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머의 붉은 숫자가 고작 2초를 남겨두고 명멸했다. 찰나의 순간, 백시우는 손가락 끝에 와닿는 키패드의 차가운 촉감을 느끼며 검은 금속판 위에 여덟 자리의 난수를 내리눌렀다.
‘P0990410.’
그의 손목에 새겨진 거친 흉터, 그리고 시체 청소부의 도구함에서 보았던 낙인이 차가운 기계의 입력 창 속에서 하나의 이정표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철컥, 하는 둔탁한 금속성 파열음과 함께 사납게 닫히던 비상 격벽이 멈추어 섰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흡기구가 역류하며 먼지 섞인 산소를 뿜어냈다. 폐부를 찌르는 서늘한 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었다.
살았다, 고 안도할 틈은 없었다.
목덜미를 움켜쥔 아귀힘이 목줄기를 사정없이 조여 왔다. 가죽 장갑을 낀 임다혜의 손가락이 백시우의 셔츠 깃을 이기적으로 구겨 잡았다. 이마에 닿아 있는 리볼버의 총구는 미세하게 흔들리면서도, 조준점을 단 1밀리미터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말해.”
임다혜의 목소리는 벼려진 칼날 같았지만, 그 끝은 가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숨결이 백시우의 뺨에 닿았다.
“네가 왜 우리 지부 비밀 수사관들을 죽인 피의자 백시우의 얼굴을 하고 있지? 대답해. 당장 머리통을 날려버리기 전에.”
그녀의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검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백시우는 그 검은 자위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공포를 읽어냈다. 그것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던 사법적 정의와 공적 의무감이, 눈앞에 나타난 기괴한 생존자라는 모순 앞에서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
백시우는 손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저 이마를 짓누르는 총구의 압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네 손가락.”
백시우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공기 정화 장치가 돌아가는 기계음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의 격앙된 떨림. 하지만 조준은 흐트러지지 않아. 넌 지금 사적인 분노로 날 죽이려는 게 아니야. 눈앞의 인물이 네 동료들을 도륙한 괴물이라는 확신, 그리고 그 괴물을 법의 이름으로 단죄해야 한다는 지독한 의무감 때문이지.”
“닥쳐. 프로파일링 따위로 빠져나갈 생각 마.”
“그 지부 수사관들.”
백시우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총구가 그의 이마 가죽을 파고들며 둥근 자국을 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살해당한 현장의 소독제 냄새를 기억하나? 피비린내를 지우기 위해 사용된 락스와 페놀계 화합물의 완벽한 배합 비율. 어떠한 지문도, 표피 조각도 남기지 않은 정교한 진공 청소. 그건 단순한 살인마의 짓이 아니야. 흔적을 지우는 데 평생을 바친 ‘전문가’의 솜씨지.”
백시우의 눈동자 한구석이 기이하게 팽창했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시체를 표백하는 데 광적인 집착을 보였던 샤를의 기억이 수면 위로 얇은 거품을 일으키며 떠올랐다.
화장실 타일 틈새의 곰팡이를 닦아내던 어머니의 거친 손길. 붉은 피가 하얀 염소산나트륨 수용액과 만나 부르터 오르며 무색의 기체로 증발하던 기괴한 풍경.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순간적으로 모호해지며, 백시우의 머릿속에 차가운 타르 냄새가 진동했다.
그는 간신히 자아의 끈을 부여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 전문가의 이름은 샤를.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인격이다.”
임다혜의 눈살이 단단히 찌푸려졌다.
“다중인격? 그따위 얄팍한 핑계로 사법 처벌을 피하겠다는 수작이냐?”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지.”
백시우는 자신의 왼쪽 손목을 들어 올렸다. 셔츠 소매가 걷혀 올라가며, 거칠게 짓이겨진 흉터 아래로 기이하게 박힌 금속 낙인이 드러났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소형 칩의 흔적. 그 표면에는 ‘P-099’라는 문자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건 판게아 그룹의 마인드 해킹 백도어 실험체 표식이다. 난 내 기억을 잃었다. 내 안의 괴물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내가 진짜로 네 동료들을 죽인 살인마인지, 아니면 그 음모를 파헤치려다 뇌를 난도질당한 프로파일러인지 나조차 알지 못해.”
