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추리를 믿는 순간, 네 뇌의 인격들이 너를 역으로 먹어 치워 인격 분열로 자살하게 될 거야!”
강철 벽이 육중한 마찰음을 내며 완전히 맞물리기 직전, 틈새를 뚫고 들어온 임다혜의 비명 섞인 외침이 귓전을 날카롭게 찔렀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사방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일말의 빛조차 허용하지 않는 암전이 찾아왔고, 백시우—아니, 지금 이 육체의 통제권을 쥔 한스는 홀로 격리된 어둠 속에 갇혔다.
망막 위에 붉은색 타이머가 깜빡였다.
[09:42] [09:41]
“자살이라니. 그런 천박한 단어는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 형사 나으리.”
한스는 어둠 속에서 낮게 읊조렸다. 백시우의 성대를 통해 흘러나온 목소리는 기괴할 정도로 차분하고 오만했다. 그는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일으키려다, 이내 손목의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백시우의 본래 자아가 안쪽에서 완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임다혜의 경고가 뇌의 심부층을 건드린 탓이었다. 이성이 마모되는 감각은 두개골 안쪽에 얼음송곳을 박아 넣고 서서히 돌리는 것 같은 예리한 두통으로 발현되었다.
한스는 관자놀이를 강하게 누르며 차가운 벽면에 등을 기댔다.
벽면의 재질이 달라져 있었다. 이전 방들의 거친 콘트리트나 녹슨 철판이 아니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것은 매끄럽고 이음새가 없는 정밀한 백색 아크릴과 특수 강화 유리였다.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한스의 손가락 끝에 남은 설계자로서의 감각이었다. 그는 벽면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둔탁한 금속음 대신 서류 가방의 가죽이 쓸리는 듯한 마찰음이 발끝에 채였다.
한스는 허리를 숙여 바닥을 더듬었다. 손끝에 잡힌 것은 묵직한 가죽 바인더였다. 한 권이 아니었다. 서너 권의 두꺼운 서류철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다급하게 도망치며 떨어뜨린 것처럼, 혹은 누군가 보란 듯이 이곳에 흘려둔 것처럼.
지이잉하는 기계음과 함께 천장의 형광등이 미세하게 점멸하며 푸르스름한 안광을 뿜어냈다. 방안의 전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곳은 밀실이라기보다 버려진 연구소의 복도에 가까웠다. 벽면에는 알 수 없는 화학 기호와 계통도가 복잡하게 그려져 있었고, 바닥에는 판게아 그룹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서류 바인더들이 흩어져 있었다.
한스는 바인더 하나를 집어 들었다. 표지에는 ‘극비(CONFIDENTIAL)’라는 붉은색 도장이 찍혀 있었다.
“오진우 그 애송이 녀석, 이런 구식 종이 뭉치로 나를 유인하려 들다니.”
한스는 콧방귀를 뀌며 첫 페이지를 넘겼다. 조소로 가득했던 그의 눈매가 이내 가늘어졌다.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들은 단순한 연구 보고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 대한 극도로 가학적인 기록이었다.
[과제명: 인공 다중인격 제어 및 전이(Alter-Ego Transfer) 시스템 구축] [주관: 판게아 생명공학 연구소 제3개발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아주 오래전, 소독약 냄새와 피비린내로 가득했던 밀폐된 방의 기억이 한스의 의식 저편에서 기어 나왔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시각 정보가 경계선 없이 뇌 안에서 뒤섞였다.
한스의 손가락이 서류의 특정 페이지에서 멈췄다.
거기에는 익숙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실험체 코드명: P-099]
한스는 천천히 자신의 왼손을 들어 올렸다. 소매를 걷어 올리자, 손목 안쪽에 새겨진 흉터가 드러났다. 정교한 수술 메스가 지나간 뒤 남은 일자형의 붉은 낙인. 그 흉터의 형태는 2화에서 시체 청소부 전용 도구함에서 발견했던 낡은 금속 표식 ‘P-099’의 글자체와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게…… 나라고?”
백시우의 본성 자아가 머릿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제어권을 흔들었다. 한스의 오만한 표정이 순간 무너지며, 백시우의 젖은 눈동자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서류의 다음 장을 넘겼다.
[실험체 P-099는 선천적 프로파일러로서의 논리 구조를 유지한 채, 내면에 4개의 독립된 인위적 합성 킬러 인격 전이체를 성공적으로 이식받음.] [이식 인격 프로필:] [1. 샤를 (Charles) - 사체 소멸 및 생화학 처리 특화. 편집증적 세척 성향.] [2. 한스 (Hans) - 가학적 구조 설계 및 트랩 제작 특화. 오만증적 완벽주의.] [……]
글자가 눈앞에서 번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타인의 죽음을 추적하고 억울함을 밝혀내던 정의로운 범죄심리학자라는 믿음. 그것은 판게아가 심어둔 가장 거대하고 정교한 가짜 기억에 불과했던가.
