘한 절망과 두려움은 여전히 당신의 가슴 한구석을 시리게 적시고 있습니다. 몸을 부르르 떠는 작은 여우의 등을 따스한 손길로 쓸어내리자, 문득 숲의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수많은 동물들이 이 밤 한복판을 방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뇌리를 스칩니다.
이곳 아틀리에는 겨우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좁고 낡은 공간에 불과합니다. 당장이라도 숲에서 상처받은 영적 존재들의 애달픈 울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오는 것 같아, 당신은 떨리는 마음으로 이 오래된 일기장과 아틀리에의 가구들을 내려다봅니다. 맑은 밤하늘 아래에서, 당신의 마음에 조용한 결심의 불꽃이 피어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