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격벽이 박살 남과 동시에 오염 공기가 정화되고 임다혜의 목을 겨누고 있던 가압 피스톤 기어의 날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그녀의 목덜미로 다가간다.
강철 지지대가 천장의 어둠을 찢고 내려오는 속도는 타협이 없었다. 톱니와 톱니가 맞물려 서걱거리는 소리는 뼈를 가는 맷돌 소리를 닮아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임다혜의 눈동자에 붉은 경고등 빛을 반사하며 하강하는 거대한 반원형 칼날이 담겼다. 그녀는 피하려 했으나, 찢어진 바지 밑단 사이로 드러난 발목이 이미 산산조각 난 유리 더미에 깊게 박혀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이 무의미하게 바닥을 긁었다.
백시우는 젖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허파를 찌르는 차가운 산소 뒤로, 뇌간을 직접 타격하는 불쾌한 조임이 느껴졌다. 저 장치는 멈추지 않는다. 설계자가 심어 놓은 ‘안전 관리 수칙’의 기만은 매 순간 인간의 본능적인 회피 기동을 역이용하도록 정렬되어 있었다. 직관적으로 몸을 웅크리거나 뒤로 물러서는 순간, 하강 궤적에 놓인 고압 슬링이 목뼈를 완벽하게 분쇄할 터였다.
그것을 멈추려면 기계적 구조를 안쪽에서부터 비틀어 열어야 했다. 정밀한 물리적 덫의 역학을 꿰뚫어 보는 눈. 인간의 뼈가 으스러지는 가압 한계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설계자의 감각이 필요했다.
머릿속 깊은 곳, 어두운 늪 아래에 잠겨 있던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한스.’
백시우가 내면의 심연을 향해 침묵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동시에 관자놀이를 타고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렬한 두통이 몰려왔다. 뇌세포의 가장자리가 가늘게 타들어 가며 재로 변하는 감각. 자아의 영토가 강제로 뜯겨 나가고, 그 빈자리에 타인의 뒤틀린 이성이 쐐기처럼 박히는 고통이었다. 뇌 손상의 전조 증상인 금속성 비린내가 혀끝에서 맴돌았다. 이성을 내어주는 대가는 언제나 가혹했다. 한 번 깎여 나간 본래의 자아는 두 번 다시 온전한 형태로 복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백시우는 이 의식의 단절을 용인했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저 눈앞의 여자를 살려두어 제 손목의 낙인과 사라진 기억의 실마리를 쥐기 위해서.
두 통째의 모래시계가 뒤집혔다.
10분.
그 안에 이 인격을 돌려보내지 못하면, 백시우라는 껍데기는 온전히 한스라는 괴물에게 침탈당한다.
머리 각도가 기괴하게 꺾이며 백시우의 입꼬리가 비정상적인 궤적으로 솟아올랐다. 그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묵직한 자기불신이 걷히고, 그 자리에 타인의 지독한 오만함과 차가운 미학적 광기가 들어찼다.
“아아, 이 조잡하고 천박한 철제 쓰레기는 대체 뭐지?”
백시우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층 가볍고, 깃털처럼 나풀거리면서도 뼈마디를 시리게 만드는 음색이었다.
각성한 설계자, 한스.
그는 하강하는 가압 피스톤 기어를 바라보며 혀를 쯧 찼다. 임다혜가 공포에 질려 숨을 들이마시는 찰나, 백시우의 육체를 지배한 한스는 아주 느긋하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신발 밑창 아래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경쾌한 리듬을 만들었다.
“이런 구시대적인 가위형 슬링이라니. 오진우, 그 가증스러운 모방꾼 자식이 드디어 밑천을 드러낸 모양이군. 예술적 깊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
한스는 천장의 어둠 속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 윤척 기어들의 회전 주기를 응시했다.
머릿속에서 복잡한 기하학적 수식들이 실시간으로 그려졌다. 안전 관리 수칙 안내서에 적힌 조항들이 한스의 뇌 안에서 잘게 분해되어 흩어졌다. ‘순지 무조건 반응’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된 기어의 회전 매뉴얼. 하지만 그것은 피해자의 시선을 완전히 묶어두기 위한 심리적 트릭에 불과했다.
실제 천장 기어의 축은 기계 공학적인 한계로 인해 미세한 유격을 가지고 있었다.
“초당 1.2바퀴의 회전 속도. 기압 실린더가 최하단에 도달하기 직전, 내부 압력을 배출하기 위해 밸브가 열리는 지점.”
한스가 차갑게 웃었다. 그의 눈가에 깃든 잔혹한 흥분감이 시우의 얼굴을 기괴하게 일그러뜨렸다.
