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안개가 걷히기 무섭게 붉은 경고등이 복도를 피로 물들였다.

치이이익!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과 함께 실험실 콘솔의 온도가 비정상적인 궤적을 그리며 치솟기 시작했다. 우측 구석에 설치된 붉은 화염용 밸브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듯 강제로 회전했다. 배관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고압의 증기가 격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불길한 박자를 만들어냈다.

뜨거운 열기가 액체 질소 파이프의 외벽을 가차 없이 지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성에로 뒤덮여 있던 파이프 표면이 비정상적인 고열에 노출되자, 쩍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미세한 균열이 생겨났다. 성에층이 순식간에 기화하며 뿜어내는 백색 가스가 허공을 메웠다.

[위험: 압력 제어 불능. 30초 후 폭파 가동.]

기계음 섞인 경고 방송이 고막을 짓눌렀다. 방 안의 온도는 이미 섭씨 60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들이마시는 공기마다 목구멍을 태우는 유황 냄새가 섞여 들었다.

벽면에 조잡하게 인쇄된 수칙판의 문구가 붉은 경고등 아래에서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모든 장치의 수치에 의문을 품지 말라. 의문을 금하는 자만이 다음 방의 문을 열 것이다.’

숨이 턱 막히는 열기 속에서, 백시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눈동자에는 혼돈 대신 차가운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의문을 금하라고?

그것은 이 기만적인 밀실을 설계한 오진우가 던진 가장 유치한 가이드라인이었다. 생존을 위해 규칙에 매달리는 인간의 나약한 심리를 겨냥한 덫. 온도가 60도까지 급팽창하는 와중에도 ‘의문을 갖지 말라’며 경고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장치 내부에 감추고 싶은 치명적인 진실이 있다는 뜻이었다.

"질소 유출 밸브……."

한스의 목소리가 시우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오만한 설계자 인격은 이 상황을 냉소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우리가 저 푸른색 질소 밸브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겁을 주는 거다. 의문을 품고 저걸 잠그는 순간 시스템이 멈출 테니까. 아주 교과서적인 심리 차단막이군."

하지만 한스의 통제 시간은 이미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척수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찌릿한 거부반응이 뇌의 전두엽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P-099라 명명된 체내의 이식물이 이성을 마모시키며 경고를 보냈다. 한 인격의 제어 한계 시간인 10분의 모래시계가 빠르게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대로는 무너진다. 더 미세하고, 더 즉각적인 물질의 통제가 필요했다.

"나와, 샤를."

백시우가 자신의 자아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뇌 신경이 가닥가닥 찢어지는 듯한 극통이 머리를 관통했다. 눈앞에 수천 개의 백색 광선이 교차하더니, 이내 시야가 극도로 선명하고 차갑게 내려앉았다. 피부에 닿는 열기의 분자 구조가 느껴질 것 같은 기묘한 감각. 사체 청소부이자 유기 화학의 천재, 샤를의 동조화가 시작되었다.

샤를의 감각이 일깨워지자마자, 백시우의 손끝이 바닥에 뒹굴고 있던 낡은 가죽 바인더와 그 옆의 도구함으로 향했다. 그것은 샤를의 기억 속에 각인된 전용 도구함이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

도구함의 녹슨 걸쇠 옆에는 아주 미세한 글씨로 금속 표식이 음각되어 있었다.

[P-099]

백시우는 가쁜 숨을 멈추고 자신의 오른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피부 위, 오래전에 새겨진 듯한 흉터가 그 불길한 빛 아래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손목의 흉터 라인은 도구함에 새겨진 'P-099'의 서체와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일치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단단한 빗장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잃어버린 첫 사건의 기억, 아니, 그 이전에 존재했던 자신에 대한 단서였다.

판게아 그룹.

그들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었다. 자신은 그들의 손에 의해 인위적으로 난도질당하고 개조된, 아흔아홉 번째 실험체였다.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네 명의 살인마 인격은 우연히 생겨난 정신 질환이 아니었다. 판게아가 심어 놓은 인공적인 괴물들이었다.

