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장창!
액정이 거미줄처럼 산산조각 난 태블릿 PC가 바닥을 뒹굴었다. 깨진 강화유리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백라이트가 어두운 연구실 벽면을 붉게 물들였다.
화면 속에서 일그러진 소년의 얼굴. 입술이 까맣게 질린 채 휠체어에 앉아 웃고 있던 아이의 사진 위로, 핏빛 글씨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공여자 코드: DH-9042] [법정 대리인: 누나 한채아]
“이 개자식들이…….”
진태의 턱뼈가 부서질 듯 맞물렸다. 가슴 안쪽에서 묵직한 통증이 솟구쳐 올랐다. 사신의 장부를 들여다본 대가는 즉시 심장을 겨냥했다. 쿵, 쿵, 쿵. 불규칙하게 튀어 오르는 기외수축(Premature Ventricular Contraction)이 가슴을 난도질했다. 호흡이 가빠지며 시야의 초점이 두 개, 세 개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복시(Diplopia) 현상이었다.
진태는 책상을 짚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이사회의 대가리인 윤태형 실장, 그리고 그 밑에서 움직이는 개들. 그들이 기획한 ‘태성그룹 후계자 이진우’의 심장 이식 수술. 그 완벽한 시나리오의 제물이 다름 아닌 한채아의 남동생 한우진이었다.
뇌사자가 아닌,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 불치병 환아를 불법 공여자로 둔갑시켜 적출하려는 살인 모의.
진태는 비틀거리면서도 연구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복도의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어지럽게 회전했다.
“7일 12시간 24분.”
장부가 가리킨 소년의 잔여 수명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사할 때의 시간이다. 이사회의 수술대 위에 올라가는 순간, 그 수명은 강제로 제로(0)가 된다. 진태의 구두 굽 소리가 빈 복도에 날카로운 파열음을 남기며 아르카디아로 향했다.
***
명인대학교 병원 21층, VIP 전용 병동 ‘아르카디아’. 일반 병동의 퀴퀴한 소독약 냄새 대신 은은한 아로마 향이 감도는 그곳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격리 중환자 구역인 2104호 앞은 기묘한 활기로 가득했다.
“이송 준비 서둘러. 이사장님 특별 지시다. 오늘 밤 안으로 지하 3층 극비 수술실로 무조건 옮겨야 해.”
차가운 이송용 베드 주위로 사복을 입은 사설 경호원들과 원무과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산소마스크를 쓴 채 앙상하게 마른 소년이 베드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비켜.”
굵직하고도 서늘한 목소리가 복도의 공기를 얼려 버렸다. 이송 요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엘리베이터 홀 방향으로 쏠렸다. 의사 가운을 거칠게 휘날리며 걸어오는 강진태가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늑대의 그것처럼 무자비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강진태 선생? 여기는 응급외과 구역이 아닙니다. 이사회 직속 통제 구역이니 당장…….”
“닥치고 비키라고 했다.”
진태는 원무과 직원의 말을 칼로 자르듯 끊어 버렸다. 그리고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다가가 한우진의 이송용 베드 앞을 자신의 몸으로 가로막았다.
“무슨 짓입니까! 이건 엄연한 병원 규정 위반……!”
경호원 한 명이 진태의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진태가 그의 손목을 낚아채 아래로 꺾어 내렸다. 으드득하는 뼈 소리와 함께 경호원의 비명이 조용한 복도에 비수처럼 꽂혔다.
“손대지 마라. 이 환자는 지금부터 내 전담이다.”
“강 선생!”
병실 안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한채아가 튀어나왔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머리칼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상태였다. 진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형용할 수 없는 공포와 불신이 서려 있었다.
“당신이……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윤태형 실장이 말한 집도의가 정말 당신이었어? 내 동생 심장을 떼어내기로 한 의사가…… 강진태, 너였냐고!”
채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이사회가 제시한 허울 좋은 ‘무상 치료 계약’에 속아 동생을 이곳에 입원시켰다. 동생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감언이설에 속아 서명했던 서류들이, 결국 동생의 심장을 합법적으로 강탈하기 위한 올가미였음을 그녀는 방금 전에야 깨달은 참이었다. 그리고 그 수술을 집도할 천재 외과의가 바로 자신이 믿었던 강진태라는 사실에 영혼이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진태는 채아의 원망 서린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차가운 이성이 내려앉았다.
