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기가 툭, 소리를 내며 완전히 끊겼다.
고요가 찾아온 것은 찰나였다. 부서진 격벽 뒤, 어둠의 틈새에서 공기의 흐름이 미세하게 뒤틀렸다. 소리 없는 바람이 불었다. 아니, 그것은 바람이 아니라 차갑게 벼려진 쇠붙이가 공간을 가르는 파찰음이었다.
어떤 징후도 없었다. 발소리도, 옷자락이 쓸리는 마찰음도 소거된 기묘한 살의. 오진우가 던진 잔혹한 수수께끼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은빛 궤적이 일어났다. 비정상적으로 소음이 차단된 특수 도검이 백시우의 목덜미를 향해 수평으로 쇄도했다.
"피해!"
임다혜의 비명이 고막을 찢었다.
백시우는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꺾었다. 콧등 위로 서늘한 금속의 냉기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검날이 공기를 가르는 궤적을 따라 잘려 나간 머리카락 몇 가닥이 허공에 흩날렸다.
습격자는 검은 전술 마스크 위로 오직 살기만을 띤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불필요한 대사는 없었다. 오직 목숨을 거두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정교하게 조율된 기계적인 움직임이었다. 검객의 손목이 가볍게 회전하자, 빗나간 검끝이 즉각적인 반동을 그리며 백시우의 심장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도망칠 공간은 없었다. 등 뒤는 막다른 격벽이었고, 바닥은 이미 흩어진 기계 부품과 끈적한 피로 가득했다.
‘한스.’
백시우는 뇌리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오만한 설계자의 인격을 붙잡았다. 7화에서 시작된 강제 전이의 타이머가 머릿속에서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이성의 가장자리가 타들어 가는 극심한 두통 속에서, 한스의 차가운 공간 인지 능력이 백시우의 동공을 통해 세상을 재구축했다.
1.2초. 검날이 심장에 닿기까지 남은 시간.
백시우는 옆에 서 있던 연구 소독용 간이 무기 카트의 하단 프레임을 발로 강하게 걷어찼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된 무거운 카트가 거친 마찰음을 내며 검객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깡!
도검의 끝이 카트의 두꺼운 철판을 관통했다. 불꽃이 어둠 속에서 짧게 튀었다. 철판을 찢고 들어온 검날이 백시우의 셔츠 깃을 스쳤지만, 카트의 물리적인 질량이 검객의 완벽한 궤도를 미세하게 비틀어 놓은 뒤였다.
"이 미친 새끼가!"
임다혜가 카트 너머로 몸을 던지며 사격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녀의 권총은 이미 이전의 공방으로 인해 슬라이드가 뒤로 후퇴한 채 고정되어 있었다. 탄환 고갈. 그녀는 망설임 없이 권총을 거꾸로 쥐고, 단단한 금속제 개머리판으로 검객의 측두부를 후려치기 위해 휘둘렀다.
검객은 고개를 가볍게 숙여 임다혜의 타격을 피하는 동시에, 철판에 박힌 검을 뽑아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마치 미리 짜인 각본을 수행하는 무용수처럼 우아하고 치명적이었다.
백시우는 카트 뒤로 몸을 웅크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깨의 상처에서 시작된 통증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를 괴롭히는 것은 자아의 균열이었다. 한스의 인격이 그의 지각을 지배하는 동안, 뇌의 시냅스들이 과부하로 인해 하나둘 끊어지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오리지널 자아의 이성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차가운 마찰음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이 바닥에 나뒹구는 철제 도구함에 머물렀다.
그것은 조금 전 샤를의 인격을 동기화했을 때 만졌던, 시체 청소부 전용 도구함이었다. 녹슬고 찌그러진 도구함의 모퉁이에는 아주 오래된 금속 표식이 붙어 있었다.
[P-099]
그 세 개의 글자와 두 개의 숫자가 백시우의 망막을 강타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기묘한 감각이 뇌리를 지배했다. 백시우는 천천히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소매가 찢겨 드러난 손목. 그곳에는 깊고 불규칙하게 패인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단순한 사고의 흔적이 아니었다. 메스로 정교하게 살을 째고 무언가를 밀어 넣은 뒤 조잡하게 봉합한 흔적.
그 흉터의 궤적이, 도구함에 새겨진 'P-099'의 폰트와 기괴할 정도로 완벽하게 일치했다.
‘아홉 번째의 걸작…….’
오진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고막을 두드렸다.
백시우의 의식 속에서 댐이 무너지듯 기억의 파편들이 쏟아져 나왔다. 판게아 그룹의 지하 실험실. 하얀 타일 바닥. 코를 찌르는 포르말린 냄새. 쇠사슬에 묶인 채 비명을 지르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되던 타인들의 잔혹한 기억들.
그는 평범한 프로파일러가 아니었다.
그는 판게아 그룹이 만들어낸 가장 완벽하고 가학적인 피조물, 인공 다중인격 수술체 99호였다. 자신 안의 살인마들은 우연한 정신병의 산물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뇌 개조 수술을 통해 이식된 괴물들이었다.
"백시우! 멍하니 있지 마!"