“매뉴얼의 표기와는 달라. 이 허술한 기계 더미에는 12초의 확실한 정지 빈틈이 존재하지. 기어 축의 유격이 벌어지는 바로 그 찰나의 순간 말이야.”
그 12초의 유격이야말로 설계자가 숨겨둔 완벽한 오차이자, 이 덫을 영구히 고장 낼 수 있는 유일한 아킬레스건이었다.
칼날은 이미 임다혜의 머리 위 30센티미터 앞까지 내려와 있었다. 가압 피스톤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유압유 냄새와 쇠붙이의 열기가 그녀의 얼굴을 덮쳤다. 죽음의 감각이 피부로 전해지자 그녀의 호흡이 완전히 멎었다.
“비켜……! 당장 비키라고!”
임다혜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소리쳤지만, 한스는 그녀의 비명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처절한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 즐기는 듯 입술을 둥글게 말아 휘파람을 불었다.
그 순간, 백시우의 심연 깊은 곳에서 본래의 이성이 요동쳤다.
‘장난은 그만해, 한스. 당장 저걸 멈춰.’
자신의 육체를 매개로 살인을 감상하려는 내면 인격의 가학성에 백시우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의식의 주도권을 두고 두 자아가 뇌 속에서 격렬하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뇌신경이 양쪽으로 찢기는 듯한 통증이 백시우의 전신을 지배했다.
“윽……!”
백시우는 이마에 굵은 핏줄을 세우며 전신 근육을 단단하게 경직시켰다. 한스의 광기 어린 웃음기가 그의 얼굴에서 지워지고, 극단적인 인내의 표정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오른팔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르며 덜덜 떨렸다. 제어권을 완전히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백시우는 자신의 모든 의지력을 끌어올려 한스의 움직임을 강제 통제했다.
“쳇, 성질도 급하군. 관객이 이렇게 흥분하면 무대의 격이 떨어지는데 말이야.”
한스가 불쾌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의 시선이 가압 피스톤 지지대의 가장 깊숙한 밑둥, 붉은 페인트가 칠해진 보조 볼트 하나에 고정되었다. 그곳은 전체 하강 하중을 지탱하는 유일한 물리적 임계점이었다. 일반적인 인간의 눈에는 그저 기계를 고정하는 무수한 나사 중 하나로 보이겠지만, 덫의 해부학자인 한스의 눈에는 그것이 거대한 거인의 숨통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남은 시간은 단 3초.
칼날의 끝이 임다혜의 깃바람을 스치며 그녀의 셔츠 카라를 찢었다.
백시우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의 손에는 이전 구역에서 챙겨 두었던 무겁고 투박한 금속제 골절기가 쥐어 있었다.
한스의 정밀한 공간 지각력과 백시우의 필사적인 신체 제어력이 극적인 타협점을 찾은 순간이었다.
깡-!
고막을 찢는 듯한 금속음이 감압실 내부에 울려 퍼졌다.
골절기의 끝부분이 정확하게 보조 볼트의 머리를 때렸다. 오차는 단 1밀리미터도 없었다. 기어가 맞물려 돌아가며 발생하는 12초의 지연 시간, 그 잔여 구조적 유격이 발생하는 정확한 타이밍에 가해진 타격이었다.
지지대 밑둥에 박혀 있던 잠금 못이 엄청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콰아아앙-!
기어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며 천장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강하던 거대 칼날 구조물이 궤도를 이탈하여 왼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주축을 잃은 피스톤 기어들이 서로를 갉아먹으며 불꽃을 사방으로 튀겼다. 고압 유압 호스가 터지며 붉은 오일이 안개처럼 분사되었다.
임다혜의 머리 바로 위를 스쳐 지나간 칼날은 그녀의 어깨 깃만을 날카롭게 잘라낸 채, 그대로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콰직!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힌 거대 칼날이 완전히 두 동강 나며 사방으로 쇠 파편을 흩뿌렸다. 찢어진 쇠붙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천장에서는 끊어진 체인과 기어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완벽한 파괴였다.
설계자가 배치한 가장 위협적인 물리적 덫이, 단 하나의 보조 볼트를 정확하게 파쇄당함으로써 무력한 고철 더미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하하…… 아하하하! 봤나? 오진우! 이 조잡한 기계식 인형극의 결말을!”
