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형섭 형사가 분노로 권총 손잡이를 쥔 상태에서 비가 내리는 도서실 외곽 보안 셔터가 비틀려 열렸다. 빗물이 셔터의 틈새를 타고 흘러내려 도서실 입구의 대리석 바닥을 검게 적셨다. 무쇠 셔터가 내려앉으며 발생한 거대한 굉음의 잔향이 밀폐된 서가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오래된 종이 먼지와 쇠사슬의 녹슨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철컥, 철컥.
지형섭의 손가락이 권총의 방아쇠울을 거칠게 두드렸다. 그의 시선은 허공에 매달린 민태경의 유골에 고정되어 있었다. 3년 전 실종되었던 동료의 마지막 근무복이 먼지와 거미줄에 뒤덮인 채 매달려 있었다. 기형적으로 꺾인 두개골과 가슴뼈 중앙을 관통한 강철 말뚝이 손전등의 백색 광선 아래에서 차갑게 빛났다.
"이게... 이게 왜 여기 있어."
지형섭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의 턱근육이 가쁘게 떨렸다.
윤세희 검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손전등의 불빛을 사방으로 흔들었다. 빛줄기가 붉은색 페인트로 그려진 세 개의 삼각형 대칭 도형을 훑었다. 기하학적인 선들은 유골을 중심으로 완벽한 비대칭을 이루며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함정이에요. 형사님, 뒤로 물러서세요."
윤세희의 경고는 한강우의 귓전에 닿지 않았다.
한강우의 왼쪽 귀 안쪽에서 고주파의 금속성 이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삐이익 하는 소리는 고막을 뚫고 뇌의 측두엽을 직접 타격했다. 인지적 모의실험의 과열 징후였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급격히 어두워지며 흑백의 점묘화처럼 변해갔다. 뒤집힌 문고리와 톱니바퀴의 궤적이 뇌 속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했다.
'정확히 12분.'
한강우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백설민과 마주 앉았던 아페이론의 지하실에서 겪었던 그 감각이었다. 뇌 신경망이 타들어 가며 자아가 소멸하는 인격 증발의 전조 현상. 앞으로 몇 초 뒤면 그의 시각은 완벽히 차단되고, 12분 동안의 기억은 뇌에서 영구히 삭제될 것이었다.
"한강우, 정신 차려! 뭘 보고 있는 거야!"
지형섭이 한강우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웠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한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코트 주머니 속에 든 작은 플라스틱 기기를 더듬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지난 수사 과정에서 확보해 두었던 미니 무선 음성 변조 장치였다. 백설민과의 대화 이후 기획해 두었던 시간차 알리바이 트랙이었다. 12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미리 녹음해 둔 루프 재생 장치였다.
그는 주머니 안에서 소형 리모컨의 가운뎃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한강우의 시야가 완벽한 암전 속으로 추락했다. 암흑이 망막을 덮쳤고, 뇌의 모든 연상 작용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암전 속에서 그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기 직전, 그의 무의식은 이미 입력된 물리적 수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치익, 하는 미세한 노이즈와 함께 도서실 반대편 복도 구석에서 음성이 출력되었다.
- 지 형사님, 이쪽입니다. 서가 뒤편에 통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강우 자신의 목소리였다. 정확한 음색과 억양으로 구현된 가짜 알리바이였다.
지형섭의 시선이 즉각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갔다. 손전등의 빛줄기가 어두운 복도 끝을 찔렀다.
"저 자식이 언제 저기로 간 거야?"
지형섭이 권총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의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짓이기며 달리기 시작했다.
"형사님, 잠깐만요! 한강우는 방금 전까지 우리 앞에..."
윤세희가 제지하려 했으나, 복도 저편에서 다시 한번 한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서두르십시오. 셔터가 다시 작동하기 전에 나가야 합니다.
소리는 완벽한 방향 감각을 교란하며 복도 모퉁이를 돌아서 울렸다. 지형섭과 그가 이끄는 경찰 지원 인력의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목소리의 진원지만을 쫓고 있었다. 텅 빈 도서실 중앙에는 오직 쏟아진 책들과 기형적인 유골, 그리고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한강우의 육체만이 남았다.
한강우의 신체는 자율신경계의 본능적인 방어 기제에 의해 움직였다. 시각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의 손끝은 바닥의 감각을 읽어 내려갔다.
그의 왼손이 닿은 곳은 차가운 강철판이었다. 환풍구의 하부 그릴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푸른색 마그네틱 키카드를 꺼냈다. 푸른 거울 요양원 302호 사물함에서 발견했던, 규칙상 '절대 302호 문에 꽂지 말아야 할' 카드였다. 그곳의 공간 전체가 거울에 의해 좌우 반전된 구조임을 간파하게 해 주었던 그 핵심 단서가 이제 다른 대칭 공간을 여는 마스터키로 작용하고 있었다.
