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이 꺼진 지하 상담실 아페이론의 공기는 백색 소음기로 인해 기묘할 정도로 정적에 잠겨 있었다. 테이블 중앙에 놓인 푸른 마그네틱 키카드는 형광등 빛을 반사하며 차가운 청색광을 뿜어냈다.
백설민은 가죽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한강우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해부학자의 메스처럼 집요했고, 입꼬리는 미세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착각이 살인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백설민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한강우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키카드의 모서리를 검지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눌렀다. 카드가 시소처럼 기울었다가 다시 수평을 찾았다.
"착각은 통로를 만들고, 통로는 대상을 죽음으로 인도했다."
"그것이 기하학의 원리지."
"아니, 기하학이 아니라 속임수다."
한강우는 상체를 앞으로 가볍게 기울였다.
"실제 요양원에는 302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네가 배치한 거울들이 303호의 문을 반전시켜 302호로 보이게 만들었을 뿐이다. 피해자들은 규칙을 지키기 위해 302호의 문을 열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들이 도망치기 위해 선택한 반대편 복도는 거울의 왜곡으로 인해 이미 천장의 낚싯바늘 덫이 설치된 사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푸른 마그네틱 키카드는 존재하지 않는 문을 열기 위한 가짜 미끼에 불과했다."
백설민의 눈동자가 좌우로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이 가죽 팔걸이를 가볍게 긁는 소리가 방음벽에 부딪혀 소멸했다.
"규칙의 모순을 지적하는 태도가 마음에 드는군."
백설민은 품 안에서 두꺼운 검은색 종이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봉투의 표면에는 붉은색 기하학 문양, 즉 세 개의 삼각형이 정교하게 겹쳐진 대칭 도형이 인쇄되어 있었다.
"두 번째 문제다."
백설민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을 딛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철제 방화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아지트 내부에는 다시 인공적인 적막만이 남았다.
한강우는 테이블 위의 검은 봉투를 집어 들었다. 거친 종이의 질감이 손가락 끝의 감각 수용체를 자극했다. 봉투의 밀봉을 뜯자 그 내부에서 빳빳한 인쇄지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왔다.
'마을 중심에 위치한 거부의 저택인 아파트 404호: 매시 15분마다 춤추는 그림자를 모방하라.'
활자는 잉크가 번진 낡은 타자기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정교한 수치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한강우는 인쇄지를 접어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왼쪽 관자놀이 부근에서 미세한 박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뇌척수액의 온도가 상승하는 전조 증상이었다.
***
사흘 뒤 밤 11시 12분.
도시 외곽의 방직공장 지대 배후에 위치한 낡은 5층짜리 임대 아파트 단지는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처럼 서 있었다. 외벽의 페인트는 습기와 세월에 밀려 허물처럼 벗겨져 나갔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 들어찬 어둠은 유독 짙었다.
한강우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아파트의 후면 계단을 통해 4층으로 진입했다.
머릿속에서 가느다란 고주파 이명이 시작되었다. 뇌 손상이 누적되고 있다는 생체 신호였다. 이미 대뇌피질의 일부가 과열되며 시야의 가장자리가 붉은 노이즈로 흐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강우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물리적인 한계를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보다 앞서는 뇌의 인지적 유희를 억제하지 못했다.
4층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비정상적인 소음 환경이 오감을 압박했다.
째깍. 째깍. 째깍.
동기화되지 않은 수십 개의 시계 소리가 복도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복도 양옆의 시멘트 벽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원형 벽시계들이 매달려 있었다. 대략 서른 개가 넘는 시계들이었다. 그것들은 각기 다른 주기로 초침을 움직이고 있었다. 금속 톱니바퀴가 맞물려 서걱거리는 소리와 초침이 유리를 때리는 날카로운 타격음이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한강우는 벽면에 노출된 배선을 관찰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복도 벽면을 따라 길게 늘어진 검은색 연선(Lead wire)들이 보였다. 모든 시계는 개별 배터리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복도 끝에 위치한 철제 분배기함에서 뻗어 나온 전선들이 각 시계의 무브먼트에 직렬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계획된 소음 설계이자, 인위적인 인지 교란 장치였다.
한강우는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어 벽시계 중 하나의 유리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금속성 진동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그는 머릿속으로 백설민이 남긴 수칙의 텍스트와 현장의 배치를 대조했다.
'벽시계 초침이 정각을 가리키기 전에 보이지 않는 방으로 가라.'