"하하……."

샤를의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백시우의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 더러운 냄새. 판게아의 개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단 말이지? 지독하게 조잡한 냄새야."

슬퍼할 시간도, 분노할 여유도 없었다. 60도를 넘어선 열기가 가죽 구두 밑창을 녹일 듯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샤를은 붉게 상기된 눈으로 가스 연결 축에 설치된 바이패스 압력관을 쏘아보았다.

오진우가 설계한 이 공간은 얼핏 완벽한 논리의 감옥처럼 보였다. 하지만 샤를의 눈에는 곳곳에 널린 조잡한 이음새가 보였다.

이전 방에서 감압실 천장 기어 축이 회전할 때, 매뉴얼의 지시와 달리 12초의 빈틈을 두고 불규칙하게 유격을 보였던 순간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진우는 완벽한 신학적 규칙을 창조했다고 자부하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물리적인 기계들은 결국 인간의 손으로 조립된 불완전한 물질에 불과했다.

"이봐, 오진우."

샤를이 허공을 향해 읊조렸다.

"네 뇌가 아무리 훌륭한 시나리오를 써도, 네 손가락은 나사 하나 제대로 조이지 못하는 병신이로군."

가스 연결 축의 중앙 제어기. 규칙과 온도를 제어하는 일체형 모듈의 하단 배선이 미세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규격에 맞지 않는 기성품을 강제로 밀어 넣느라 발생한 약 1.5밀리미터의 단차.

열교환 장치의 주 방열 배출구는 바로 그 비틀린 이음새 바로 위에 얹혀 있었다. 열기 때문에 금속이 팽창하면서, 그 틈새는 더욱 벌어지고 있었다.

샤를은 도구함에서 묵직한 대형 스패너를 꺼내 들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배출구 근처로 손을 뻗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샤를에게 육체의 고통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오직 완벽한 청소, 완벽한 파괴만이 그의 뇌를 지배했다.

스르륵.

샤를이 스패너를 가볍게 쥐고 균형을 잡았다. 그의 팔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지옥의 온도가 몇 도인지 물어보지 마라."

대사 한 마디와 함께, 백시우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쾅!

묵직한 강철 스패너가 주 방열 배출구의 조인트 부분을 정확하게 강타했다. 단순한 타격이 아니었다. 팽창한 금속의 가장 취약한 결손 부위를 수직으로 쪼개버리는 궤적이었다.

깡!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배출구의 그릴이 찌그러지며 고압 가스가 뿜어져 나오던 관의 방향이 완전히 꺾였다.

"한 번 더."

쾅!

두 번째 타격이 가해지자, 조잡하게 맞물려 있던 온도 제어기의 기어들이 고정 축을 이탈하며 굴러떨어졌다. 비정상적인 열교환을 유도하던 바이패스 관이 수직으로 분쇄되며 내부의 내부 압력이 순식간에 외부로 유출되었다.

치이이이이—!

엄청난 기세로 분출되던 고온의 증기가 갈 갈을 잃고 허공에서 흩어졌다. 열 교환이 강제로 중단되자, 콘솔의 온도 판넬이 미친 듯이 요동치더니 이내 숫자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현재 온도: 52°C…… 41°C…… 30°C……]

사우나 같던 열기가 순식간에 차가운 공기로 대체되었다. 급격한 온도 변화로 인해 사방의 벽면에서 쩍쩍 갈라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순간, 물리적 법칙의 연쇄 반응이 시작되었다.

방 안의 열기가 급격히 식어내리며 공기가 수축하자, 밀폐되어 있던 공간 내부의 압력이 급감했다. 이 갑작스러운 압력의 공백은 가장 약한 벽면을 향해 몰아쳤다.

쿠구구구궁!

임다혜가 갇혀 있던 우측 통로의 두꺼운 금속 격벽이 거대한 수압을 받은 것처럼 안쪽으로 비틀리기 시작했다. 팽창했던 철판이 차가운 공기를 만나 수축하며 생긴 강력한 비틀림이었다.

