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빨간 숫자가 점멸하는 타이머 밑에서 한강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 속 지형섭의 손가락이 강철 말뚝을 향해 뻗어 나가는 광경이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광선 속에서 일렁였다. 회색 콘크리트 벽면에 매달린 유골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쇠사슬 마찰음을 냈다.

지하 통로의 습한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한강우는 양쪽으로 나뉜 선택 버튼으로 손을 뻗는 대신, 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서가 내부의 어두운 틈새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도서 색인표 번호가 기재되어 있어야 할 자리였다. 하지만 종이 딱지 대신 플라스틱 재질의 얇은 직사각형 물체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한강우는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그것을 거칠게 뽑아냈다. 고 민태경 형사의 경찰 신분증이 손아귀에 잡혔다.

신분증 전면의 사진은 세월의 흔적으로 인해 모서리가 닳아 흐릿했다. 한강우는 신분증을 뒤집어 뒷면을 관찰했다. 빛바랜 플라스틱 표면에 날카로운 금속 도구로 긁은 듯한 대각선 방향의 상처들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상처는 언뜻 무작위적인 훼손처럼 보였으나 일정한 각도와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히 흐르는 세 개의 선이 존재했고, 그것과 정대칭으로 교차하는 두 개의 선이 중심을 관통했다.

한강우의 검지 손가락이 상처의 파인 홈을 가만히 따라갔다. 뇌 신경망이 급격히 가열되며 관자놀이 부근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인지적 모의실험의 회로가 뇌리에서 가동되며 주변의 삼차원 공간이 기하학적으로 뒤틀렸다. 그는 이 상처들의 배열이 단순한 물리적 손상이 아님을 직감했다. 이것은 도서 도식의 '음기하학 설계(Negative Geometry Design)'에 기반한 배치 수법을 완벽히 모방했다.

"거울의 이면이다."

한강우가 나직하게 독백했다. 그의 목소리는 밀폐된 콘크리트 벽면에 부딪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푸른 거울 요양원 302호 사물함에서 발견했던 푸른 마그네틱 키카드를 코트 주머니에서 꺼냈다. 당시 요양원의 수칙은 '절대 302호 문에 꽂지 말아야 할 카드'라고 규정했다. 그 모순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한강우는 요양원의 공간 전체가 거울에 의해 좌우 반전된 비대칭 구조임을 간파했다. 거울의 반사는 왼쪽을 오른쪽으로, 오른쪽을 왼쪽으로 바꿨다. 그렇다면 진짜 작동 스위치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위치의 정반대편에 존재해야 마당했다.

이 도서실의 제어 장치 역시 동일한 기하학적 대칭을 따르고 있었다. 화면 옆에 배치된 두 개의 버튼, '지(池)'와 '윤(尹)'은 침입자를 유도하는 함정에 불과했다. 음기하학의 규칙을 대입하면, 눈앞에 보이는 물리적 버튼을 누르는 행위 자체가 회로를 단선시켜 폭발을 유도하는 기폭 장치로 기능했다. 진짜 제어점은 두 버튼의 중심축, 즉 대칭선이 교차하는 보이지 않는 가상의 공간에 배치되어야 했다.

한강우는 신분증 뒷면의 대각선 교차점을 모니터 하단의 빈 공간에 겹쳐 보았다. 상처들이 교차하는 중심위치가 정확히 모니터 베젤 아래쪽의 작은 나사 구멍과 일치했다. 그는 푸른색 마그네틱 키카드를 나사 구멍 틈새로 밀어 넣었다.

서걱.

무언가 금속 핀을 밀어내는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화면 속 타이머의 숫자가 멈추었다. [00:00:12]에서 멈춘 숫자가 붉은빛을 잃고 회색으로 변했다. 화면 속 지형섭의 손가락이 유골의 말뚝에 닿았으나 아무런 폭발도 일어나지 않았다.

타이머가 정지함과 동시에 모니터 뒤편의 벽면이 좌우로 갈라졌다. 둔탁한 기계음과 함께 차가운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영하 180도의 액체 질소로 동결되어 있던 강철 상자가 서서히 위로 솟아올랐다. 과거 민태경이 죽기 전 한강우에게 미처 건네지 못했던 붉은 기하학 전말의 기록 보관 상자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 표면에 성에가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한강우는 상자 상단의 압력 밸브를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피식 하는 소리와 함께 질소 가스가 빠져나가며 해동 장치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한강우의 왼쪽 귀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주파 이명이 발생했다.

"아윽."