그는 정의를 수호하는 프로파일러가 아니었다.
그저 판게아 그룹의 어두운 지하실에서, 가장 잔혹한 살인마들의 뇌 영역을 잘라 붙여 만든 저주받은 실험 도구, ‘99호’에 불과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백시우의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심장이 가슴뼈를 부술 것처럼 날뛰었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며 바닥의 타일들이 밑바닥 없는 심연으로 꺼지는 듯한 환각이 일었다.
자신이 그동안 분석하고 프로파일링했던 사건들, 그 사체들의 잔해 위에 서 있던 자신의 모습이 전부 조작된 무대 위의 연극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샤를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거봐, 시우야. 너나 나나 결국 같은 시궁창에서 태어난 괴물이라니까?’
“닥쳐.”
백시우는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자아의 붕괴 선고가 내려진 것만 같았다. 스스로를 향한 극심한 자기불신이 영혼의 뿌리부터 갉아먹어 들어왔다.
그때, 벽면에 설치된 금속 인터폰 스피커에서 거친 지직거림과 함께 기계음으로 변조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 진입자는 심판의 방에 도달하기 전까지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의심하지 말 것. 규정 일람에 의문을 표하면 전기로가 가열된다.
차가운 기계음이 복도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 음성은 백시우의 뇌리에 박힌 통증을 일순간 얼려버렸다. 오진우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백시우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를 유희로 삼고, 영혼을 난도질한 자들을 향한 극도의 멸시이자 생존을 향한 집착이었다.
백시우는 바닥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비틀거리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빛에서 자기불신의 나약함이 걷히고, 오직 상대를 찢어발기겠다는 냉혹한 의지가 내려앉았다.
“존재 의의를 의심하지 말라고?”
백시우는 서류 바인더를 꽉 쥐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바랬다.
“오진우. 네가 나를 괴물로 만들었다면, 기꺼이 그 괴물이 되어 네 목을 물어뜯어 주지.”
그는 자신이 프로파일러인지 살인마인지 더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눈앞의 함정을 부수고, 이 가학적인 게임을 설계한 자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뿐이었다.
백시우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07:15]
남은 시간은 7분여. 한스의 인격이 완전히 자아를 잠식하기 전에 이 복도를 돌파해야 했다.
그의 시선이 복도 끝에 위치한 대형 제어 콘솔로 향했다. 콘솔 위에는 수많은 밸브와 압력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가만히 매뉴얼을 떠올렸다. 4화에서 한스가 도면을 분석할 때 흘리듯 언급했던 기억. '순지 무조건 반응 매뉴얼의 톱니바퀴는 12초의 유격을 가지고 회전한다.'
이곳의 가스 배관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판게아의 설계 공식은 언제나 자신들의 완벽함을 뽐내기 위해 일정한 기하학적 규칙을 고수한다. 그리고 그 규칙성 뒤에는 반드시 인간의 반응 속도를 계산한 미세한 오차가 존재한다.
백시우는 콘솔 앞으로 걸어가 낡은 밸브의 표면을 쓸었다.
그때, 콘솔의 디지털 액정판에 붉은색 경고등이 켜지며 숫자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현재 온도: 45°C…… 60°C…… 80°C……]
치이익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콘솔 우측의 붉은 화염용 밸브가 스스로 회전하며 열렸다.
동시에 복도 천장을 지나던 두꺼운 액체 질소 파이프의 외벽 성에층이 비정상적인 열기에 노출되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뚝, 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뜨겁게 달아오른 콘솔 표면에 닿아 격렬한 수증기를 뿜어냈다.
삐이— 삐이—!
비상 경보음이 복도 전체를 가득 채웠다.
열기로 인해 팽창한 액체 질소 파이프가 터지기 일보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극도의 고온과 저온이 충돌하는 이 압력의 한계점 속에서,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은 복도 전체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릴 폭발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다.
백시우의 눈동자에 붉은 경고등의 불빛이 차갑게 반사되었다.
폭열이 뺨을 후려쳤다.
피부 표면의 솜털이 순식간에 오그라들며 탄내가 진동했다. 콘솔 스크린 위로 붉은 점멸등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깜빡이며 새로운 수칙을 뱉어냈다.