그는 임다혜의 떨리는 총구를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밀어내며 덧붙였다.
“하지만 명확한 건 하나 있어. 네가 쫓는 진짜 설계자 오진우는 지금 이 밀실 너머에서 우리 둘 다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넌 날 사법적으로 단죄하고 싶겠지. 그렇다면 더더욱 여기서 나와 함께 걸어가야 해. 내가 진짜 괴물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날 살려서 법정에 세워야 할 테니까.”
지독하리치만큼 차갑고 이성적인 분석이었다. 도덕적 신뢰가 무너진 수사관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실리적인 논거.
임다혜는 입술을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꽉 깨물었다. 그녀는 백시우의 눈에서 광기 대신, 스스로의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구도자의 집요함을 읽어냈다.
철컥.
그녀가 마침내 리볼버의 공이치기를 내렸다. 총구를 거두는 그녀의 손끝에는 지독한 불신과 타협의 냄새가 엉겨 붙어 있었다.
“오해하지 마, 백시우. 네 숨통을 붙여두는 건 오직 내 손으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니까. 조금이라도 수작을 부리면 그 즉시 네 뇌를 벽에 뿌려버릴 줄 알아.”
“현명한 선택이다.”
백시우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의 이성은 여전히 바늘 끝처럼 날카로웠지만, 이미 인격을 전이했던 대가로 뇌 중심부에서 시작된 미약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조여 오고 있었다. 아껴야 한다. 오리지널 자아의 마모 시계는 멈추지 않고 흘러가고 있으니까.
두 사람이 감압실의 무거운 철문을 밀고 전진하자, 세 번째 구역인 ‘추리 보관실’로 향하는 통로가 나타났다. 그 통로의 초입, 견고한 콘크리트 벽면에 매립된 검문소 보안 포스기 화면이 지직거리며 푸른 안개를 뿜어냈다.
단조로운 기계음과 함께 액정 화면에 녹색 글씨가 한 줄씩 현출되었다.
[수칙 제05조: 통로의 조명은 일정한 주기로 소등됩니다. 불을 켠 채 이동하는 침입자는 자동 사살 장치의 표적이 됩니다. 소등이 시작되면, 즉시 벽면에 밀착하여 3초간 정지 상태를 유지하십시오. 규칙을 준수하는 자만이 검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화면이 꺼짐과 동시에, 길게 뻗은 통로 천장의 형광등이 거칠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지지직, 탁.
어둠이 들어차기 직전의 불길한 전조.
임다혜가 본능적으로 가장 가까운 콘크리트 벽면으로 몸을 붙이려 발걸음을 옮겼다. 사법 수사관으로서 매뉴얼과 규칙을 준수하려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멈춰!”
백시우가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낚아챘다.
“무슨 짓이야!”
임다혜가 소리치며 반발하려 했지만, 백시우의 시선은 이미 콘크리트 벽면 하단, 아주 미세하게 솟아오른 회색 실리콘 마감재의 틈새를 꿰뚫고 있었다.
그것은 타인이 보기에 그저 시공 불량으로 흘러넘친 실리콘 조각에 불과해 보였다. 하지만 프로파일러의 눈에는 달랐다. 미세하게 묻은 붉은색 녹가루, 그리고 벽면 내부에서 아주 작게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
벽면에 몸을 밀착시키는 순간, 체중의 압력이 벽면 패널을 누르게 된다. 그리고 패널 뒤에 숨겨진 중력 격발 장치가 작동하여 천장에서 수백 킬로그램의 강철 압착판이 떨어지게 설계된 이중의 덫이었다.
‘소등 시 벽에 붙어 3초간 서 있을 것.’
이 규칙은 침입자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수칙이 아니었다. 인간이 소등이라는 극단적인 공포 상황에서 가장 직관적이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벽면 밀착’이라는 심리를 역이용한 가학적인 살인 장치였다.
“벽에 닿는 순간 짓눌려 죽는다.”
백시우의 안광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그는 소등되기 직전의 마지막 0.5초 동안, 통로 우측 모퉁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각지대를 포착했다. 그곳은 벽면 압력 감지 패널이 설치되지 않은, 배수관 파이프가 지나가는 돌출부였다.
“뛰어!”
백시우는 가차 없이 임다혜의 가냘픈 허리를 거칠게 감싸 쥐고 바닥을 굴렀다.
