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불빛이 렌즈 주변을 둥글게 감쌌다. 태블릿 화면의 검은 배경 위로 찍힌 글자들이 스스로 점멸했다.
"해킹이군."
윤세희가 허리춤의 권총 가죽 홀스터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가죽 장갑이 팽팽하게 늘어났다.
"손 대지 마라."
한강우가 태블릿 화면 위로 손가락을 뻗어 카메라 렌즈를 완전히 가렸다. 검은 액정 너머로 자신의 무표정한 얼굴이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추적할 수 있어. 발신 IP를 확보하면 즉시 기동대를 보낼 테니까."
"소용없다."
한강우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이놈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이 채널을 열었다. 흔적을 남겼을 리가 없다."
"그럼 그냥 보고만 있겠다는 건가?"
"글자 속의 모순을 읽는 것이 내 일이다."
한강우는 태블릿을 들어 올려 전원을 강제로 차단했다. 화면이 암전되며 푸른 불빛도 사라졌다.
방 안에는 다시 무균실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윤세희는 한강우의 손가락 끝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이 테이블 유리를 일정한 주기로 두드리고 있었다. 톡. 톡. 톡.
"민태경의 유품은 내가 보관하고 있다."
윤세희가 품 안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내 놓았다. 가죽 표지가 닳아 모서리가 헤진 수첩이었다.
"그 안에 붉은 기하학의 도면이 그려져 있었지. 하지만 아직 그 의미를 풀지 못했다."
"내가 가져가겠다."
한강우가 수첩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이유가 뭐지?"
"설계자의 초대장이라고 했다. 그놈이 가리킨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규칙이다."
"규칙대로 움직이다가 네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
"상관없다."
한강우는 수첩을 코트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가벼운 마찰음이 났다. 302호 사물함에서 챙겨 두었던 푸른색 마그네틱 키카드가 가죽 수첩의 모서리와 부딪히는 소리였다.
그는 자리를 일어섰다. 윤세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로 가나?"
"출구로."
한강우는 대답을 마친 뒤 아지트의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지하 계단의 공기가 그의 뺨을 스쳤다.
***
사흘 뒤, 밤 11시 45분.
푸른 거울 요양원 주변은 경찰의 노란색 통제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수사관들이 철수하고 남은 공터에는 가로등 불빛만이 비스듬히 떨어졌다. 콘크리트 외벽은 습기를 머금어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한강우는 요양원 서쪽의 배수관을 타고 2층 창문으로 접근했다. 창틀의 잠금장치는 이미 지난번 탈출 때 파손해 둔 상태였다. 그는 가볍게 몸을 넘겨 복도로 들어섰다.
사방이 거울이었다.
벽면 가득 설치된 대형 거울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강우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귓가에서 웅장한 기계음 같은 이명이 시작되었다. 삐- 하는 고주파 음이 고막을 찔렀다. 머릿속의 전두엽 부근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감각이 전해졌다. 인지적 모의실험의 시작이었다.
'공간을 뒤집는다.'
한강우는 눈을 떴다. 거울에 비친 복도의 풍경이 단순한 반사가 아닌, 또 다른 실재하는 공간으로 재조립되기 시작했다.
좌측 벽면의 거울 속에서 302호의 문이 보였다. 그러나 현실의 좌측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밋밋한 콘크리트 벽뿐이었다.
"좌우가 바뀐 상태."
그의 입술이 건조하게 움직였다.
행동 수칙 1조는 '슬리퍼를 신지 않은 환자는 천장을 보지 마시오'였다. 발바닥의 냉기 자극으로 고개를 들게 만들어 천장의 낚싯바늘에 안구를 꿰뚫리게 하는 설계였다.
그렇다면 302호의 수칙은 무엇이었나.
'절대 302호 문에 푸른 마그네틱 키카드를 꽂지 마시오.'