[수칙 4: 배관 과열 시 즉시 비상 차단 레버를 우측으로 끝까지 돌려 질소를 배출할 것. 지체 시 가열로가 폭발함.]
“친절하기도 해라.”
한스는 쩍쩍 갈라지는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의 시선은 레버가 아닌, 배관 내부의 미세한 기계음으로 향했다. 기어들이 맞물려 쇠 가루를 뱉어내는 서늘한 마찰음. 감압실의 천장에서 보았던 기어 축의 회전 주기와 동일한 리듬이었다.
오진우의 매뉴얼은 언제나 가장 직관적인 두려움을 자극한다. 폭발할 것 같은 열기 속에서 인간은 조건반사적으로 눈앞의 레버를 당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레버를 돌리는 순간, 배관 내부의 물리적 차단막이 닫히며 팽창한 질소가 역류하게 된다.
결국 이 방 전체가 영하 196도의 액체 질소로 가득 차 얼어붙는 동사(凍死)의 함정.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기계를 조립한 인간의 비겁함이 묻어날 뿐.”
한스는 손목의 P-099 흉터를 지그시 눌렀다. 찌릿한 전류가 척수를 타고 뇌하수체를 자극했다. 순간,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자신을 수술대에 묶어두고 무언가를 주입하던 과거의 단편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차가운 금속 침대. 머릿속을 파고들던 정밀 드릴의 진동.
‘99호, 자아 전이율 87% 돌파. 한스 인격의 동기화를 개시합니다.’
무기질적인 기계음과 지금 콘솔에서 울리는 경보음이 뇌 속에서 기괴하게 겹쳤다. 한스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잔상을 털어냈다. 지금은 자아의 근원을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1초 뒤의 생존이 먼저였다.
“12초.”
그가 중얼거렸다.
판게아 그룹이 설계한 모든 표준 제어 기어는 기계식 신호가 전자식 밸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12초의 유격, 즉 물리적 지연 시간을 지닌다. 그것은 그들이 자랑하는 완벽한 시스템의 유일한 숨구멍이자, 한스가 간파한 치명적인 설계 결함이었다.
경보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리는 가운데, 한스는 가만히 서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일. 이. 삼.
피부가 열기에 달아올라 붉게 진물러 가기 시작했다.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허파를 태웠다. 백시우의 본성 자아가 뜨거운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제어권을 돌려받으려 요동쳤지만, 한스는 이를 악물고 이성을 붙잡았다.
칠. 팔. 구.
액체 질소 파이프의 외벽이 쩍쩍 갈라지며 성에가 칼날 같은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눈꺼풀 바로 위로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스치며 붉은 선을 그렸지만, 한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십일. 십이.
정확히 12초가 되는 순간, 한스는 레버를 우측이 아닌 좌측으로, 억센 힘으로 꺾어버렸다.
끼이이익!
쇠와 쇠가 맞물려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함께, 콘솔 내부에서 불꽃이 튀었다. 송 경사의 무전기에서 뽑아내 밸브 틈새에 끼워두었던 구리 코일이 전류를 합선시키며 불꽃의 궤적을 그렸다.
푸슈슈슈슈—!
숨 막히는 백색 증기가 복도 가득 휘몰아쳤다. 뜨거운 열기와 극저온의 질소 가스가 공중에서 충돌하며 거대한 안개 장막을 형성했다. 콘솔의 온도 표기판이 미친 듯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현재 온도: 22°C…… 18°C……]
압력계의 바늘이 안전 영역으로 툭 떨어졌다.
한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차가워진 바닥 타일에 툭툭 떨어졌다.
[제한 시간: 05:12]
타이머의 숫자는 무정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자아 마모의 대가로 찾아오는 극심한 피로감이 사지를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안심할 틈은 없었다.
백색 증기가 서서히 걷히는 복도 저편, 차단벽 너머에서 둔탁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임다혜가 갇힌 통로 쪽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방향, 이 폐쇄된 실험실의 더 깊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철컥.
금속 장화가 타일을 밟는 규칙적이고 무거운 발소리.
증기 속에서 서서히 거대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밀실의 기계 장치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인간의 살기와 질척이는 적의가 안개를 뚫고 백시우의 감각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판게아 그룹이 보낸 사냥개. 혹은 오진우가 준비한 마지막 처형인.
그림자는 오른손에 쥐어진 검고 묵직한 군용 대검을 바닥에 쓸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끼이익, 쇠가 긁히는 소리가 복도의 벽면을 타고 불길하게 공명했다.
한스는 스르륵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바닥에 떨어진 가죽 바인더의 모서리를 나지막하게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