"으윽!"

격벽 너머에서 임다혜의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

두꺼운 강철판이 기괴한 각도로 휘어지며, 아래쪽의 비상 열기 배출구와 맞물려 거대한 유격을 만들어냈다. 철과 철이 맞물려 짓겨 나가는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마침내, 단단히 닫혀 있던 격벽이 틈새를 드러내며 반쯤 주저앉았다. 지독한 열기가 그 틈을 통해 아래쪽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듯 빠져나갔다.

백시우는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제한 시간: 01:15]

머릿속에서 샤를의 웃음소리가 점차 멀어지며, 백시우 본래의 이성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자아의 마모가 임계점에 도달해 손끝이 제멋대로 떨렸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손목의 'P-099' 흉터를 가만히 쓸어내리며, 그는 자신의 진짜 정체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음을 직감했다.

"백시우! 괜찮아?"

부서진 격벽의 틈새 너머로, 이마에 땀과 그을음이 잔뜩 묻은 임다혜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의 권총은 여전히 장전된 상태였고, 눈빛은 경계와 안도가 뒤섞여 흔들리고 있었다.

"보다시피."

백시우가 건조하게 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던 물리적 장벽이 완전히 무너지고, 통로가 하나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 백시우의 귓가에 기묘한 이질감이 감돌았다.

방금 전까지 고압 가스가 빠져나가며 내던 소음이, 거짓말처럼 단 1초 만에 완전히 소멸했다. 기계의 잔향도, 임다혜의 거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비정상적인 정적. 마치 공간 전체의 소리가 거대한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은 백색의 침묵이었다.

이것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백시우의 프로파일러로서의 직감이 위험 신호를 보냈다. 소음이 차단된 것이 아니라, 소음을 흡수하는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스윽.

격벽 뒤편의 짙은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일렁이는 그림자가 이쪽을 향해 뻗어 나왔다.

그림자의 손에는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는, 특수 코팅된 검은 도검이 들려 있었다. 공기의 흐름마저 갈라버리는 무소음의 칼날이 백시우의 목덜미를 겨냥한 채, 어둠을 찢고 소리 없이 돌진해 왔다.

목덜미를 향해 소리 없이 쇄도하는 은색의 선선한 궤적.

찰나의 순간, 샤를의 동공이 고양이의 그것처럼 극도로 축소되었다. 뇌 세포가 비명을 지르며 주변의 모든 사물을 정지된 프레임으로 분할해 들여왔다. 피할 수 없는 각도였다. 상대의 칼끝은 공기의 저항마저 최소화하도록 설계된 완벽한 살인의 각도를 그리며 목동맥을 겨냥하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는 것은 자살행위다.

샤를은 오히려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무게중심을 무너뜨리며 격벽이 부서진 틈새, 천장으로 길게 뻗은 기계식 전동축을 향해 스패너를 쥔 오른팔을 뻗었다.

저 기어는 돌지 않고 있었다.

감압실 천장의 기어와 연동된 중앙 전송축. 매뉴얼의 맹점을 통해 파악했던 바로 그 12초의 유격 시간이었다.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서로를 물어뜯기 직전, 숨을 죽이고 멈추어 서는 기만적인 정지의 순간.

[제한 시간: 00:38]

시야 모퉁이에 붉게 점멸하는 타이머가 육체의 한계를 경고했다. 척수를 타고 올라오는 마비감이 혀끝을 무겁게 짓눌렀지만, 샤를은 기괴할 정도의 침착함으로 숫자를 세었다.

‘아홉. 열.’

칼날이 그의 깃을 스쳤다.

서늘한 감각과 함께 살을 찢는 통증이 어깨를 관통했다. 셔츠 위로 붉은 꽃이 번져 나갔으나, 샤를의 시선은 오직 천장의 톱니바퀴 틈새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기계처럼, 어깨에 박힌 칼날을 무시한 채 왼손으로 습격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철갑을 두른 듯 단단한 손목이 격렬하게 뒤틀렸다. 습격자의 가려진 눈동자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스쳤다.