임다혜의 다급한 외침이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
검객의 검이 다시 한번 카트를 반으로 가르며 짓쳐 들어왔다. 은빛 검날이 백시우의 뺨을 스쳐 지나가며 붉은 선을 그렸다. 피가 흘러내렸지만, 백시우의 눈동자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차갑고 맑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이 괴물이라는 진실을 마주했음에도, 그의 생존 본능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잔인한 진실이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샤를'의 감각을 깨웠다.
‘더러운 건 치워야지.’
샤를의 인격이 백시우의 신경망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한스의 정교한 설계 능력과 샤를의 편집증적인 생화학적 감각이 기묘하게 융합되는 순간이었다. 자아 마모의 고통은 배가 되었지만, 감각의 선명도는 한계를 초과했다.
바닥에 밀착한 백시우의 코끝으로 아주 미세한 냄새가 포착되었다.
일반적인 인간의 후각으로는 결코 인지할 수 없는 수준의 미미한 기류. 벽면의 노후된 이음새와 천장의 가스 공급 라인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차갑고 건조한 성분. 무색무취의 기연성 연료인 '디메틸 에테르' 특유의, 미세하게 썩은 과일 내가 섞인 화학적 잔향이었다.
‘가스가 새고 있어.’
백시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설계자 오진우는 이 방을 완벽한 살인 밀실로 만들었다고 자만했겠지만, 기계는 언제나 인간보다 정직한 법이다. 노후된 배관의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미량의 디메틸 에테르는 이 공간을 언제든 폭발시킬 수 있는 거대한 화약고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죽어라."
검객이 낮게 읊조리며 도검을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그의 발이 바닥의 철제 플레이트를 딛는 순간,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다.
임다혜가 필사적으로 검객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탄환이 없는 권총을 둔기처럼 휘두르며 검객의 유려한 검식을 몸으로 받아냈다.
챙! 챙!
불꽃이 그녀의 얼굴을 번뜩이게 비췄다. 임다혜의 어깨와 허벅지에서 검날에 베인 핏방울이 튀었다. 그녀의 거친 호흡과 쇠붙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밀실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무참히 칼끝에 밀리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깃든 것은 단순한 생존욕이 아니었다.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밀실의 배후를 반드시 단죄하겠다는, 광기에 가까운 수사 본능이었다.
"임 형사, 뒤로 빠져!"
백시우가 소리쳤다.
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손은 가스 배관이 흐르는 벽면 기둥의 노후 조립새를 향해 뻗어 있었다. 샤를의 기억 속에서 추출된 배관 구조도가 머릿속에 3D 그래픽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백시우는 주머니에서 송 경사의 유품인 무전기를 꺼냈다. 무전기 마이크 그릴 뒤편에 새겨진 점자 구조 정보—'거울의 프레임 모서리를 응시하라'는 조언은 다음 방의 힌트였지만, 지금 당장은 무전기의 단단한 금속 안테나가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그는 안테나 끝을 배관의 노후된 이음새 틈바구니에 찔러 넣고 지렛대의 원리로 강하게 젖혔다.
치이익!
눈에 보이지 않는 디메틸 에테르 가스가 고압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한 가스는 순식간에 폭발 범위에 도달할 준비를 마쳤다.
동시에 백시우는 몸을 날려 바닥에 설치된 살수용 액체 스프링클러의 수동 배수 밸브를 발로 강하게 짓눌렀다.
스프링클러 배수구가 열리며 차가운 물이 바닥을 적시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밸브를 강제로 누르자, 관로 내부의 압력이 급격히 변동하면서 배관 계통 전체에 강한 진동이 발생했다.
쿠구구궁.
벽면에 고정되어 있던 철제 발판과 기어 축들이 불규칙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검객의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 그의 완벽하던 무게 중심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0.1초의 균열. 하지만 백시우에게는 그 틈이면 충분했다.
"무슨 짓을……!"
검객이 비로소 상황의 이상함을 감지하고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이미 전장의 주도권은 백시우의 두뇌로 넘어간 뒤였다.
백시우는 뺨에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은 채,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검객을 응시했다.
"이 방의 설계자는 완벽주의자였지만, 유지 보수에는 소질이 없었나 보군."
살의로 가득 찬 칼날보다 빠른 것은, 공간의 물리적 규칙과 화학적 성질을 지배하는 논리였다. 백시우는 이미 이 밀실 전체를 자신을 위한 거대한 역함정으로 재구축해 놓았다.
검객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러나 그의 신체는 이미 살인이라는 관성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는 백시우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잔머리 굴리지 마라!"
검객이 조소가 섞인 기합을 터뜨렸다. 그는 백시우의 머리를 단숨에 베어버리기 위해 격정적으로 뛰어올랐다. 그의 단단한 전술화가 디딘 곳은, 방금 전 백시우가 스프링클러 밸브를 눌러 압력을 교란해 놓은, 고정 볼트가 느슨해진 철제 발판이었다.
철제 발판이 도약대의 역할을 채 하기도 전에, 비정상적인 유격으로 인해 아래로 덜컥 내려앉았다.
