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한강우가 번화가 뒷골목을 뚫고 아페이론 내부로 들어갔을 때, 아무 의혹도 가리지 않고 평범한 맞춤 양복을 차려입은 백설민이 의자에 앉아 한강우를 보며 활짝 웃는다. 도서실의 서가가 무너지고 지형섭의 포위망이 좁혀오던 밤의 공기는 지하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동안 완전히 차단되었다. 백색과 회색으로만 칠해진 아페이론의 무균실 같은 내부에는 오직 두 개의 가죽 의자와 하나의 철제 테이블만이 놓여 있었다. 백설민은 그중 하나의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였다. 그의 맞춤 양복 카라에는 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았다.

한강우는 문을 닫았다. 디지털 도어록이 잠기는 기계음이 고요한 방 안을 채웠다. 뇌 내부에서 치밀어 오르는 열감 때문에 시야의 가장자리가 붉게 번졌다. 한강우는 왼손 손가락 끝으로 허벅지를 일정한 박자로 두드렸다. 느리고 일정한 자극만이 척수를 타고 올라와 뇌의 폭주를 지연시켰다.

"예상보다 사흘이나 늦었습니다, 한 분석가님."

백설민이 시계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고저도 없었다.

"지형섭의 움직임이 비효율적이었을 뿐이다."

한강우는 테이블 반대편의 가죽 의자에 앉았다. 그의 시선은 백설민의 목덜미에 머물렀다. 경동맥의 박동이 분당 72회로 극도로 안정적이었다. 살인을 저지르고 타인의 아지트에 무단으로 침입한 인간의 신체 반응이 아니었다.

"그 둔한 형사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백설민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손가락 끝이 마주 닿으며 완벽한 대칭을 이루었다.

"민태경 형사의 절명 순간에 대해 말하려는 겁니다. 그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설계한 수식의 가장 아름다운 결과값이었지요."

한강우의 손끝이 허벅지를 두드리는 주기가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그는 호흡을 고르며 백설민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백설민의 동공은 수축해 있었고, 미세한 안면 근육의 떨림조차 관찰되지 않았다. 진실을 말할 때의 신체적 이완 상태였다.

"그는 규칙을 지키려 했습니다. 아주 정직하고, 무식하게 말입니다."

백설민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기하학적 규칙은 인간의 도덕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민 형사는 자신이 구하려던 피해자의 무게 때문에 스스로 붕괴하는 천장을 받치고 서 있어야 했습니다. 역학적으로 완벽한 설계였지요. 그가 버틴 시간은 정확히 14분 22초였습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지하실 전체에 아주 선명하게 울렸습니다."

"그것이 네가 자랑하는 예술인가."

한강우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감정의 고조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분석가의 어조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이 그 뒤를 이을 차례입니다. 당신은 나의 가장 완벽한 거울이자 사냥개입니다. 이 썩어빠진 세상의 도덕적 껍데기를 벗겨내고, 오직 이성과 논리만으로 지배하는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나와 함께 말입니다."

백설민의 눈빛에 기이한 열망이 서렸다. 그것은 관음증적인 지배욕이 만들어낸 광기였다. 그는 한강우가 자신과 같은 궤도로 굴러떨어지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한강우는 외투 안쪽 포켓으로 오른손을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손가락 끝에 거친 종이의 질감이 닿았다. 윤세희 검사가 수사망을 피해 겨우 넘겨준 민태경의 유품 수첩 조각이었다. 그 종이에는 붉은 기하학의 불완전한 대칭 도형 설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한강우는 그 조각을 백설민의 시선이 닿지 않는 외투 안쪽 깊숙한 주머니에 단단히 숨겨 감추었다. 백설민의 완벽주의적 설계를 깨뜨릴 유일한 균열이 그 손끝에 쥐여 있었다.

한강우는 외투 주머니에서 다른 물건을 꺼내 철제 테이블 위에 가볍게 올려놓았다.

탁.

푸른색 플라스틱 카드가 철제 테이블 위를 미끄러지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푸른 거울 요양원 302호 사물함에서 발견되었던, 규칙상 '절대 302호 문에 꽂지 말아야 할 푸른 마그네틱 키카드'였다. 백설민의 시선이 그 푸른 카드 위로 떨어졌다.

"이것이 네 설계의 첫 번째 모순이다, 백설민."

한강우가 차갑게 말했다.

"그 요양원은 내부의 모든 가구와 벽면이 거울에 의해 좌우 반전된 구조였다. 인간의 시각 인지 왜곡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였지. 그리고 이 키카드는 302호 문에 꽂는 순간 경보가 울리고 락이 걸리게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실제 열려야 했던 문은 거울 너머의 반대편인 303호였으니까. 너는 대칭 왜곡을 은폐하기 위해 이 카드를 절대 꽂지 말라는 가짜 수칙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모순 자체가 네가 거울 설계를 숨기려 했다는 가장 명백한 물증이다."

