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뒤, 한강우는 지하 상담실 '아페이론'의 철문을 열었다. 지하 특유의 습한 냉기가 바지깃을 타고 올라왔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방 한가운데로 발을 내딛는 순간, 등 뒤에서 건조한 마찰음이 고요를 깼다.
짝, 짝, 짝.
느리고 일정한 간격의 박수 소리였다.
"훌륭한 생환이군."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솟아올랐다.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던 사내, 백설민이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먼지 낀 백색 전등 빛을 받아 번뜩였다. 일주일 만에 제자리에 나타난 의뢰인의 얼굴에는 기묘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한강우는 등 뒤의 문을 닫지 않은 채 그를 응시했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짧고 묵직한 진동을 울렸다. 화면을 켜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감각이었다. 은행 애플리케이션의 고액 이체 알림음. 2단계 계약금의 입금을 알리는 신호였다.
백설민이 테이블 위로 오른손을 천천히 뻗었다. 그의 긴 손가락 끝에 들려 있던 묵직한 금속 물체가 차가운 철제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깡.
맑고 둔탁한 파열음이 지하실의 인공 벽면을 두드렸다. 구리와 아연을 합성한 청동 재질의 주화였다. 표면에는 세 개의 삼각형이 정밀하게 대칭을 이루며 겹쳐진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주화의 패인 홈 사이로 굳은 피처럼 붉은 도료가 채워져 있었다. '붉은 기하학'의 상징이었다.
"약속된 대가다."
백설민이 손가락 끝으로 주화를 가볍게 밀었다. 주화는 매끄러운 금속판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 한강우의 구두 앞코 근처에서 회전을 멈췄다.
"그리고 이건 보너스지. 그 지옥 같은 요양원에서 살아 돌아온 자만이 쥘 수 있는 통행증 같은 것이다."
한강우는 바닥에 떨어진 주화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도료가 채워진 음각 선들이 기하학적인 규칙성을 뽐내고 있었다. 그는 몸을 굽히지 않은 채 백설민의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푸른 거울 요양원은 거대한 시각적 사기극이었다."
백설민은 가죽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이 반쯤 감기며 얇은 눈꺼풀 아래로 검은 동공이 가늘게 드러났다. 지하실의 백색 보조 전등이 그의 입술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음영을 만들었다. 그는 한강우의 선언을 흥미로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조용히 수용했다.
철제 테이블 위의 청동 주화는 회전을 멈춘 뒤에도 미세한 금속성 잔향을 흘렸다. 한강우는 주화의 붉은 삼각 문양에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젖은 구두 굽을 내려다보았다. 요양원의 축축한 지하실 바닥에서 묻어난 인공 이끼 조각이 구두창 테두리에 갈색 선을 그리며 말라붙어 있었다.
"사기극이라는 단어는 너무 세속적이군."
백설민이 마침내 입술을 열었다. 그의 성대는 수분을 잃은 목재가 마찰하듯 건조한 저음을 냈다.
"인간의 망막이 받아들이는 광학적 정보를 단 몇 도 뒤튼 것에 불과하다."
"12도였다."
한강우가 즉시 말을 받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고저장단도 존재하지 않았다.
"복도 양 끝에 마주 보게 설치된 반사 유리의 설치 각도는 정확히 12도씩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 미세한 균열이 복도의 소실점을 왜곡 시켰고, 침입자가 느끼는 공간의 길이를 사방으로 늘려 놓았다."
백설민은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끄덕였다. 그의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가볍게 튕겼다.
"지각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지."
"행동 수칙 1조 역시 그 사기극을 완성하기 위한 물리적 제어 장치였다."
한강우는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차가운 철제의 감각이 손바닥의 감각 수용체를 자극하며 뇌로 전달되었다.
"슬리퍼를 신지 않은 환자는 천장을 보지 마라. 그것은 경고를 가장한 강제 명령이다. 신발이 벗겨진 인간은 본능적으로 바닥의 냉기를 피하기 위해 발가락을 오므리고 걸음 폭을 좁힌다. 좁아진 보폭과 수축된 발등의 근육은 척추의 각도를 수직으로 세우지 못하게 방해한다."