수십 개의 시계 중 단 세 개만이 반시계 방향으로 역회전하고 있었다. 그 역회전하는 시계들의 초침이 정각 12시를 가리키는 주기는 정확히 15분 간격으로 교차하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단순히 시각적인 왜곡이 아니군."
한강우는 혼잣말을 뱉었다. 목소리는 건조하게 부서졌다.
이 소음들의 주파수와 초침의 기계적 운동은 강제로 인간의 심박수를 동기화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뇌척수액의 온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인지적 모의실험이 뇌의 전두엽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시야가 붉게 물들며, 복도의 기하학적 수치들이 3차원 선으로 쪼개져 공중에 부유했다.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그의 목덜미를 스쳤다.
누군가 뒤에서 한강우의 오른쪽 어깨를 묵직하게 움켜쥐었다. 손끝에서 스며드는 냉기가 뼈마디를 얼려버릴 듯했다.
"이곳은 함정이야, 강우야."
낮고 축축한 목소리였다. 3년 전, 두개골이 파쇄된 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누워 있던 동료 민태경의 목소리였다.
한강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손길의 무게를 느끼면서도 그의 시선은 정면의 역회전하는 벽시계에 고정되어 있었다.
"돌아가라. 네 뇌는 이미 한계다. 저 자는 네 인격이 완전히 증발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야."
환각 속의 민태경은 반쯤 함몰된 안면을 드러낸 채 한강우의 귀에 속삭였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가상의 피가 한강우의 코트 어깨깃을 적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한강우는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허벅지 위에서 두드리기 시작했다.
탁. 탁. 타닥.
4헤르츠 주기의 일정한 타격이었다. 그는 자신의 뇌 신피질에 의도적인 기계적 자극을 주입했다. 환각이 활성화되는 측두엽의 이상 신호를 전두엽의 논리적 연산으로 덮어씌우는 인지 제어 방식이었다.
"꺼져라."
한강우의 음성은 미동조차 없었다.
어깨를 누르던 무게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민태경의 환각은 노이즈가 낀 화면처럼 흐려지더니 복도의 먼지 속으로 완전히 흩어졌다.
한강우는 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투명하고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뇌가 타들어 가는 극심한 열감 속에서도, 그는 오직 현장의 기하학적 배치와 설계자가 숨겨둔 논리적 모순만을 탐구하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나 동료의 유령 따위는 그의 지적 집착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잡음에 불과했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는 시계들의 초침 소리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아파트 단지 외곽의 어두운 도로변.
시동이 꺼진 검은색 SUV 차량 내부에서 미세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조수석에 앉은 강력계 팀장 지형섭 형사는 헤드셋을 한쪽 귀에 바짝 밀착한 채 모니터의 파형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질겅질겅 씹히는 껌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신호 확실하냐?"
지형섭이 운전석의 정보과 형사를 향해 턱짓을 했다.
"네, 팀장님. 아파트 4층 복도 부근에서 광대역 무전 주파수가 검출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주거지에서 나올 수 없는 대역폭입니다. 도청 감지망에 걸린 신호의 세기로 보아 수신기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지형섭은 껌을 차창 밖으로 뱉어냈다. 그의 거친 얼굴에 살기가 떠올랐다.
"그 쓰레기 자식, 기어코 살인마 놈들이 깔아놓은 판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갔군."
지형섭은 한강우가 과거 민태경의 죽음 이후 사적 수사라는 핑계로 범죄자들과 비정상적인 거래를 해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괴물은 결국 공권력의 손으로 처단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다.
"장비 챙겨라. 이번엔 꼬리를 잡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목덜미를 꺾어놓는다."
지형섭은 허리춤의 권총집을 확인한 뒤 차 문을 열었다. 그의 구두가 축축한 아스팔트를 짓밟았다.
***
다시 4층 복도.
한강우는 마침내 404호라고 적힌 철제 문 앞에 도달했다.
문의 도어락은 이미 내부 회로가 차단된 듯 아무런 불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문틈 사이로 지독할 정도로 차가운 한기가 흘러나와 복도의 먼지를 흩날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문고리의 차가운 금속 표면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틱.
찰나의 순간, 복도 전체를 미친 듯이 진동시키던 수십 개의 벽시계 초침 소리가 일시에 멈추었다.
그 어떤 예고도 없는, 완벽한 진공 상태와 같은 정적이었다.