백설민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그의 완벽한 대칭형 미소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제법이군요, 한 분석가님.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족하지 않다."

한강우가 말을 받는 순간, 그의 왼쪽 귀청을 찢는 듯한 고주파의 이명이 발생했다.

삐이이이-.

뇌 신경망이 과열되며 발생하는 전조 현상이었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암전되었고, 관자놀이에 굵은 핏대가 솟구쳤다. 뇌 세포가 사멸해 가며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정확히 12분간의 기억 상실 트라우마가 다시 그의 정신을 잠식하려 했다. 한강우는 이빨을 악물며 이명을 견뎌냈다. 손끝으로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누르며 현실의 감각을 유지했다.

"도서실에서 지형섭이 나를 포위했을 때, 내 뇌는 정확히 12분 동안 멈췄다. 기억의 공백이었지."

한강우는 이명 너머로 목소리를 뱉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너는 그 시간 동안 내가 검거되거나 자멸할 것이라 예상했겠지. 하지만 나는 이미 그 공백을 계산에 넣어두었다. 12분의 암전이 시작되기 직전, 나는 미리 녹음해 둔 복제 음성 장치를 도서실의 자동 통신 시스템에 연동시켰다. 지형섭은 내가 방 안에서 계속 답변을 하고 있다고 믿었고, 그 착각의 12분 동안 나는 네가 설계한 비상 탈출구를 통해 빠져나왔다. 네가 만든 시간의 공백이, 오히려 내 완벽한 알리바이가 된 것이다."

백설민의 안면 근육이 완전히 굳어졌다. 그의 손가락 끝이 더는 대칭을 유지하지 못하고 흐트러졌다. 한강우는 그의 설계를 완벽하게 해체하고 있었다.

"과연 훌륭한 해답입니다."

백설민이 천천히 박수를 쳤다. 마른 가죽이 부딪히는 서늘한 소리가 아페이론의 벽면에 부딪혀 반사되었다.

"하지만 계약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당신이 나를 경찰에 자백하거나 기소하려 드는 순간, 아페이론에 설정된 최종 규칙이 발동할 겁니다."

백설민이 품 안에서 검은색 소형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액정 화면에 붉은색 기하학 문양이 점멸하고 있었다.

"이 방의 공조 시스템은 내 심박수 및 이 단말기와 실시간으로 연동되어 있습니다. 내 심장이 멈추거나, 내가 수동으로 신호를 보내면, 아페이론의 모든 환기구는 차단되고 내부의 특수 가스가 살포됩니다. 당신의 뇌는 물리적으로 타버릴 것이고, 정합 균형은 영구히 파괴되겠지요. 자폭 규칙입니다. 법의 이름으로 나를 심판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이 계약의 진짜 조항이니까요."

백설민의 목소리에는 다시 오만함이 차올랐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이 게임의 판을 지배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한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허벅지를 두드리고 있었다. 분당 80회. 그의 심박수는 백설민의 자폭 선언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다음 단계의 인지적 모의실험을 가동하고 있었다. 외투 안쪽에 숨겨둔 민태경의 수첩 조각이 그의 피부를 통해 차가운 현실감을 전해주고 있었다.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한 분석가님."

백설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가락이 단말기의 중앙 버튼 위로 내려앉았다.

딸칵.

가벼운 플라스틱 마찰음과 함께 아페이론의 출입문 설비가 기계적인 비명을 질렀다.

철컥! 철컥!

두꺼운 강철 걸쇠가 문틀 깊숙이 박히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아페이론의 모든 자동 도어록 장치가 일제히 작동하며 외부와의 연결을 완전히 차단했다. 도어록의 인디케이터 디스플레이가 푸른색에서 핏빛처럼 붉은 폐쇄 상태로 전환되었다.

환기구 내부에서 댐퍼가 닫히는 무거운 쇠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겁고 밀도 높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백설민은 단말기를 쥔 손을 내리며, 붉은 빛이 일렁이는 폐쇄된 문 앞에 서서 한강우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완전한 지배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백설민은 문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 그는 단말기를 벽면의 은폐된 인식기에 가볍게 접촉시켰다. 철제 벽면의 일부가 소리 없이 미끄러지며 성인 한 명이 지나갈 만한 틈새를 만들어냈다. 백설민의 신체가 그 어둠 속으로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이윽고 강철판이 다시 내려앉으며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단절시켰다.

치익, 하는 파열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천장의 미세한 틈새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색의 가스가 바닥을 향해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스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방 안의 산소 농도는 반비례하여 급감했다.