백설민의 손가락 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회색 눈동자에 기괴한 만족감이 서서히 차올랐다.
"계속해라."
"부자연스럽게 앞으로 쏠린 상체는 필연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고정시킨다."
한강우의 논리적 전개는 법의학 보고서를 읽듯 정밀했다.
"그 상태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려면 경추를 극단적으로 뒤로 꺾어야만 한다. 하지만 복도 바닥에 칠해진 냉각 도료와 거울의 굴절이 뇌의 평형감각을 이미 교란한 상태다.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소뇌는 자이로스코프 기능을 상실하고 몸은 중심을 잃는다. 뒤로 넘어지는 신체의 낙하 궤적 끝에는 정확히 천장에 수직으로 매달린 6호 합사 낚싯바늘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하 상담실 '아페이론'의 완벽한 방음벽이 두 남자의 호흡 소리마저 빨아들였다.
그때였다.
한강우의 왼쪽 관자놀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고열이 솟구쳤다. 뇌 속의 신경 전달 물질들이 임계치를 넘어 도파민을 쏟아내는 듯한 이질적인 압박감이었다.
지이이이잉.
고전압 변압기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불쾌한 기계음이 왼쪽 귀의 고막을 거칠게 긁기 시작했다. 소리는 뼈를 타고 두개골 안쪽으로 파고들어 전頭엽을 마구 휘저었다. 한강우는 왼쪽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불타는 필름처럼 붉게 바래 가기 시작했다.
그 붉은 그늘 너머로 이질적인 실루엣이 떠올랐다.
백설민의 어깨 뒤, 어두운 방 모퉁이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온몸이 물에 푹 젖은 듯 축 처진 경찰 정복을 입은 사내였다. 그의 이마에는 파르스름한 화약 자국과 함께 뚫린 총상이 검은 구멍을 드러내고 있었다. 3년 전 서부 부두의 차가운 바닥에서 숨을 거두었던 그의 파트너, 민태경이었다.
'강우야, 네 머리가 또 타들어가고 있어.'
민태경의 환각이 조롱하듯 구멍 난 이마를 씰룩였다.
'저 살인마의 뇌 주파수에 네 이성을 맞출 때마다, 네 존재의 조각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게 느껴지지 않니? 12분이야. 이번에는 어떤 기억이 통째로 증발할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걸.'
한강우는 눈동자를 굴려 환각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의 시선이 백설민의 길게 뻗은 손가락 끝에 닿았다.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푸른 거울 요양원 302호."
한강우가 갈라진 목소리로 침묵을 깨뜨렸다. 백설민의 눈썹이 흥미롭다는 듯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곳 사물함에서 발견된 푸른 마그네틱 키카드가 네가 남긴 결정적인 균열이었다."
한강우는 주머니에서 꺼낸 푸른 마그네틱 카드를 테이블 위에 가볍게 던졌다. 플라스틱 카드가 철제 테이블에 닿으며 가벼운 마찰음을 냈다.
"그 카드를 302호 문에 꽂으려 시도하는 순간, 문고리와 카드 슬롯의 절대적인 위치 왜곡이 인지되었다. 요양원 3층의 모든 방은 거울에 의해 좌우가 완전히 반전된 데칼코마니 구조였다. 네가 설계한 대칭의 함정은 그 반사된 상의 착시를 이용해 피해자가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도록 유도했다."
백설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비열하면서도 기묘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훌륭한 해독이군."
백설민이 정장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가볍게 두드렸다. 거의 동시에 한강우의 개인 단말기가 둔탁한 진동음을 울렸다. 약속된 2단계 수임료가 송금되었다는 메시지가 화면에 번쩍였다.
틱.
백설민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로 작은 금속 물체를 밀어냈다. 그것은 정교하게 세공된 동전 크기의 주화였다. 표면에는 삼각형 세 개가 맞물려 대칭을 이루는 붉은 기하학의 표식이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주화의 차가운 금속 광택이 지하실의 백색 형광등 불빛을 반사했다.
"그리고 이것 역시 너를 위한 보상이었다."