탁!
동시에 통로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지며 완전한 암흑이 내려앉았다.
거의 동시에, 그들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콘크리트 벽면 전체가 우지끈하는 비명과 함께 거대한 강철 장치에 의해 짓눌리는 파열음이 사방을 진동시켰다. 먼지와 시멘트 가루가 어둠 속에서 폭풍처럼 흩날렸다.
쿠구구궁!
만약 수칙대로 벽에 몸을 붙이고 3초 동안 서 있었다면, 그들의 육체는 지금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기떡이 되어 벽면에 발려 있었을 터였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거친 호흡만이 엉켜 들었다. 임다혜는 자신의 몸을 덮친 백시우의 가슴팍에 손을 얹은 채, 차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 닿은 백시우의 심장 박동은 기이할 정도로 차분하고 일정했다.
“말했지.”
백시우가 그녀의 귀밑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곳의 규칙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게 아니라, 가장 비참하게 죽이기 위해 설계된 모순의 덩어리라고.”
이윽고 천장의 압력 장치가 서서히 역회전하며 오작동을 멈추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사방을 짓누르던 붉은 경고등의 잔영이 바닥의 먼지 위로 무겁게 침전되었다.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감각이 피부를 자극하기도 전에.
쾅.
쾅.
어둠이 내려앉은 통로 너머, 굳게 닫혀 있던 철제 문 뒷편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인간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의 콘크리트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무게감. 가죽이나 고무가 아닌, 단단한 강철 부츠를 신은 정체불명의 괴한이 어둠을 뚫고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쿵, 쿵, 쿵.
일정한 주기로 복도를 울리는 그 정적의 파괴자는, 마치 이 밀실의 진짜 지배자가 누구인지 선언하는 듯했다. 백시우는 눈을 감았다. 뇌리 속에서, 한스의 오만방자한 비웃음 소리가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진동은 바닥의 콘크리트를 타고 올라와 발바닥을 거쳐 척수까지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임다혜의 손가락이 무의미하게 리볼버의 그립을 쥐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총신이 어둠 속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며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백시우는 눈을 감은 채 소리의 파형을 분석했다.
일정한 간격. 왼쪽 발을 디딜 때마다 아주 미세하게 끌리는 자형의 마찰음. 쇠가 쇠를 갉아먹는 듯한 그 기괴한 소리는 단순한 보행이 아니었다. 거대한 무게를 가진 존재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며 좁혀오는 포위망이었다.
머릿속에서 갑작스러운 이명이 일었다.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격통과 함께, 눈앞의 어둠이 하얗게 번뜩이며 갈라졌다.
*하얀색 타일 바닥. 코를 찌르는 포르말린 냄새.* *한 남자가 하얀 가운을 입은 채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지루하다는 듯 입김으로 안경알을 닦아내고는, 습관적으로 주머니에서 낡은 만년필을 꺼내 손가락 사이로 빙글 돌렸다. 그리고는 벽면에 설치된 유압식 비상 해치의 잠금 패널을 아무런 생각 없이 세 번, 탁, 탁, 탁,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지루한 대기 시간 동안 반복되던 한 연구원의 일상적인 버릇.*
백시우의 눈이 번쩍 떠졌다.
과거의 파편이 현재의 어둠 위로 겹쳐지며 흐릿하게 흩어졌다. 방금 뇌리를 스친 것은 망각된 기억의 찌꺼기였다. 그 하얀 복도는 판게아의 실험실이었고, 그 연구원이 두드렸던 잠금 패널은 지금 그들의 우측 벽면에 매립된 배수관 점검구의 규격과 정확히 일치했다.
판게아 그룹이 설계한 모든 시설의 유압식 해치에는 초기 공정상의 결함이 존재했다. 내부 압력이 급격히 변동할 때, 수동 바이패스 레버를 특정한 리듬으로 세 번 타격하면 내부 제어 장치가 기계적 오작동을 일으키며 강제로 개방된다는 설계 오류.
“이쪽이다.”
백시우가 임다혜의 팔목을 낚아채며 벽면의 어두운 구석으로 몸을 날렸다.
“뭐 하는 거야! 저기서 뭐가 오고 있…….”
“닥치고 내 손끝만 봐.”