한강우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고개가 아주 미세하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1초 뒤.
아파트의 노후한 벽면 전체가 진동하며, 찢어지는 듯한 단발성 비명소리가 복도 끝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은 기계음이 아니었다. 인간의 성대가 파열되면서 내지르는 극단적인 고통의 비명이었다.
동시에 수십 개 시계의 내부 태엽들이 한꺼번에 풀리는 날카로운 금속성 마찰음이 복도를 휩쓸었다.
철컥- 끄으으윽.
복도 맨 끝에 위치한 철제 분배기함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틈새 사이로 뼈와 살이 으스러지며 맞물려 돌아가는 피비린내 나는 마찰음이 삐걱거리며 울려 퍼졌다.
한강우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신발 밑창이 타일 바닥을 긁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공기 중으로 기화된 철분의 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그것은 오래된 배관의 녹물 냄새가 아닌, 체온을 잃지 않은 생혈(生血)의 향이었다.
그는 복도 끝에 위치한 회색 철제 분배기함 앞으로 다가갔다. 두껍게 내려앉은 먼지 위로 붉은 액체가 불규칙한 선을 그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강우는 방화 댐퍼용 금속 걸쇠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삐걱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분배기함의 문이 완전히 열렸다.
내부의 배선들은 모두 뜯겨 나가 있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정교하게 맞물린 수십 개의 청동 톱니바퀴들이었다. 톱니바퀴의 중심축에는 인간의 신체가 박혀 있었다.
피해자는 30대 남성으로 추정되었다. 대퇴골과 요골이 인위적으로 분쇄되어 톱니바퀴의 구동축 역할을 하도록 얽혀 있었다. 청동 기어의 날카로운 이빨들이 근육 조직과 신경다발을 파고들 때마다 가느다란 경련이 일었다. 맥박이 뛸 때마다 메인 기어가 1도씩 회전하는 구조였다. 시계들의 동력원은 전기 배선이 아니라, 피해자의 심장 박동 그 자체였다.
한강우는 안구의 공막이 충혈되는 것을 느꼈다. 콧등으로 흘러내린 한 방울의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뇌척수액의 과열로 인한 모세혈관 파열이었다. 그의 시야에 붉은색 격자선들이 다시 정렬되었다.
심박수는 분당 84회였고 기어비는 1대 12로 정렬되어 있었다. 역회전하는 세 개의 시계는 피해자의 호흡 주기가 불규칙해질 때마다 기어의 회전 방향을 반대로 바꾸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즉, 피해자가 고통에 질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순간이 바로 춤추는 그림자가 나타나는 신호였다.
손목시계의 바늘이 오후 11시 15분을 가리켰다.
404호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던 푸른빛이 갑자기 굴절되었다. 복도 벽면에 거대한 그림자가 투사되었다. 그것은 분배기함 속 피해자의 형상도, 한강우 자신의 형상도 아니었다.
벽면의 그림자는 관절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인 채 좌우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처럼, 그림자의 목이 오른쪽으로 90도 꺾였다.
'매시 15분마다 춤추는 그림자를 모방하라.'
수칙의 두 번째 조항이 한강우의 뇌리를 강타했다. 그는 자신의 목뼈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근육이 긴장하며 팽팽한 통증이 발생했다. 그러나 벽면의 그림자는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림자의 양팔이 등 뒤로 꺾이며 척추가 활처럼 휘어졌다.
인간의 골격 구조로는 불가능한 각도였다. 이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은 스스로의 관절을 파괴하라는 의미와 같았다.
그 순간, 계단실 방향에서 묵직한 가죽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지형섭 형사의 발소리였다.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폐쇄된 복도의 공기를 흔들었다.
"404호 앞이다. 진입 준비해."
지형섭의 거친 명령조 음성이 무전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거리상으로 약 15미터 뒤였다.
한강우의 왼쪽 귀에서 극심한 이명이 다시 발생했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암전되었다가 돌아왔다. 뇌 손상 패널티인 '12분간의 기억 상실' 전조 현상이었다.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몇 초에 불과했다.
벽면의 그림자는 이제 목뼈가 완전히 부러진 형상으로 바닥을 향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404호의 철제 문고리가 스스로 회전하며 내부에서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금속음이 울렸다.
동시에, 한강우의 그림자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벽면의 기괴한 꺾임과 동조하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의 등뼈 부근에서 고통스러운 마찰음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