백시우의 입을 빌린 한스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광소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백시우는 이마를 짚으며 바닥으로 무릎을 꿇었다. 한스의 인격이 강제로 가라앉으며, 찢겨 나간 자아의 틈새로 형언할 수 없는 피로감과 극심한 자기불신이 밀려들었다. 뇌의 연수 부근이 얼음물에 담긴 것처럼 시려 왔다. 이번 전이로 인해 그의 이성은 또다시 돌이킬 수 없는 마모의 단계를 건넜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서 있는지에 대한 경계선이 조금 더 흐려졌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백시우의 시야가 붉게 번졌다.
비상등의 붉은 빛 사이로, 바닥에 쓰러져 있던 임다혜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어깨는 잘려 나간 옷깃 사이로 하얗게 드러나 있었고, 뺨에는 튀어 오른 유압유와 피가 섞여 기괴한 무늬를 그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 발밑에 처박힌 칼날 조각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백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단순한 경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깊은 어둠 속에서 마침내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의 살기에 가까웠다.
임다혜는 비틀거리면서도 극도의 집념으로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녀의 손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권총을 향해 뻗어 나갔다.
백시우는 그것을 제지할 힘이 없었다. 한스의 전이 세션이 종료된 직후의 육체는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다.
철컥.
임다혜가 권총의 슬라이드를 당겨 약실에 탄환을 장전했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와 백시우의 깃덜미를 한 손으로 거칠게 움켜쥐었다. 젖은 가죽 장갑의 감각이 백시우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녀의 아귀힘은 엄청났다. 백시우의 상체가 강제로 들려 올려졌다.
차가운 총구가 백시우의 이마 정중앙에 정확하게 밀착되었다.
임다혜의 숨결이 백시우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와 원망, 그리고 차갑게 식은 증오로 터질 듯이 팽팽했다.
“드디어…… 드디어 잡았어.”
그녀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부드럽게 감겼다.
“말해. 네가 왜 우리 지부 비밀 수사관들을 처참하게 찢어 죽인 피의자 백시우의 얼굴을 하고 있지? 네놈이…… 그 살인마 새끼지?”
차가운 철제 총구가 이마를 짓누르는 감각은 기묘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그 서늘한 압박감은 붉은 사이렌이 울리는 감압실의 비상등 너머, 빗소리가 창문을 두드리던 서울지방경찰청 취조실의 기억을 불쑥 소환해 냈다.
당시 선배 수사관이었던 강 형사는 책상에 걸터앉아 손톱 끝으로 생수병의 비닐 라벨을 신경질적으로 벗겨내고 있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지루함을 견디기 위한 제3자의 일상적인 몸짓. 하지만 그가 뜯어낸 얇은 플라스틱 라벨의 안쪽 면에는 가느다란 수성펜으로 ‘P-099’라는 문자가 조밀하게 적혀 있었다. 강 형사는 시우를 보지도 않은 채, 그 라벨을 손가락 끝으로 둥글게 말며 나지막이 읊조렸었다.
『시우야, 이 수술은 구원이 아니야. 네 안의 괴물들을 가둘 더 큰 감옥을 짜 넣는 거지.』
축축한 아스팔트 냄새와 오래된 서류 상자의 먼지 바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러나 찰나의 환각은 이내 가압 피스톤이 파괴되며 뿜어낸 독한 유압유 냄새와 디메틸 에테르의 단내에 쓸려 내려갔다. 현실의 감각이 다시 이마의 총구를 타고 선명하게 복원되었다.
백시우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살인마인지, 아니면 그들을 쫓던 프로파일러인지 알 수 없는 극단의 자기불신 속에서도, 그의 뇌는 상대의 미세한 신체 반응을 정밀하게 해부하고 있었다.
임다혜의 검지는 방아쇠 울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었지만, 미세하게 위쪽을 향해 사선으로 꺾여 있었다. 당장 격발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일촉즉발의 긴장을 유지해 상대의 자백을 강제하려는 사법 공조 수사관 특유의 통제 본능이 읽혔다. 그녀의 턱 끝 근육이 잘게 떨리는 것은 분노 파동의 잔해이자, 동시에 눈앞의 인물이 자신이 알던 ‘괴물’과 일치하는지에 대한 지독한 혼란의 방증이었다.
“내가…… 그들을 죽였는가.”
백시우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감정이 완전히 소거된 목소리가 부서진 기계 잔해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 역시 그 답을 찾기 위해 이 지옥의 주랑을 건너는 중이다.”
“개소리 마.”
임다혜가 총구를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피부가 밀려나며 뼈에 닿는 감각이 생생했다.
“네놈의 그 잘난 분석가 흉내에 속아 넘어갈 단계는 지났어. 현장에 남겨진 살해 방식, 사체를 화학적으로 표백해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수법은 네놈 내면의 또 다른 괴물이 저지른 짓이야. 부정할 수 없을 텐데?”