한강우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백설민이 남겨둔 가죽 수첩과 자신의 외투 안감에 숨겨둔 수첩 조각에 번갈아 머물렀다. 왼쪽 귀에서 시작된 이명이 머릿속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으로 증폭되었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붉은색에서 점차 흐릿한 회색으로 변해갔다. 인지적 모의실험의 부작용이 본격적으로 뇌 세포를 갉아먹기 시작한 징후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약물 앰플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약물을 투약하면 뇌의 과열은 막을 수 있으나, 살인마의 사고 궤적과 동기화하는 인지적 감각 역시 마비될 터였다. 한강우는 테이블 위에 두 장의 기록을 나란히 펼쳤다.

왼쪽에는 백설민이 건넨, 민태경의 유품 중 누락되었던 원본 수첩이 놓였다. 오른쪽에는 윤세희가 회수해 준 불완전한 대칭 도형의 설계도가 자리했다. 두 종이의 단면을 맞추자, 기하학적 선들이 하나의 거대한 입체 구형을 그리며 맞물렸다.

"이것이 네가 숨겨둔 설계의 본질이군."

한강우는 혼잣말을 뱉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거칠었다.

그는 두 눈을 감았다. 머릿속의 신경망이 한계치까지 가열되며 강제적인 동기화가 시작되었다. 아페이론의 백색 벽면이 격자무늬의 푸른색 광선으로 재조립되었다. 백설민이 가스를 설계하고 아페이론의 차단벽을 설치하던 순간의 물리적 인과관계가 한강우의 뇌 속에서 실시간으로 재현되었다.

맞은편 의자에 젖은 흙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한강우가 눈을 뜨자, 그곳에는 3년 전 죽은 민태경이 앉아 있었다. 그의 가슴뼈는 함몰되어 있었고, 군청색 형사 기동복은 흙과 피로 얼룩진 상태였다.

"강우야, 그 수식은 함정이다."

민태경의 환각이 입술을 움직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놈은 네가 이 도형을 완성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 대칭을 맞추는 순간, 기폭 장치가 작동한다."

한강우는 환각의 경고를 무시했다. 그는 민태경의 부서진 흉부 근육과 그 너머로 보이는 기하학적 도형의 물리적 수치만을 냉정하게 해부했다. 환각은 뇌의 손상이 만들어낸 찌꺼기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도형의 불완전한 대칭성이 가리키는 실제 물리적 표적이었다.

도형의 중심부에는 단 하나의 숫자가 누락되어 있었다. 0과 1 사이의 무한한 소수점 아래에서 방황하는 수치였다.

한강우는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탁, 탁, 탁. 박자는 분당 90회로 빨라져 있었다. 호흡이 가빠지며 폐부로 들어오는 가스의 독성이 신경계를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24시간의 유예 시간 중 이미 상당량이 소모되고 있었다.

"백설민은 완벽주의자다."

한강우는 깨진 수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는 자신의 규칙에 모순이 발생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지. 그렇기에 이 불완전한 대칭 도형에는 반드시 그 규칙을 해체할 수 있는 역공식이 숨겨져 있어야만 한다."

그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수첩 하단의 미세한 혈흔 자국이었다. 민태경이 죽기 직전 손가락으로 눌러 찍은 듯한 붉은 점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혈흔이 아니었다. 종이의 두께를 뚫고 들어간 압박의 흔적, 즉 특정 주파수를 의미하는 점자식 표기였다.

한강우는 고개를 들어 벽면의 제어 패널을 바라보았다. 붉은색 LED 등이 점멸하는 디지털 도어록의 하단부에 소형 마이크로폰 수신기가 내장되어 있었다. 백설민의 자폭 단말기와 연동된 음향 인식 센서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아티팩트인 붉은 기하학 문양이 그려진 5억 원짜리 자기앞수표를 꺼냈다. 수표 뒷면의 삼각형 세 개가 겹친 대칭 도형을 제어 패널의 광학 스캐너에 밀착시켰다.

삐빅, 하는 기계음과 함께 스크린에 새로운 입력 창이 활성화되었다.

- 수동 해제 코드를 입력하십시오. (오류 발생 시 고전압 전류 방출)

화면 하단에는 붉은색 경고등이 깜빡였다. 백설민이 심어둔 이중 함정이었다. 코드를 잘못 입력하는 순간, 도어록 내부의 콘덴서에 충전된 2만 볼트의 전류가 전도성 금속 테이블을 통해 흐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한강우가 앉은 의자와 테이블은 모두 철제였다.

그의 오른쪽 귀에서 다시 한 번 고열의 이명이 터져 나왔다. 뇌 손상 수치가 위험 한계선에 도달했다는 신호였다.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길어야 수 분에 불과했다.

한강우는 수첩의 점자 흔적과 수표의 도형을 겹쳐 보았다. 하나의 완벽한 패러독스 공식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그 공식의 마지막 연산 기호는 자신의 심박수와 동기화되어 작동하는 변수였다.

한강우는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금속 패널의 키패드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그의 손끝이 차가운 철제 표면에 닿는 순간, 도어록의 붉은 표시등이 거칠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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