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시우의 의도를 직감하지 못한 기습 용병이 조소가 서린 기합을 터뜨리며 그의 머리를 베기 위해 격정적으로 뛰어올라 단단한 철제 발판을 도약대로 삼는다.
공중에 뜬 사내의 신형이 반원을 그리며 낙하하는 궤적은 기괴할 정도로 매끄러웠다. 백시우의 망막이 그 움직임을 조각조각 해체하여 받아들였다. 사내가 도약한 수직 상방, 그곳에는 거대한 강철 기어 프레임 축이 무겁게 버티고 있었다. 정확히 검객의 정수리 바로 위였다.
허공을 가르는 마그네슘 점화기의 백색 불꽃이 디메틸 에테르 가스로 가득 찬 공기를 핥기 직전의 찰나였다.
백시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사내의 검날이 아니라, 천장에서 소리 없이 멈춰 있는 황동빛 톱니바퀴의 유격으로 향해 있었다.
뇌내에서 이성이 깎여 나가는 서늘한 감각이 비명처럼 울렸다. 한스(Hans)의 인격이 전두엽을 잠식하며 남겨놓은 차가운 기하학적 수치들이 백시우의 시야 위로 겹쳐 흘렀다.
'12초.'
그것은 단순한 기계적 결함이 아니었다. 설계자 오진우가 완벽을 기하기 위해 심어 놓은,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틈새였다. 감압실의 천장 기어 축은 무지막지한 하중과 마모를 방지하기 위해 매 회전 주기마다 정확히 12초 동안 회전을 정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안전 수칙 매뉴얼에는 즉각적인 반응만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기계의 뼈대는 정직하게 12초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백시우는 자신의 왼손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가죽 장갑과 소매 사이로 드러난 일그러진 흉터. 그것은 자해의 흔적이 아니었다. 샤를의 구형 도구함 모서리에 깊게 음각되어 있던 표식, 그리고 판게아 연구 일지의 찢어진 페이지에서 목격했던 글자.
[P-099]
그 기호는 그의 살가죽 위에 새겨진 낙인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자신이 판게아 그룹이 자행한 비윤리적 뇌 수술의 아흔아홉 번째 실험체이자, 인위적으로 분열된 인격들을 주입받은 그릇이라는 진실이 뇌리를 난폭하게 관통했다. 스스로가 프로파일러인지 살인마인지 갈망하던 질문의 끝에는, 오직 타인에 의해 조립된 괴물이라는 차가운 사실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아의 마모율이 임계점에 달하며 후두엽이 타들어 가는 통증이 엄습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절망에 침잠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죽어라, 아흔아홉 번째!"
용병의 도끼날이 공기를 찢으며 백시우의 목덜미를 향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자아내는 파공음이 고막을 찔렀다.
백시우는 몸을 뒤틀지 않았다. 대신 오른발을 뻗어 바닥 구석에 처박혀 있던 수동 유압 레버 축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철컥!
무거운 쇠사슬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기어 박스 내부의 압력이 급격히 솟구쳤다. 가속 페달을 밟은 것처럼, 정지해 있던 기어 축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12초.
그 정지 지연 시간이 정확히 제로(0)가 되는 임계점이었다.
공중에서 낙하하던 용병의 검날이 백시우의 깃털 같은 옷자락을 스치며 파고들던 바로 그 순간, 가속된 천장의 기어 톱니가 역방향으로 사납게 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득! 으드득!
백시우가 레버를 밟아 유도한 기계적 궤적은 정확했다. 용병이 베어 내리던 강철 검날의 끝부분이 회전하는 거대 톱니바퀴의 이빨 사이에 깊숙이 처박혔다. 인간의 완력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유압의 회전력이 검날을 타고 사내의 손목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밀실의 벽을 두드렸다.
두꺼운 강철 검날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기어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그 막강한 인장력은 검을 쥐고 있던 사내의 상체까지 천장 방향으로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사내의 어깨관절이 탈구되는 둔탁한 파열음이 방 안을 채웠다. 손에 쥐고 있던 마그네슘 점화기는 가스층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힘없이 낙하하여, 백시우가 미리 발로 차 밀어 놓은 소화수 고인 바닥 위로 틱, 소리를 내며 검게 꺼져 버렸다.
가장 위협적이었던 불꽃이 차갑게 사멸했다.