그 수칙은 함정이었다. 진짜 302호의 문에 카드를 꽂으면 내부에 설치된 고압 전류나 가스 트랩이 작동하게 되어 있었다. 설계자는 침입자가 수칙을 정직하게 지키거나, 혹은 반대로 수칙을 어기고 진짜 302호 문에 카드를 꽂아 죽기를 바랐다.
하지만 진짜 목적지는 거울 속에 있었다.
한강우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 속의 302호 문손잡이 위치를 손가락으로 가늠했다.
현실의 밋밋한 콘크리트 벽면, 거울 속 문손잡이와 대칭을 이루는 지점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차가운 시멘트의 질감 사이에 미세한 틈새가 느껴졌다. 일정한 크기로 정교하게 가공된 플라스틱 홈이었다.
"여기다."
그는 주머니에서 푸른 마그네틱 키카드를 꺼냈다.
카드의 표면에는 은색의 마그네틱 선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한강우는 카드를 벽면의 숨겨진 홈에 밀어 넣었다.
틱.
기계적인 마찰음과 함께 거울 벽면 내부에서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거울 프레임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더니, 우측으로 10센티미터가량 미끄러지듯 밀려났다.
거울 뒤에는 어두운 통로가 존재하고 있었다.
한강우는 몸을 숙여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거울 문은 그의 등 뒤에서 다시 부드럽게 닫혔다.
내부는 사방이 회색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가로세로 2미터 남짓한 밀실이었다. 먼지 냄새와 함께 소독약의 독한 향이 코를 찔렀다. 방 한가운데에는 낡은 철제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장의 종이와 도면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한강우는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도면을 내려다보았다.
종이 위에는 푸른 거울 요양원의 정밀한 평면도가 그려져 있었다. 모든 공간이 거울의 반사 각도에 따라 붉은색 선으로 쪼개져 있었다. 선들의 교차점마다 '트랩', '사망 지점', '인지 왜곡 범위' 등의 단어들이 정갈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이것이 진짜 설계 규칙 보드다."
그것은 단순한 범행 기록이 아니었다. 요양원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인지 왜곡 장치로 만들기 위한 물리학적, 심리학적 공식들의 집합체였다.
한강우는 손가락으로 붉은 선들을 따라갔다.
설계자는 요양원의 환자들과 의료진의 동선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수칙을 따르든 따르지 않든, 결국 거울이 만들어낸 사각지대로 몰려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기하학적 덫이었다.
그는 보드 한구석에 적힌 문장을 발견했다.
[대칭은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이다. 거울을 깨뜨리지 않는 한, 너는 평생 나의 그림자만을 쫓게 될 것이다.]
글씨체는 우아하고 유려했다. 3년 전 민태경의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었던 메모의 필체와 정확히 일치했다.
한강우는 보드 옆에 놓인 소형 메모리 칩과 도면 원본을 수거해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로써 요양원의 모든 트랩을 영구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는 마스터 데이터와 함께, 설계자의 행동 패턴을 증명할 결정적 물증을 확보했다.
그때, 거울 문 너머 복도에서 무거운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소리는 거울 벽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한강우는 숨을 죽이고 거울 안쪽의 단방향 투시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운 복도에 손전등 불빛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불빛의 중심에 선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강력계 팀장 지형섭이었다.
"젠장, 아무것도 없잖아."
지형섭이 침을 뱉으며 진짜 302호의 문고리를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문은 잠겨 있었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팀장님, 이쪽 수색은 이미 끝난 것 아닙니까? 본서에서 철수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뒤따라온 젊은 형사가 손전등을 비추며 말했다.
"입 닥쳐. 그 쥐새끼 같은 한강우 놈이 분명히 여기로 다시 올 거다. 내 촉이 말해주고 있어."
지형섭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는 가죽 장갑을 낀 주먹으로 옆에 있던 철제 캐비닛을 내려쳤다.
쾅!
날카로운 금속음이 복도 전체를 울렸다. 캐비닛 문이 찌그러지며 안쪽에 있던 약병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쨍그랑하는 소리가 사방으로 번졌다.
"아무것도 안 나와! 단서도 없고, 시체도 없고, 오직 그 미친놈의 헛소리뿐이야!"