그는 왼쪽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주저앉았다. 뇌하수체 부근에서 시작된 뜨거운 열감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백설민과의 대화 도중 왼쪽 귀에서 발생했던 예리한 두통, 정확히 12분간의 기억 상실 트라우마 전조 현상이 다시 뇌 세포를 흔들었다. 인지적 모의실험의 과부하가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신호로 작용했다. 앞으로 12분 뒤, 그의 자아는 암전 속으로 가라앉을 위기였다.

시간이 부족했다. 지형섭과 윤세희가 지하 통로의 정적을 깨고 이쪽으로 오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한강우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소형 복제 음성 장치를 꺼냈다. 미리 녹음해 둔 그의 목소리와 불규칙한 발자국 소리가 저장된 특수 장치였다. 그는 장치의 스위치를 켜고 도서실 반대편 환기구 입구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 "지 형사님, 이쪽입니다. 서가 뒤쪽에 통로가 있습니다."

스피커를 통해 한강우의 변조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서실 중앙에 있던 지형섭의 손전등 불빛이 즉각 환기구 방향으로 회전했다. 지형섭의 다급한 욕설과 무거운 군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알리바이는 완성되었다. 향후 12분 동안 경찰의 수색 방향은 완전히 반대편 통로로 쏠릴 예정이었다.

해동이 완료된 기록 보관 상자의 걸쇠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풀렸다. 한강우는 상자 내부의 마이크로필름과 붉은 기하학의 도면들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머릿속의 동기화 부하율은 이미 130%를 넘어서고 있었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타들어 갔다. 눈꺼풀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고, 안구 뒷부분에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치솟았다.

뚝, 뚝.

차가운 철제 테이블 위로 붉은 액체가 떨어졌다. 그의 눈가에서 흘러내린 피눈물이 턱끝을 타고 번졌다. 육체는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신경 세포들이 차례로 끊어지는 감각이 실시간으로 뇌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한강우의 입꼬리는 길게 찢어졌다. 고통은 지적 희열 아래로 가라앉았다. 백설민이 설계한 완벽한 공간 배치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해체했다는 지적 충족감이 그의 신경계를 지배했다. 살인마의 미로를 완벽하게 정복했다는 확신이 전신을 감쌌다. 그것은 파멸의 심연에서 느끼는 차가운 광학적 열반을 선사했다.

"겨우 이 정도인가, 백설민이라고 조용히 읊조렸다."

그는 소매로 피를 닦지 않은 채 서랍 안의 자료들을 가방에 밀어 넣었다.

한강우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지하 도서실의 비상구를 빠져나왔다. 멀리서 경찰들의 사이렌 소리와 고함이 들렸으나 그의 귀에는 웅웅거리는 이명만이 가득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빌딩 숲 사이의 골목길을 지나 대로변으로 나왔을 때,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한강우는 전신주에 몸을 기댄 채 화면을 켰다. 발신인을 알 수 없는 번호였다.

[거울을 건너 지혜의 전당까지 훌륭하군. 이제 아페이론에서 만나자.]

백설민이 보낸 문자가 액정 위에 떠올랐다. 한강우는 액정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뇌의 과열이 조금씩 내려앉으며 흐려졌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12분의 암전 시간이 무사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가방끈을 단단히 쥐고 번화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정이 넘은 시각, 번화가 뒷골목은 음침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네온사인 불빛이 빗물 고인 아스팔트 위에서 붉게 번졌다. 한강우는 상가 건물의 어두운 지하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무허가 민간 프로파일링 사무실, '아페이론'의 철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가볍게 눌렀다. 띠리릭 하는 신호음과 함께 무거운 철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사무실 내부는 모든 외부 자극을 차단하기 위해 백색과 회색으로만 칠해진 무균실 같은 공간을 유지했다. 차가운 LED 조명이 방 한가운데의 철제 테이블을 비추고 있었다.

그곳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아무런 가면도, 신원 은폐도 하지 않은 사내가 시선에 잡혔다. 몸에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짙은 회색의 맞춤 양복을 입은 백설민이 두 개의 가죽 의자 중 하나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두 손을 단정히 모은 채, 문을 열고 들어선 한강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정중하고 오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어서 오십시오, 한 분석가님."

백설민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한강우는 열린 철문을 등지고 서서 도어록의 수동 잠금 레버를 돌렸다. 쇠붙이가 맞물리는 무거운 마찰음이 밀폐된 지하 상담실에 낮게 깔렸다. 그의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코트 자락에서는 도서실 지하 지하도에서 묻은 흙먼지 냄새가 풍겼다.

그는 테이블로 걸어가 가죽 가방을 철제 상판 위에 내려놓았다. 가방 모퉁이에서 아직 다 녹지 않은 액체 질소의 잔여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백설민은 그 눈부신 수증기를 흥미롭다는 듯 관찰했다. 그의 시선은 한강우의 턱끝에 맺혀 있는, 완전히 마르지 않은 핏방울로 이동했다.

