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정확히 12분 뒤, 암전되었던 시야가 깨진 유리창처럼 갈라지며 현실의 빛을 받아들였다.

코끝을 찌르는 것은 아페이론 특유의 무균실 같은 소독약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죽 서류철의 빳빳한 종이 냄새와 윤세희의 옷깃에 밴 서늘한 밤공기였다.

암전의 공백을 깨고 들어온 것은 멱살을 잡아채는 강한 완력이었다. 거친 마찰음과 함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등 뒤에 있던 철제 테이블의 모서리가 척추뼈를 단단히 압박했다.

"설명해, 한강우."

윤세희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한강우의 셔츠 깃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손가락끝의 관절이 하얗게 바래 있었다.

한강우는 초점을 잃었던 눈동자를 천천히 굴렸다. 그녀의 어깨너머로 아지트의 하얀 벽면이 보였다. 벽에 걸린 아날로그시계의 분침은 정확히 12칸을 지나 있었다.

"손 치워."

한강우가 목을 누르는 압박감 속에서 건조하게 내뱉었다.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져 나왔다.

"민태경의 이름이 왜 그 요양원 명부에 적혀 있는지 묻고 있어."

윤세희는 손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멱살을 쥔 손에 힘을 더 실으며 한강우의 얼굴을 바짝 끌어당겼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분노와 의혹이 뒤섞인 불꽃이 일렁였다.

한강우는 왼손 손끝으로 철제 테이블의 바닥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딱, 딱, 딱. 세 번의 타격음이 침묵을 갈랐다.

뇌 신경망의 과열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차가운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기억 상실의 공백이 남긴 잔떨림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그 손을 놓지 않으면, 네가 원하는 대답은 영원히 들을 수 없다."

한강우의 시선이 윤세희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일말의 동요도 없는, 푸른 빙판 같은 눈빛이었다.

윤세희는 한강우의 눈속에서 어떠한 인간적인 감정도 찾아볼 수 없음을 깨달은 듯했다. 그녀는 혀를 차며 한강우의 멱살을 거칠게 놓아주었다.

탁.

그녀가 들고 있던 가죽 서류철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서류철이 벌어지며 몇 장의 종이가 미끄러져 나왔다.

그것은 한강우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힌 대학병원 신경외과의 정밀 진단서였다.

"이게 비정상적인 뇌 활동의 결과물이다."

윤세희가 진단서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거칠게 두드렸다.

"전두엽과 측두엽의 미세 혈관 손상, 그리고 신경세포의 급격한 괴사. 네가 말하는 그 빌어먹을 '모의실험'인지 뭔지를 할 때마다 네 뇌는 스스로를 불태우고 있어."

한강우는 흩어진 진단서의 수치들을 훑어보았다. 산소 포화도 저하와 뇌파의 이상 증폭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붉은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한강우는 무덤덤하게 서류를 밀어내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무허가로 살인마들의 뒤를 봐주는 행위를 즉각 중단해."

윤세희가 테이블을 짚으며 상체를 숙였다. 그녀의 가죽 자켓에서 가죽 특유의 뻑뻑한 냄새가 풍겼다.

"너는 지금 선을 넘었어. 설계자가 던져주는 미끼를 물고 그놈의 놀이터에서 춤을 추고 있는 거라고. 이 진단서대로라면 너는 반년도 못 버티고 뇌사 상태에 빠져."

"그것은 내 뇌의 문제다. 법의 영역이 아니지."

"민태경을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잖아!"

윤세희의 목소리가 아페이론의 방음벽에 부딪혀 무겁게 흩어졌다.

민태경. 그 이름이 나오자 한강우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멈추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불규칙한 박자로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강우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윤세희와 눈높이가 맞춰졌다.

"민태경을 죽인 진범의 단서가 요양원에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살인마가 만든 규칙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을 정당화할 순 없어."

윤세희의 입술이 단단히 다물어졌다.

"사법부는 3년 동안 그놈의 꼬리조차 잡지 못했다."

한강우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법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수칙에 묶여, 증거 불충분과 절차적 하자를 핑계로 진범을 놓아준 것이 누구였지?"

윤세희의 어깨가 굳어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사법 절차의 한계였을 뿐이다."

"그 한계 때문에 민태경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고, 설계자는 지금 내 앞에 5억 원짜리 수표를 던지며 유희를 즐기고 있다."

한강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큰 키가 윤세희의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사법부의 정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한강우가 테이블 위에 놓인 요양원의 평면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자가 설계한 이 완벽해 보이는 미로를 내 손으로 직접 해체하고, 그자가 느끼는 오만한 통제감을 완전히 부숴버리는 것이다."

윤세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한강우의 눈빛에 서린 집착은 광기에 가까웠지만, 동시에 소름 돋을 정도로 이성적이었다.

한강우는 서랍을 열어 302호 사물함에서 발견했던 푸른 마그네틱 키카드를 꺼냈다. 카드 표면에는 무수히 많은 긁힌 자국과 함께 고유 일련번호 'CS-990302-B'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는 요양원 내부에서 수집한 소책자와 낡은 공지문들을 테이블 위에 진열했다.

"요양원 관리 공지 제4조."

한강우가 붉은색 색연필로 공지문의 한 구절을 밑줄 쳤다.

[청색 문은 안전지대이므로 비상시 즉시 대피하시오. 단, 적색 문은 내부 가스 배관 점검 구역이므로 반드시 우회하여 통과해야 함.]