백시우의 손가락이 어둠 속에서 차가운 철제 해치의 유압 밸브를 찾아냈다. 그의 검지가 단단한 금속 표면을 정확한 간격으로 내리쳤다.
탁. 탁. 탁.
치익, 하는 거친 감압음과 함께 두꺼운 철판으로 된 점검용 해치가 아주 미세하게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복도 끝의 어둠을 찢고 거대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결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괴물이었다. 비정상적으로 거대하게 부풀려진 상체는 군용 방호복의 잔해로 덮여 있었고,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강철 가면이 용접되어 있었다. 괴한의 오른손에는 모터가 빠진 거대한 콘크리트 절단용 원형 톱날이 들려 있었다. 녹슨 톱날의 끝에서 정체불명의 검붉은 액체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괴물이 고개를 돌렸다. 강철 가면의 틈새로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백시우와 임다혜를 향해 고정되었다.
“들어 가!”
백시우가 임다혜를 좁은 점검구 틈새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몸이 간신히 안쪽의 좁은 유지보수 통로로 들어서는 순간, 뒤편에서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쉬이익!
거대한 원형 톱날이 허공을 가르며 백시우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금속이 벽면에 부딪히며 사나운 불꽃을 뿜어냈다. 사방으로 튀는 불꽃의 잔상이 백시우의 동공에 낙인처럼 박혔다.
백시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해치 안쪽으로 굴러 들어갔다. 그리고 벌어진 철문을 향해 사정없이 발길질을 날렸다.
쾅!
유압식 해치가 완전히 맞물려 닫히는 순간, 바깥쪽에서 무시무시한 충격이 철문을 강타했다.
쿠웅!
두꺼운 강철판이 안쪽으로 둥글게 휘어지며 볼트가 튕겨 나갔다. 틈새로 차가운 먼지가 뿜어져 나왔지만, 다행히 잠금장치는 버텨냈다.
어둡고 비좁은 점검로 내부. 사방은 낡은 파이프와 전선 더미로 가득 차 있었다. 임다혜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방금 전 자신들이 마주한 존재의 정체를 뇌리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그건…… 대체 뭐지? 인간이 아니야. 그런 덩치는 존재할 수 없어.”
백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해치의 찌그러진 틈새 사이로 들어오는 미세한 불빛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철문 너머에서 괴물이 쇠를 긁는 듯한 기괴한 소리를 내며 멈추어 서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무겁고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물러선 것이 아니라, 이 점검로의 반대편 출구로 우회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백시우가 주머니에서 부러진 만년필 라이터를 꺼내 불꽃을 켰다. 주황색 불빛이 좁은 내부를 비추었다.
바닥에는 녹슨 배관과 함께, 오랫동안 방치된 듯한 먼지 쌓인 서류 가방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백시우는 본능적으로 그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방의 가죽 표면은 썩어 문드러져 있었지만, 잠금장치 부분에 새겨진 황동 플레이트는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 플레이트에는 날카로운 송곳으로 긁어 만든 듯한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P-098 / 폐기 대상]
백시우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자신의 손목에 새겨진 ‘P-099’라는 낙인보다 단 하나 앞선 숫자.
방금 전 자신들을 습격했던 그 기괴한 거구의 괴물. 그 괴물이 걸치고 있던 방호복의 가슴팍에도, 이와 똑같은 금속 마크가 용접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그 괴물은 단순한 침입자가 아니었다. 자신보다 먼저 이 밀실에 갇혀, 이성이 마모된 끝에 괴물로 변해버린 판게아의 ‘선행 실험체’였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머지않아 저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묵시록적인 결론이 그의 목을 조여 왔다.
그때, 침묵을 지키던 임다혜가 바닥에 떨어진 가방 내부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서서히 손을 뻗었다. 썩은 가죽 틈새로 삐져나온 것은, 피로 얼룩진 한 장의 오래된 수사 보고서였다.
보고서의 첫 장에는 백시우의 젊은 시절 증명사진과 함께, 붉은색 스탬프로 잔인한 판결문이 찍혀 있었다.
[피의자: 백시우 / 혐의: 사법 공조관 4인 연쇄 살인 및 방화 극비 주도]
임다혜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백시우의 얼굴에 멎었다. 조그만 불꽃 너머로,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불신이 다시금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