도서실의 서가 배치 역시 요양원의 거울 대칭 구조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다. 'ㅂ' 서가와 'ㅅ' 서가의 모순은 요양원 302호의 뒤집힌 문고리와 정확히 일치하는 기하학적 대칭축을 형성했다.
한강우는 보이지 않는 눈 대신 손가락의 촉각으로 환풍구 틈새의 마그네틱 인식기를 찾아냈다. 카드를 틈새에 밀어 넣고 왼쪽으로 90도 회전시켰다.
철컥.
대칭축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환풍구 철망이 아래로 열렸다. 한강우의 몸이 중력의 법칙을 따라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수직으로 연결된 먼지 쌓인 통로를 지나 거친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지는 충격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쿠웅.
무거운 철제 환풍구가 머리 위에서 다시 닫히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
차가운 먼지가 뺨에 닿는 감각에 한강우는 눈을 떴다.
입안에서 비린 피 맛이 났다. 그는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격렬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압박했다. 손끝을 움직여 손목시계를 만졌다. 백색 LED 조명이 켜지며 숫자가 나타났다.
정확히 12분이 지나 있었다.
"흡..."
그는 짧은 호흡을 들이마셨다. 뇌사 발작의 한계를 극복하고 의식을 회복한 것이었다. 기억의 단편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지형섭을 교란하기 위해 작동시켰던 음성 루프 트랙, 그리고 요양원의 키카드를 이용해 대칭 구조의 환풍구를 열고 탈출한 과정이 역순으로 머릿속에 정리되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켰다.
사방은 좁은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밀실이었다. 도서실 지하의 숨겨진 보일러실 혹은 폐기된 서고로 추정되는 공간이었다. 벽면에는 습기로 인해 곰팡이가 검게 피어 있었고, 바닥에는 찢어진 종이 조각들과 낡은 서류철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한강우의 시선이 자신의 오른손에 머물렀다.
기절해 있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꽉 쥐고 있었던 종이 한 장이 보였다. 누렇게 바랜 종이의 질감은 수십 년의 세월을 담고 있었다.
그는 종이를 펼쳤다.
그것은 과거 민태경 형사가 작성했던 미해결 사건의 피의자 신문조서 사본이었다. 신문조서의 상단에는 '붉은 기하학'의 초기 문양이 거친 볼펜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세 개의 삼각형이 채 완성되지 않은 채 비뚤어지게 겹쳐진 형태였다.
피의자의 이름 란은 날카로운 도구로 긁혀 나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조서 하단의 필적은 명백히 민태경의 것이었다.
[본 사건의 배후는 단순한 살인마가 아니다. 그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는 고용주다.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사냥당한다.]
한강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갔다.
민태경은 이미 3년 전에 '설계자'의 존재와 그들이 맺는 기괴한 밀실 계약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사를 진행하던 도중 납치되어 이곳 도서실 벽면에 박제된 것이었다.
"규칙의 완결성..."
한강우는 기조서 종이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전등 빛으로 방 안을 비추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낡은 목제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캐비닛처럼 생긴 철제 보관함이 있었고, 그 표면에는 도서 분류 기호가 적힌 라벨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대부분의 라벨은 훼손되어 있었으나, 단 하나의 서랍만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서랍의 손잡이 아래에는 붉은색 기하학 문양이 아주 작게 각인되어 있었다. 백설민이 남긴 흔적이었다.
한강우는 서랍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가락이 철제 손잡이를 잡았다.
끼이익 하는 불쾌한 마찰음과 함께 서랍이 열렸다. 먼지가 공중으로 피어오르며 전등 빛을 흐렸다. 서랍 내부는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강우는 서랍 안쪽의 천장 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이중 바닥이나 숨겨진 틈새를 찾는 프로파일러의 직관이었다. 손가락 끝에 얇은 플라스틱 카드의 질감이 걸렸다.
그는 그것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먼지 더미 속에서 미끄러져 나온 것은 도서 색인표가 아니었다. 3년의 세월 동안 빛을 보지 못해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된 가죽 지갑이었다.
한강우는 지갑을 펼쳤다.
손전등의 백색 광선이 지갑 안쪽의 투명한 플라스틱 창을 비추었다. 그곳에는 한 남자의 증명사진과 함께 선명한 경찰 마크가 인쇄되어 있었다.