“한채아, 정신 똑바로 차려.”
진태가 그녀의 양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저놈들이 너한테 서명하게 한 건 기증 동의서가 아니라 사형 집행서다. 네 동생은 뇌사가 아니야. 확장성 심근병증으로 인한 심부전일 뿐, 뇌 기능은 멀쩡해. 저들은 멀쩡한 아이의 가슴을 열고 심장을 꺼내 가려는 거다.”
“그, 그치만 윤 실장이…… 미국에서 구한 대체 장기가 있다고 했어. 그래서 우진이를 먼저 이식 대기 상태로 이송해야 한다고…….”
“그 대체 장기라는 게 바로 네 동생의 심장이야. 수혜자는 태성그룹 이진우고.”
진태의 목소리는 얼음송곳처럼 예리했다. 채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거짓말이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진태의 눈빛에는 추호의 거짓도 없었다. 이사회가 자신을 철저하게 기만했다는 사실이, 동생의 목숨을 담보로 한 추악한 거래였다는 진실이 그녀의 뇌리를 강타했다.
“아…… 아아…….”
채아의 무릎이 꺾였다. 그녀는 진태의 가운 자락을 움켜쥐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진태의 하얀 구두 위로 떨어졌다.
“진태야…… 제발…… 내 동생 좀 살려줘. 내가 바보였어. 내가 멍청해서 우진이를 죽일 뻔했어. 제발…… 우진이 좀 살려줘. 네가 천재라며. 뭐든 다 살려낸다며…….”
걸걸하고 당차던 마취과 조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남동생을 잃을 위기에 처한 나약한 누나의 처절한 절규만이 복도를 채웠다.
진태는 허리를 숙여 채아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울지 마. 내 수술대 위에서 죽는 환자는 없다. 그게 누구든.”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검은 양복을 입은 사설 경호원 대여섯 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선두에는 윤태형 실장의 비서가 서 있었다.
“강진태 선생. 이사회 결정 사안에 개입하는 건 업무방해 및 무단 가택침입에 해당합니다. 당장 환자에게서 떨어지십시오. 물리력을 행사해서라도 배제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경호원들이 품속에서 최루 가스 분무기와 삼단봉을 꺼내 들며 위협적으로 좁혀왔다. 일촉즉발의 상황.
진태는 주머니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내 비서의 얼굴을 향해 가볍게 던졌다. 허공에 날린 종이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그게 뭔지 읽어보고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진태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비서가 찌푸린 얼굴로 바닥의 서류를 주워 올렸다. 첫 페이지의 굵은 활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긴급 임시 처분 신청서 및 불법 장기 적출 모의 고발장] - 피고발인: 명인대학교 병원 기조실장 윤태형, 외과 과장 권세윤 외 이사회 전원. - 송달 처처: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의료범죄전담부 및 보건복지부 장기이식관리센터(KONOS).
“이, 이게 무슨…….”
비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내가 아르카디아 메인 서버에서 긁어모은 불법 이식 대기자 명단과 자금 세탁 내역이다. 이미 내 개인 보안 드라이브에서 외부의 신뢰할 수 있는 법무법인 세 곳으로 자동 발송되도록 세팅해 놨지.”
진태는 비아냥거리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 환자의 몸에 주삿바늘 하나라도 꽂히거나, 이 병실 밖으로 1센티미터라도 이동하는 순간, 그 고발장은 즉시 검찰청 검사 집무실 테이블 위로 떨어진다. 명인대 병원이 불법 살인 장기 적출의 온상으로 뉴스 메인을 장식하고 싶다면,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봐.”
“강진태…… 네놈이 미쳤구나!”
비서가 부르르 떨며 소리쳤지만, 경호원들은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대기업과의 유착과 불법 장기 이식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순간, 자신들은 물론이고 윤태형 실장조차 파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 권력이라는 거대한 멧돼지도 법과 사회적 매장이라는 덫 앞에서는 한낱 짐승에 불과했다.