윤세희가 그 구절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왜? 전형적인 요양원의 안전 수칙이잖아."

"설계자의 수칙에는 언제나 모순이 존재한다."

한강우는 요양원의 전체 평면도 위에 반투명한 트레이싱지를 겹쳤다. 트레이싱지 위에는 그가 기억을 더듬어 정밀하게 그려낸 요양원 내부의 거울 배치도가 그려져 있었다.

"요양원 복도의 모든 모퉁이에는 대형 전신거울이 설치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사각지대 확인용 볼록거울이 아닌, 완벽한 평면거울이 각도 45도로 고정되어 있었지."

한강우는 연필을 쥐고 거울의 반사각을 따라 선을 긋기 시작했다. 선들은 벽을 통과해 반대편 복도로 꺾여 들어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나?"

"거울을 통해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확인하기 위한 것 아닌가?"

윤세희가 반문을 던졌다.

"아니다. 이 거울들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좌우의 인지를 왜곡하기 위해 정교하게 계산된 각도로 배치된 것이다."

한강우의 연필 끝이 302호 앞 복도에서 멈추었다.

"302호 사물함에서 발견된 수칙에는 '절대 302호 문에 푸른 마그네틱 키카드를 꽂지 말라'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키카드의 일련번호는 302호의 고유 번호와 일치하지."

"그럼 수칙이 거짓이라는 건가?"

"아니, 수칙은 진실이다. 단지 우리가 보는 '302호'가 진짜 302호가 아닐 뿐이다."

한강우는 평면도를 거꾸로 뒤집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반사 상을 기준으로 평면도를 다시 겹쳤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진짜 302호의 위치는 복도 반대편 끝에 있었고, 현재 문가에 '302호'라고 적힌 팻말이 붙은 방은 실제로는 거울에 비친 허상의 위치에 존재하는 '203호'의 대칭점이었다.

"도망자는 거울의 반사 때문에 자신이 복도의 왼쪽에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오른쪽에 서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착각은 문을 선택하는 순간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한강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안전지대라고 공지된 '청색 문'과 우회하라고 경고한 '적색 문'. 이 둘의 위치 역시 거울의 반사각을 통해 완벽하게 역전되어 있다."

윤세희가 침을 삼켰다. 그녀의 시선이 한강우가 그려낸 선들의 교차점에 고정되었다.

"그렇다면..."

"그래. 공지문에 적힌 대로 청색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도망자는 안전지대가 아닌 보일러실의 고압 증기 분출구, 즉 살인마가 설계한 도살장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한강우는 302호에서 가져온 푸른 마그네틱 카드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가볍게 돌렸다.

"반대로, 반드시 우회하라고 경고한 '적색 문'이야말로 거울의 기하학적 대칭을 깨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진짜 출구다."

"설계자는 거울의 왜곡을 이용해 인간의 생존 본능을 죽음의 경로로 유도한 거군."

윤세희가 낮게 탄식했다.

"이것이 설계자의 첫 번째 규칙 구역, '푸른 거울 요양원'의 진짜 설계도다."

한강우는 카드를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그놈은 인간이 위기 상황에서 시각적 정보와 문자로 된 수칙에 맹종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완벽한 논리적 함정을 만들었지."

윤세희는 테이블 위의 자료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한강우의 추리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현장의 물리적 배치와 거울의 각도, 그리고 수칙의 모순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소형 USB 메모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내가 검찰청 데이터베이스에서 은밀하게 복사해 온 요양원 설립 당시의 소유주 명부와 자금 흐름 내역이다."

윤세희가 USB를 한강우 쪽으로 밀었다.

"네 추리가 맞다면, 요양원 원장은 단순한 방조범이 아니라 설계자의 자금줄이거나 조력자일 가능성이 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붉은 기하학'이라는 조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

한강우는 USB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손가락 끝으로 전해졌다.

"이걸 나에게 주는 대가가 무엇이지?"

"거래를 하자, 한강우."

윤세희가 한강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너는 네 방식대로 규칙을 깨부숴. 하지만 그 결과로 얻는 모든 물증과 설계자의 신원에 관한 정보는 반드시 나에게 넘겨라. 사법의 이름으로 그놈의 목에 수갑을 채울 수 있도록."

한강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것은 비웃음도, 만족감도 아닌, 체스판 위의 다음 수를 읽어낸 플레이어의 무기질적인 미소였다.

"좋다. 수갑을 채우든, 단두대에 세우든 그건 네 몫이다."

한강우가 거래를 수락했다.

그때였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한강우의 개인 태블릿 화면이 갑자기 스스로 켜졌다.

징-

날카로운 진동음과 함께 화면에 검은색 배경의 채팅창이 활성화되었다. 어떠한 발신인 정보도 표시되지 않은, 암호화된 메시지였다.

[숨은 거울의 출구를 열었구나.]

첫 문장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한강우와 윤세희의 시선이 동시에 태블릿 화면으로 향했다. 아지트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잊지 말아라, 강우야. 출구를 열었다고 해서 미로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메시지는 실시간으로 작성되듯 한 자씩 느리게 찍혀 나왔다.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다. 네 파트너였던 민태경이 남긴 마지막 유품을 열어보아라. 그곳에 두 번째 초대장이 들어있으니.]

마지막 문장이 끝남과 동시에 태블릿의 카메라인 표시등에 푸른색 불빛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군가 실시간으로 이 방 안을 지켜보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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