"몰골이 다소 거칠어지셨습니다."

백설민이 먼저 침묵을 깨며 상체를 가볍게 앞으로 기울였다.

"의뢰인의 요구 조건을 충족했을 뿐이다."

한강우는 가방 지퍼를 열고 해동된 강철 상자에서 꺼낸 마이크로필름과 붉은 기하학의 도면들을 테이블 위에 흐트러뜨렸다. 종이와 필름이 철제 상판에 부딪히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백설민은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도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도면에는 도서실의 음기하학적 설계가 대칭 좌표계로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한강우가 키카드로 무력화한 대칭 교차점 부근을 가볍게 두드렸다.

"함정을 정확히 짚어내셨군요. 보통의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좌우의 버튼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분법적 함정에 빠져 뇌가 타버렸을 텐데 말입니다."

"비대칭적 선택지를 제시해 놓고 진짜 해답은 대칭의 중심축에 숨겨두는 수법은 진부했다."

한강우의 목소리는 건조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의 왼쪽 귀에서는 여전히 먼 곳에서 울리는 듯한 이명이 잔잔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백설민은 도면을 내려놓고 옷소매 안쪽에서 작은 유리 앰플을 꺼냈다. 투명한 액체가 담긴 앰플의 표면에는 푸른색 기하학 문양이 미세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한강우가 인지적 모의실험의 부작용인 뇌 신경 과열을 억제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투여해야 하는 특수 약물이었다.

"훌륭한 답안지에 대한 보상입니다."

백설민이 앰플을 테이블 위로 가볍게 밀었다. 유리관이 금속 표면을 굴러가 한강우의 손가락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한강우는 앰플을 집어 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백설민의 단정한 맞춤 양복 깃 안쪽, 미세하게 삐져나온 붉은색 실밥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실밥의 형태는 붉은 기하학의 표식인 세 개의 삼각형이 맞물린 대칭 도형의 모서리와 기묘하게 일치했다.

"이것으로 두 번째 구역의 계약은 완료되었다. 이제 내 질문에 답할 차례다."

한강우의 검지가 테이블 표면을 일정한 박자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분당 80회의 느리고 차가운 템포였다.

"민태경을 죽인 진짜 목적이 무엇이지."

백설민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는 가죽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양손의 손가락 끝을 맞대어 대칭을 만들었다.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한 분석가님."

상담실 안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는 것처럼 정적에 휩싸였다. 한강우의 손가락 박자가 멈추었다. 그의 눈동자가 백설민의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 근육을 집요하게 해부하듯 파고들었다. 거짓을 말할 때 나타나는 미세한 안면 비대칭은 관찰되지 않았다.

"무슨 뜻이지."

"민 형사는 스스로 선택한 겁니다. 이 완벽한 기하학적 규칙의 세계를 이해한 순간, 그의 뇌는 속세의 껍질을 벗어던진 것이지요."

백설민이 상의 안주머니에서 낡은 가죽 수첩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윤세희 검사가 한강우에게 건넸던 민태경의 유품 수첩과 동일한 재질이자, 누락되었던 후반부 페이지들이 고스란히 보존된 원본이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기록을 직접 읽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물론, 당신의 뇌세포가 다음 24시간 동안 버텨준다면 말입니다."

백설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은 극도로 정제되어 있어 어떠한 소음도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가다가 멈춰 서서 한강우를 돌아보았다.

"다음 의뢰지는 바로 이곳, 아페이론입니다."

그가 주머니에서 리모컨처럼 생긴 소형 송신기를 꺼내 조용히 버튼을 눌렀다.

철컥.

사무실의 사방 벽면 내부에 매립되어 있던 강철 차단벽이 일제히 내려앉으며 유일한 출입구인 철문과 환기구를 완벽하게 봉쇄했다. 백색의 방은 순식간에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밀실로 변모했다.

천장의 환기구 틈새에서 희뿌연 미색의 가스가 아주 미세한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백설민은 차단벽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 방 안의 인터콤 스피커를 통해 기계적으로 변조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 마지막 게임의 규칙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민태경의 수첩 원본과 제가 남긴 수첩의 틈새를 결합해, 이 방의 산소 공급 장치에 걸린 암호를 해독하십시오. 제한 시간은 정확히 당신의 뇌가 사멸하기까지 남은 시간과 동기화됩니다.

한강우는 서서히 차오르는 가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가에서 다시 한 번 붉은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흘렀다. 테이블 위에는 낡은 가죽 수첩 두 권과 한 병의 약물 앰플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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