"이, 이 괴물 같은 자식이……!"
용병이 피가 거꾸로 솟은 얼굴로 절규했다. 오른팔이 기어 프레임과 구겨진 검날 사이에 끼어 완전히 으스러진 상태였다.
백시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사내의 복부를 향해 오른발을 강하게 차 넣었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사내의 신형이 뒤로 꺾이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기어에 끼어 있던 오른팔의 일부가 뜯겨 나가며 붉은 선혈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찰나의 틈을 임다혜가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의 가스관 잔해를 딛고 번개처럼 도약했다. 공중에서 몸을 비튼 그녀의 무릎이 사내의 척추 중앙을 정확히 내리눌렀다.
쿵!
"움직이지 마!"
임다혜의 외침과 동시에 사내의 남은 왼팔이 뒤로 꺾였다. 그녀의 가냘프지만 단단한 손가락들이 사내의 손목과 팔꿈치 관절을 완벽한 각도로 고정했다. 경찰 강력계에서 뼈가 굵은 그녀의 제압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사내는 바닥에 이마를 처박은 채 짐승 같은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백시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섰다. 머릿속에서 한스의 인격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극심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손목의 흉터가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임다혜가 사내를 결박한 채 백시우를 매서운 눈초리로 올려다보았다.
"방금 그 기어…… 일부러 조작한 거지? 멈추는 주기를 미리 알고 있었어?"
백시우는 대답 대신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송 경사의 무전기를 만지작거렸다. 마이크 그릴 뒤편에 거칠게 새겨진 미세한 점자들이 그의 손끝을 자극했다.
[거울의 프레임 모서리를 응시하라.]
임다혜의 동료가 죽어가면서 남긴 마지막 단서. 그것은 이 거짓 추리실 너머에 기다리고 있을 진짜 지옥, '비밀 거울방'에 대한 경고였다.
"이 자들은 오진우의 사냥개들일 뿐이야."
백시우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물기 없는 건조함만이 배어 있었다.
임다혜 밑에 깔린 용병이 피를 토하며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으스러진 오른팔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의 화학물질과 섞여 기괴한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흐흐…… 아흔아홉 번째. 네가 정말로 저 여자와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나?"
사내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너는 그저 오진우의 정신 복제품일 뿐이다.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그 괴물 같은 생각들, 그 정교한 트랩 설계 능력…… 그게 정말 네 것이라고 믿는 건가?"
백시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사내의 말은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기불신의 상처를 정확히 찔렀다.
"이 방 뒤에는 거울의 미로가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서 너는 너 자신의 진짜 추악한 얼굴을 보게 될 거다. 그리고……."
사내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입꼬리를 기괴하게 늘어뜨렸다.
"오진우는 결코 실패작을 살려두지 않아."
그 순간, 사내의 왼쪽 소매 밑단에서 미세한 기계음이 울렸다.
지익, 하는 불길한 고주파음과 함께 사내의 피부 밑에서 푸르스름한 전류가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것은 판게아의 암살자들이 사용하는 비밀 독극 전기 격발 장치였다.
임다혜가 위험을 감지하고 몸을 뒤로 날리려던 찰나, 사내의 온몸이 전기 충격으로 인해 기괴하게 경직되기 시작했다. 사내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거품이 터져 나왔다.
"백시우! 뒤로 물러서!"
임다혜가 비명을 지르며 사내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사내의 소매 끝에서 시작된 푸른 불꽃이 바닥에 고여 있던 디메틸 에테르 배관 누출액에 닿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치이익!
공기 중의 가스가 푸른 불꽃과 반응하며 소름 끼치는 흡기음을 냈다. 밀실 전체의 산소가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압박감이 두 사람의 가슴을 짓눌렀다.
폭발은 눈앞이었다.
산소가 급격히 연소하며 고막을 짓누르는 감압 현상이 먼저 도래했다.
백시우의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퇴로는 이미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로 막혔고, 전방은 용병의 육신과 함께 거대한 화염의 기포로 변해 가고 있었다. 유일한 공간은 거짓 추리실 중앙에 굳건히 버티고 있는 강철 압착 장치뿐이었다.
'과거의 살인마를 지목하라.'