한강우는 주화를 노려보았다. 붉은 도형의 기하학적 대칭을 응시하는 순간, 관자놀이를 관통하는 통증이 배가되었다. 왼쪽 귀에서 시작된 기계음이 이제는 두개골 전체를 흔들며 뇌의 신경망을 사정없이 쥐어짰다. 눈앞의 백설민의 형상이 일순간 세 개로 쪼개졌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다음 시험지는 조금 더 소란스러울 거다."
백설민이 품에서 묵직한 서류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봉투 겉면에는 아무런 글씨도 적혀 있지 않았다.
"소음을 측정하는 시계들이 가득 찬 곳이지. 그 태엽 소리 속에서 과연 네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 지켜보도록 하지."
백설민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강우의 뇌 속 시냅스들이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하나씩 타들어 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뇌의 자아가 완전히 기능 정지에 빠지는, 지워진 12분의 진공 상태가 눈앞까지 박두해 있었다.
환각의 목소리는 고막이 아닌 뇌하수체 중간에서 직접 울리는 것처럼 선명했다. 한강우는 이빨을 악물었다. 극단적인 타산성으로 다져진 이성이 그 환각을 잔인하게 밀어내려 버둥거렸다.
한강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주머니 속의 수표를 쥔 손끝에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려 있었다. 뇌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살인마의 뇌와 대칭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자아를 강제로 지워나가는 '인지적 모의실험'의 치명적 대가였다.
머릿속의 시계태엽이 소리를 내며 멈추는 환청이 들렸다. 12분. 정확히 그만큼의 시간이 뇌의 시냅스 지도에서 삭제될 것 같다는 공포에 가까운 물리적 예감이 뇌간을 때렸다.
"강우야."
백설민의 목소리가 한강우의 이명을 뚫고 들어왔다.
"네 호흡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군. 네 거울에 금이 가기 시작한 모양이군."
백설민은 이미 한강우의 신체적 이상 반응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다. 그의 관찰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강우는 테이블 아래로 내린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일정한 교차 주기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탁. 탁. 타닥.
일정한 신경 자극을 뇌척수액에 주입하여 환각의 주파수를 교란하는 한강우만의 임시 방편이었다. 네 번의 두드림이 끝나자, 백설민의 어깨 너머에 서 있던 민태경의 부서진 얼굴이 노이즈가 낀 화면처럼 흐려지며 이내 어둠 속으로 완전히 녹아내렸다. 왼쪽 귀를 찌르던 이명도 점차 낮은 데시벨의 잡음으로 가라앉았다.
한강우는 이마에 맺힌 차가운 땀을 손등으로 쓸어내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감정이 완전히 소거된 인형처럼 차가운 안광을 유지했다.
"금 같은 건 없다."
한강우의 목소리는 방금 전의 발작을 전혀 겪지 않은 사람처럼 기괴할 정도로 평온했다.
"나는 단지 네가 만든 수식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푸른 거울 요양원은 완벽한 밀실이 아니었다. 네가 그곳에 남겨둔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따로 존재하니까."
백설민은 가죽 의자에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회색 눈이 한강우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오류라니? 기하학에는 빈틈이 없다."
"그 빈틈을 네가 직접 수칙의 이름으로 방치했다."
한강우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얇은 플라스틱 카드를 꺼냈다. 푸른빛이 도는 마그네틱 키카드였다. 요양원 302호 사물함 깊숙한 곳에서 찾아낸 물건이었다.
"이 카드가 바로 네가 설계한 미로의 열쇠이자, 치명적인 모순이지."
백설민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가죽 의자의 팔걸이를 가볍게 긁었다.
"설명해 봐라."
"요양원의 수칙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절대 302호 문에 푸른 마그네틱 키카드를 꽂지 말 것.' 하지만 실제 요양원 내부에는 302호라는 공간 자체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한강우는 키카드를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았다. 플라스틱이 금속과 마찰하며 스르륵 소리를 냈다.
"네가 배치한 대형 거울들이 복도의 물리적 거리를 왜곡했다. 복도 끝에 비스듬히 설치된 반사경들은 303호의 문을 좌우 반전시켜 302호처럼 보이게 만들었지. 피해자들은 자신이 302호 앞에 서 있다고 철저히 착각했다."
"착각이 살인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