지형섭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캐비닛을 구두굽으로 한 번 더 걷어찼다. 쿵 하는 충격음이 한강우가 서 있는 거울 벽까지 진동으로 전해졌다.
한강우는 거울 너머에서 그 모습을 유유히 지켜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지형섭의 분노는 그에게 한낱 무의미한 소음에 불과했다.
"철수한다."
지형섭이 신경질적으로 손전등을 끄며 돌아섰다.
"쓰레기 같은 동네군."
두 사람의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강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철저한 침묵이 다시 요양원을 채웠다.
한강우는 거울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그의 손에는 설계자의 진짜 규칙 보드에서 떼어낸 단서들이 쥐어져 있었다.
***
새벽 3시 15분.
지하 상담실 아페이론의 입구는 평소와 다름없이 음침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한강우의 구두 굽 소리가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공명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철문의 자물쇠를 돌렸다.
철커덕.
무거운 철문이 열리며 내부의 백색 전등 불빛이 흘러나왔다. 한강우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부는 차갑고 고요했다. 공기청정기가 돌아가는 미세한 기계음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한강우는 코트를 벗어 벽면의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요양원에서 가져온 도면과 메모리 칩을 꺼내 철제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빨랐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부드럽고 우아한, 그러나 뼈마디를 시리게 만드는 차가운 음색이었다.
한강우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방 한가운데 놓인 가죽 의자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맞춤 제작된 검은색 쓰리피스 정장을 입고, 구두 가죽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붉은색 기하학 문양이 새겨진 금속 주화가 들려 있었다.
설계자, 백설민이었다.
"내 미로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망쳐놓았더군."
백설민이 주화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챙그랑하는 가벼운 금속음이 방 안을 울렸다.
한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백설민의 구두 끝에서부터 시작해 천천히 그의 목덜미, 그리고 가늘게 휘어진 눈매로 향했다.
"그 카드는 진짜 302호에 꽂았어야 했다. 그래야 네 뇌 세포가 타들어 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었을 텐데."
백설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큰 키가 백색 조명 아래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게임의 규칙을 바꾼 것은 너다."
한강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단지 네가 만든 대칭의 오류를 바로잡았을 뿐이다."
"오류라고?"
백설민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것은 오류가 아니라 예술적 허용이다. 완벽한 도면은 인간을 흥분시키지 못하니까."
백설민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시가 향과 함께 정체 모를 소독약 냄새가 섞여 풍겼다. 요양원 가짜 방에서 났던 바로 그 냄새였다.
"하지만 만족스럽군. 네가 내 거울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했으니까."
백설민이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도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건 너에게 주는 상이다. 가져가도 좋다."
"다음 단계는 무엇이지?"
"급할 것 없다, 강우야."
백설민은 한강우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의 손길은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한강우의 척추를 타고 차가운 전율이 흘렀다.
"네 과거의 동료, 민태경의 수첩을 열어보았겠지?"
한강우는 주머니 속 수첩의 감각을 떠올렸다.
"그 안에 그려진 불완전한 도형이 다음 목적지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곳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백설민이 철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은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려 한강우를 바라보았다.
"기대하지, 네 인격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철문이 닫히며 둔탁한 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한강우는 홀로 남겨진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의 왼쪽 귀에서 다시 한번 찌르는 듯한 이명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강렬하고 날카로운 통증이었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흐려지며, 벽면의 회색 페인트가 붉은색 피처럼 흘러내리는 환각이 보였다.
그는 테이블을 짚고 버텼다.
시간이 없었다. 뇌 세포의 파괴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지고 있었다.
한강우는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의 도면을 움켜쥐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오직 차가운 집착과 광기만이 서려 있었다. 시합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다음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 톱니바퀴의 공간을 머릿속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뇌의 연소가 다시 한번 시작되고 있었다. 두 남자의 기괴한 공생과 파멸을 향한 질주가 어두운 지하실의 침묵 속에서 조용히 맥박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