오답을 선택하는 순간 천장의 거대한 철판이 내려와 침입자를 짓누르는 살상 트랩. 설계자가 심어 놓은 기만적인 규칙이었으나, 역설적으로 지금 이 순간 가장 확실한 방벽이 될 수 있는 물리적 구조물이었다.
백시우는 몸을 날리며 다이얼을 아무 숫자로나 사정없이 꺾었다.
철컥, 콰르르릉!
톱니바퀴가 비명을 지르며 맞물렸다. 머리 위에 매달려 있던 수 톤 무게의 무쇠 압착판이 가차 없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백시우는 임다혜의 덜미를 움켜쥐고 압착판 바로 아래, 벽면의 좁은 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엎드려!"
그가 임다혜의 머리를 바닥으로 누름과 동시에, 등 뒤에서 고막을 찢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쿠우우웅!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완전히 하강한 강철판이 바닥과 맞닿아 육중한 밀실을 형성한 찰나, 외부의 디메틸 에테르 가스가 완전히 기화하며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쾅! 콰과광!
강철판 너머에서 몰아치는 열풍과 충격파가 무쇠 벽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두 사람의 몸이 갇힌 좁은 틈새로 틈새 바람 같은 열기가 비집고 들어와 뺨을 그슬렸다. 임다혜는 백시우의 깃을 생명줄처럼 움켜쥔 채 숨을 죽였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옷감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사방이 암전된 폐쇄 공간 속에서, 오직 백시우의 왼손 손목만이 기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화학적 연소로 인한 극도의 고온이 방 안을 채우자, 가죽 장갑 틈새로 드러난 흉터의 표면이 푸르스름한 형광을 띠며 번들거렸다. 단순한 화상 흉터가 아니었다. 피부 밑 깊숙이 이식된 특수 고분자 물질이 열반응에 의해 활성화된 것이었다.
[P-099]
그 형광의 궤적은 의심할 여지없이 판게아 그룹의 실험체 식별 코드였다.
자신의 뇌가 분열되고, 살인마들의 인격이 강제로 주입되어 조립되는 과정을 거쳤다는 물증이 눈앞에서 빛나고 있었다. 백시우는 이를 악물었다. 턱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작게 울렸다. 스스로를 프로파일러라 믿고 싶었던 열망이, 단지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살인 병기의 오작동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척수를 타고 흘렀다.
폭발의 여운이 가라앉자, 사방에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백시우는 어깨로 그슬린 압착판을 밀어냈다. 이미 고온으로 기어 계통이 녹아내린 철판은 작은 힘에도 삐걱거리며 옆으로 밀려났다.
방 안은 처참했다.
습격해 왔던 용병의 흔적은 그을린 잔해 속에 파묻혀 분간할 수 없었고, 거짓 추리실의 가짜 증거판들은 전부 재가 되어 휘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폭발의 막강한 압력은 방 한구석의 두꺼운 석고 벽을 완전히 붕괴시켜 놓았다.
무너진 벽체 너머로 차갑고 날카로운 은색 광원이 일제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건……."
임다혜가 기침을 뱉으며 손전등을 비추었다.
먼지 안개 너머로 드러난 공간은 수백 개의 거울로 채워진 거대한 미로였다. 바닥도, 벽도, 천장도 온통 가공된 유리 거울로 덮여 있어 빛이 닿는 곳마다 무한한 왜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백시우는 주머니 속 송 경사의 무전기를 꽉 쥐었다. 마이크 그릴 뒤편의 점자가 그의 지문에 차갑게 박혔다.
'거울의 프레임 모서리를 응시하라.'
두 사람은 깨진 유리 파편을 밟으며 거울방의 경계선을 넘었다. 사방에서 자신들의 일그러진 형상이 수천 개로 복제되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공간감각이 마비되는 기괴한 시각적 압박 속에서, 백시우는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구식 전신거울 앞에 멈춰 섰다.
그 거울의 목재 프레임 우측 상단 모서리, 그곳에 아주 미세한 흠집처럼 보이는 기계식 렌즈의 안구가 숨겨져 있었다.
백시우가 그 렌즈와 시선을 맞추려던 찰나였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 중 단 하나가, 그의 실제 움직임보다 반 박자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거울 속의 백시우는 움직이지 않는 진짜 백시우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천천히 비틀어 올렸다. 그것은 백시우의 표정이 아니었다. 오만하고 잔혹한, 설계자 오진우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