검객의 도약 궤도가 허공에서 꼴사납게 뒤틀리는 순간이었다.
공중에서 중심을 잃은 검객의 몸이 기괴하게 꺾였다. 뼈와 인대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는 불쾌한 파찰음이 그의 전신에서 울렸다. 그럼에도 사내는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대신, 본능적으로 검끝을 바닥으로 우겨넣어 충격을 흡수하려 했다.
스르릉!
빙판을 지치는 듯한 예리한 마찰음과 함께 도검이 콘크리트 바닥을 깊게 긁어내렸다. 불꽃이 비산하며 사내의 검은 전술 마스크 위로 흩어졌다.
임다혜는 그 반동을 틈타 바닥을 굴렀다. 그녀의 손끝이 깨진 타일 조각을 쓸고 지나가며 붉은 낙인을 남겼다. 거친 호흡을 토해내던 그녀가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허리춤의 보조 파우치를 더듬었다. 탄창을 찾는 다급한 손길바람에 파우치 깊숙한 곳에 박혀 있던 작은 물건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구르다 백시우의 구두굽 끝에 툭, 걸쳤다.
그것은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아주 평범한 플라스틱 약병이었다.
라벨은 이미 닳아 없어져 백색의 표면만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백시우의 망막에 투영된 그 정방형의 약병 형태와 상단의 특유의 이중 안전 마개 구조는 뇌리에 박힌 특정 기억을 자극했다. 판게아 그룹의 특수 피험자들에게만 지급되던 뇌신경 안정제, 'P-안정제'의 전용 용기였다.
왜 강력계 형사인 그녀의 주머니에서 판게아의 극비 의약품이 나오는가.
질문이 싹을 틔우기도 전에, 검객의 신형이 다시 한번 솟구쳤다. 사내는 무너진 균형 속에서도 왼손을 뻗어 중앙 제어 장치의 거대한 황동 기어 축을 붙잡으려 했다. 몸을 지탱해 다시 한번 도약하려는 살인 청부업자 특유의 간결한 신체 제어였다.
그 황동 기어는 거짓 추리실의 심장부로 통하는 주 메커니즘이었다.
‘지금이다.’
백시우의 안 깊은 곳에서 한스가 비웃음을 흘렸다.
감압실 천장 기어 축과 연동된 이 방의 중앙 구동부는 겉보기엔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스의 공간 설계적 통찰은 이미 그 톱니바퀴들의 이빨 사이에 존재하는 치명적인 유격을 계산해 낸 상태였다. 정교하게 맞물린 것처럼 보이는 기어들은 톱니의 마모를 방지하기 위해 매 회전 주기마다 정확히 '12초의 빈틈', 즉 회전이 완전히 정지하는 지연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12초의 침묵이 끝나고 기어가 역방향으로 맞물려 들어가는 임계점이었다.
"잡지 마!"
백시우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검객의 장갑 낀 손이 황동 기어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철컥.
기계적인 신호음이 방 내부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12초 동안 죽어 있던 거대한 강철의 이빨들이 마침내 서로의 아가리를 맞물리며 무지막지한 유압의 힘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우득, 으드득!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거스를 수 없는 물리적인 압착력이 검객의 손목을 덮쳤다. 강철과 뼈가 마찰하며 자아내는 끔찍한 파쇄음이 사방벽을 두드렸다. 검객의 목구멍에서 짐승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검은 마스크 틈새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와 회전하는 기어 표면을 붉게 적셨다.
사내의 손목은 이미 기어 뭉치 안으로 반쯤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이 짓개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오진우가 길러낸 전문 암살자였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이 짓눌려 가는 극통 속에서도 왼손을 움직여 허리춤에 매달린 검은 색의 소형 원통을 뽑아 들었다.
찰칵, 하는 가벼운 기계음과 함께 원통의 끝에서 백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학식 마그네슘 점화기였다.
"미친 자식……."
임다혜가 핏기가 가신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이미 방 안은 백시우가 파괴한 배관에서 흘러나온 디메틸 에테르 가스로 가득 차 있었다. 코를 찌르는 달콤하고도 썩은 듯한 화학적 잔향이 사방에 진동했다. 이 밀폐된 공간에서 단 한 점의 불꽃이라도 가스층과 접촉하는 순간, 결과는 자명했다.
검객은 기어에 박힌 오른팔을 포기하겠다는 듯,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백시우를 향해 광기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같이 가자, 아흔아홉 번째."
사내의 왼손이 점화기를 바닥의 가스 누출 지점을 향해 사정없이 내리던졌다.
백색의 불꽃이 가스의 기류를 타고 허공을 가르는 순간, 백시우의 동공 속에서 모든 사물의 움직임이 극도로 느려지기 시작했다. 솟구치는 불꽃의 궤적,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임다혜의 질겁한 눈동자.
그 붉은 불꽃의 반영 속에서, 잃어버렸던 첫 사건의 단편이 다시 한번 유령처럼 고개를 들었다.
불타오르는 거울방.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뻗던, 지금의 임다혜와 똑같은 얼굴을 한 여자의 실루엣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