“표백법이라.”
백시우의 입꼬리가 가볍게 비틀렸다. 그것은 샤를의 인격이 남긴 흔적이었을 터다. 하지만 백시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찢어진 소매 안쪽, 손목 수갑 고리에 걸려 있는 낡은 무전기 마이크 그릴을 응시했다.
그 그릴 뒤편에 새겨진 미세한 점자 형태의 흠집들. ‘거울의 프레임 모서리를 응시하라’는 은밀한 조언이 새겨진 그 고장 난 무전기. 그것은 임다혜 역시 설계자 오진우의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놀아나고 있음을 뜻하는 명백한 표식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만 묻지 수사관.”
백시우의 차가운 시선이 임다혜의 젖은 눈동자를 꿰뚫었다.
“그들이 죽어갈 때, 현장의 온도는 영하 4도였고 폐부에서는 물이 아닌 디메틸 에테르가 검출되었겠지. 맞나?”
임다혜의 눈꺼풀이 크게 파르르 떨렸다. 총구를 쥔 그녀의 손목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외부에는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오직 부검 감정서의 극비 분류 탭에만 기록되어 있던 비공개 정보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이 방의 구조 자체가 그들의 사형 집행장을 정교하게 재현한 오마주이니까.”
백시우가 깨진 가압 피스톤의 파편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설계자는 내가 이 덫을 파괴하도록 유도했어. 내 안의 인격들을 하나씩 일깨워 본래의 이성을 마모시키고, 결국에는 완전히 미쳐버린 괴물로서 당신 앞에 서게 만들기 위해. 지금 당신이 당기는 방아쇠는, 결국 오진우가 완성하려는 마지막 시나리오의 낙장 불입 버튼이 될 뿐이다.”
그 순간, 머리 위의 붉은 경고등이 일제히 소등되었다.
동시에 기계음 대신 날카롭고 단조로운 전자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세 번의 짧은 신호음과 세 번의 긴 신호음. 모스 부호의 구조 신호(SOS)를 모방한 기만적인 경고음이었다.
벽면에 설치된 손바닥만 한 액정 모니터가 지직거리며 푸른 불빛을 뿜어냈다. 그 위로 새로운 ‘안전 관리 수칙’이 한 줄씩 각인되듯 떠올랐다.
[수칙 제04조: 밀실의 공기 정화가 완료되면 인접한 ‘거짓 추리실’로의 통로가 개방됩니다. 단, 비상 격벽이 완전히 닫히기 전, 최초 실험체(Subject)의 8자리 고유 식별 코드를 입력하지 않을 시 내부의 모든 산소 공급 라인은 영구 차단됩니다.]
액정 화면 하단에 붉은색 숫자로 구성된 타이머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00:59]
[00:58]
공기가 빠져나가는 미세한 흡기음이 두 사람의 귓가를 자극했다.
임다혜의 시선이 문 옆에 달린 투박한 금속제 키패드로 향했다. 그녀의 호흡이 다시 거칠어졌다. 8자리의 식별 코드. 그것은 본청 수사팀의 데이터베이스에도 존재하지 않던 극비의 난수였다.
백시우는 자신의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흐려진 시야 속에서, 셔츠 소매 아래 가려진 흉터가 욱신거렸다. 날카로운 도구로 거칠게 짓이겨진 피부 조직 위에 새겨진 낙인. 한스의 힘을 빌려 기어를 파괴할 때 보았던 그 금속 표식의 문자.
‘P-099’.
그것은 단순한 제품 번호가 아니었다. 판게아 그룹의 마인드 해킹 실험실에서 자신에게 부여했던 피실험체의 식별 코드이자, 이 밀실의 자물쇠를 여는 유일한 열쇠였다.
하지만 저 코드를 저 키패드에 직접 입력하는 순간, 임다혜는 백시우가 단순한 프로파일러가 아닌 판게아의 더러운 실험체이자 흉악한 인공 인격 수술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터였다.
스스로를 무고하다 증명하려는 갈망과, 스스로가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공포가 그의 목을 조여 왔다.
“50초.”
백시우는 자신을 겨눈 총구를 향해 이마를 한 걸음 더 밀어 넣었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차갑고 집요한 프로파일러의 이성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쏘고 여기서 함께 질식해 죽을지, 아니면 저 문 너머의 진짜 살인마를 잡을지 선택해라.”
임다혜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검지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키패드의 타이머는 가차 없이 다음 숫자를 지워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