"열하나."

샤를이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손목을 움켜쥔 팔에 온 체중을 실었다. 그대로 습격자의 상체를 기어의 교차점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열둘."

카가강!

12초의 침묵이 끝나자마자, 잠들어 있던 기계 야수가 깨어났다. 엄청난 토크를 품은 중앙 전송축이 잔여 압력을 동력 삼아 폭발적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

습격자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역방향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강철 톱니 사이에 그의 특수 도검과 탄소 섬유 장갑이 낀 오른팔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금속이 소름 끼치게 짓개지는 소리와 함께 뼈가 으스러지는 둔탁한 파열음이 복도를 메웠다. 가차 없는 기계의 회전력은 인간의 근육과 골격을 종잇장처럼 구겨버렸다. 칼날이 바닥으로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손목이 으스러진 습격자가 뒤로 멀어지려 버텼지만, 이미 기어의 이빨은 그의 어깨뼈 근처까지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이게…… 물리적인 진실이라는 거다."

샤를의 목소리가 점차 가늘어졌다.

[제한 시간: 00:08]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차가운 백색 소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뇌를 얼려버릴 것 같던 빙결의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 타들어 가는 듯한 두통과 함께 백시우 본래의 자아가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허억!"

백시우는 가슴을 쥐어짜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쳤고, 전신에 분포한 모든 신경 세포가 뒤늦게 찾아온 통증을 한꺼번에 비명으로 쏟아냈다. 어깨의 자상에서 흘러내린 피가 차가운 바닥 타일을 적셨다.

자아 마모의 대가. 그의 이성의 한 귀퉁이가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닳아 없어지는 차갑고 완고한 마찰음이 귓가에 울렸다.

"백시우!"

임다혜가 부서진 격벽 틈새를 기어 나와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대검을 차고, 기어에 아랫팔이 완전히 박힌 채 늘어진 습격자를 경계하며 백시우의 어깨를 지혈했다.

"정신 차려! 눈 떠!"

"나는…… 괜찮아."

백시우가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내며 습격자를 응시했다.

검은 전술 마스크를 쓴 사내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과다출혈과 기계의 압박으로 인해 쇼크 상태에 빠진 듯했다. 사내의 가슴팍에는 판게아 그룹의 삼각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소형 수신기가 부착되어 있었다.

지직, 지지직.

비정상적으로 고요하던 공간에 다시금 미세한 노이즈가 흐르기 시작했다. 소음 차단 장치가 무력화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습격자의 가슴에 달린 수신기에서, 너무나도 익숙하고 온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역시 대단하군, 백시우. 아니, 아흔아홉 번째의 걸작이라고 불러야 할까.

오진우였다.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는 마치 체스판 위의 말들을 내려다보는 정교한 구경꾼처럼 차분했다.

- 네가 가진 그 인격들이 네 사지를 구원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네가 구하려는 그 형사가 진짜 누구인지, 네가 잃어버린 그 첫 번째 사건의 진짜 '피해자'가 누구였는지 알고 나면…… 네 안의 괴물들이 너를 살려둔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백시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 깊은 곳, 두꺼운 얼음 아래 매장되어 있던 무언가가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지독한 환각과도 같은 붉은 잔상이 눈앞을 스쳤다. 화염에 휩싸인 고택, 그리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

그 뒷모습은, 지금 자신의 어깨를 쥐고 있는 임다혜의 실루엣과 기묘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 다음 방에서 기다리지. 네가 스스로의 뇌를 파먹고 미쳐버릴지, 아니면 진짜 괴물로 완성되어 내 앞에 설지 아주 기대되는군.

수신기가 툭, 소리를 내며 완전히 끊겼다.

백시우는 서서히 조여오는 두통 속에서 임다혜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 찬 걱정과 불신, 그리고 그 너머에 숨겨진 거대한 심연이 그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침묵이 복도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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