[인천지방경찰청 강력계 경위 민태경]
민태경의 경찰 신분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평소에 찾던 특정 도서 색인표 번호인 '811.3-민-74' 자리에 정확히 꽂혀 있었다. 신분증 뒷면에는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쓰인 두 자리 숫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07'
한강우는 손가락 끝으로 붉은 숫자를 문질렀다. 피는 완전히 건조되어 굳어 있었고, 지문의 형태를 따라 가루가 되어 부스러졌다. 3년 전의 혈흔이 아니었다. 산화된 정도와 색조로 보아, 길어야 사흘 전에 칠해진 생혈이었다.
"백설민."
한강우의 입술 사이로 마른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턱을 타고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뇌 발작의 여파로 가쁜 호흡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치이익.
머리 위 벽면에 설치된 구경 50밀리미터의 강철 파이프에서 백색 가스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색무취의 할론 가스였다. 도서실의 희귀 서적을 보존하기 위해 설치된 소화 설비가 수동으로 작동한 것이었다. 밀폐된 지하 공간에서 산소 농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강우는 기침을 삼키며 주변을 훑었다. 허파가 오그라드는 통증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의 시선이 다시 신분증 뒷면의 '07'에 닿았다.
'811.3-민-74'. 그리고 '07'.
한국십진분류법(KDC)에 따른 800번대는 문학이었다. 811은 한국시, .3은 근대시를 뜻했다. 민태경의 성을 딴 '민'과 그의 생년인 '74'의 조합. 그렇다면 '07'은 시집의 페이지 혹은 일련번호였다.
한강우는 몸을 돌려 철제 보관함의 일곱 번째 서랍을 바라보았다. 서랍 전면에는 디지털 도어록과 유사한 형태의 키패드가 매립되어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일곱 번째 서랍 앞으로 다가갔다. 산소 결핍으로 인해 무릎의 관절이 꺾이듯 주저앉았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다시금 흐려졌다.
"일곱 번째."
한강우는 주머니에서 푸른색 마그네틱 카드를 꺼내 키패드 하단의 틈새에 밀어 넣었다. 카드가 접촉되는 순간, 키패드의 백라이트에 붉은 숫자가 점등되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신호였다.
그는 조서 사본에 적혀 있던 민태경의 마지막 기록을 떠올렸다.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사냥당한다.'
민태경이 남긴 규칙의 단서는 신분증 뒷면의 피로 쓴 숫자였다. 한강우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키패드의 '0'과 '7'을 차례로 눌렀다.
철컥.
서랍의 잠금장치가 풀리며 부드럽게 열렸다. 먼지 내려앉은 서랍 내부에는 책 대신 검은색 소형 액정 모니터가 거치되어 있었다.
모니터의 전원이 자동으로 켜지며 푸르스름한 광선이 한강우의 얼굴을 비추었다. 화면에는 실시간 CCTV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화면 속 장소는 방금 전 그가 탈출했던 도서실 중앙부였다. 지형섭 형사와 윤세희 검사가 손전등을 비추며 사방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 쇠사슬에 묶인 민태경의 유골이 기괴하게 흔들렸다.
유골의 갈비뼈 사이에 박힌 강철 말뚝 끝에 붉은색 LED 소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소자 옆의 소형 액정에는 디지털 숫자가 역순으로 흐르고 있었다.
[00:02:45]
초 단위로 줄어드는 숫자는 폭발물의 타이머였다.
모니터 하단의 스피커에서 쇳소리가 섞인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변조된 백설민의 목소리였다.
- 규칙을 깨뜨린 대가는 즉각적이어야 아름답습니다, 한 분석가님.
한강우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의 심박수가 분당 140회까지 치솟았다. 뇌 세포가 비명을 지르며 산소를 요구했으나, 그는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 지형섭 형사는 3년 전 민 형사의 죽음을 방조한 대칭적 방관자입니다. 윤세희 검사는 법의 저울을 위조한 위선자이지요. 둘 중 누구를 먼저 제거하시겠습니까?
화면 속 지형섭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유골 쪽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그의 손가락이 강철 말뚝에 닿기까지 불과 몇 센티미터도 남지 않았다.
한강우는 화면 옆에 배치된 두 개의 물리 버튼을 보았다. 왼쪽 버튼에는 '지(池)', 오른쪽 버튼에는 '윤(尹)'이라는 글자가 조잡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하나를 누르면 다른 하나의 구역이 폐쇄되며 폭발을 피할 수 있는 비대칭적 선택 설계였다. 백설민이 던진 두 번째 구역의 잔혹한 모순이었다.
한강우는 버튼 위에 손을 올렸다. 가스가 폐부 깊숙이 침투해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손끝이 어느 한쪽을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