“물러서.”
진태가 나지막이 명령했다. 경호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완벽한 제압이었다. 이사회의 더러운 탐욕을 그들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법적 대항책으로 짓밟아 버린 순간이었다.
진태는 망설임 없이 한우진의 병상으로 다가갔다.
이제 진짜 싸움이 남았다. 아이를 살려야 했다.
진태는 눈을 감았다가 크게 떴다. 그의 동공이 기괴하게 풀리며, 시야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사신의 생명 장부, 활성화.’
[환자: 한우진 (남, 14세)] [주요 진단: 확장성 심근병증(DCM), 말기 심부전, 다발성 장기 쇠약(MODS) 진행 중] [장기 괴사율: 심근 68%, 신장 35%, 간 20%] [안전한 수술 경로: 대동맥-폐동맥 캐뉼라 삽입 후 좌심실 보조장치(LVAD) 거치 경로 탐색 중……] [잔여 수명: 07일 12시간 11분]
붉은색 반투명한 장부의 텍스트들이 우진의 가슴팍 위로 입체적으로 오버레이되었다. 심장의 괴사율이 무려 68%에 육박해 있었다. 관상동맥의 흐름은 실핏줄처럼 가늘었고, 좌심실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쿵!
장부를 들여다보는 순간, 진태의 가슴 속에서 쇠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이 발생했다.
“컥……!”
진태의 입에서 뜨거운 핏방울이 울컥 쏟아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심장이 분당 180회 이상의 속도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심실빈맥(Ventricular Tachycardia)이었다. 눈앞의 한우진이 서너 명으로 겹쳐 보이며 극심한 현기증이 덮쳤다.
한 번에 환자의 정밀 장기 상태와 잔여 수명을 동시에 투시한 페널티였다. 사신이 그의 심박을 가차 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한우진을 살리기도 전에 자신의 심장이 먼저 멈출 판이었다.
“강 선생! 피를……!”
채아가 비명을 지르며 진태를 붙잡으려 했다.
진태는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도 이를 악물었다. 그의 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자신의 왼쪽 가슴팍으로 향했다. 셔츠 깃을 거칠게 찢어발기자, 살갗 위에 붙어 있던 살구색 패치가 드러났다.
2화에서 채아가 그의 급사를 막기 위해 건넸던 특수 부정맥 억제 패치.
진태는 망설임 없이 손바닥으로 그 패치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패치 중앙의 미세 침들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며, 초고농도로 농축된 항부정맥제 아미오다론(Amiodarone)과 니트로글리세린 복합 약물이 미세 혈관을 통해 심장으로 다이렉트하게 뿜어져 들어갔다.
화아아악!
얼음물을 가슴에 들이부은 듯한 극렬한 냉증이 전신을 지배했다. 미친 듯이 요동치던 심장의 폭주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이 겹쳐 보이던 시야가 하나로 합쳐지며, 붉은색 생명 장부의 숫자들이 선명하게 뇌리에 박혔다.
“살아났어…….”
진태가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채아가 건넸던 패치 덕분에, 사신의 페널티가 주는 심장 마비의 임계점을 기적적으로 넘어선 것이었다.
진태는 흐르는 입가의 피를 가운 소매로 거칠게 닦아냈다. 그리고 장부가 가리키는 붉은색 수술 경로를 노려보았다.
“서민수 녀석이 숨겨둔 과거 VIP 의뢰 차트…….”
진태의 뇌리에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서민수가 쥐고 있던 그 오진 차트 속 환자의 데이터와 지금 우진의 심장 상태가 기묘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서민수는 이미 이 불법 수술의 전조를 알고 있었던 거다.
“서민수, 네가 오진한 그 환자의 끝이 어떤지 똑똑히 보여주지.”
진태는 고개를 들어 채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완벽한 외과의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채아, 당장 마취 준비해. 이 수술은 내가 직접 집도한다. 다른 놈의 손에는 1초도 맡기지 않아.”
“진태야…… 응, 준비할게. 내가 마취기 잡을게. 무조건 살리자.”
채아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다시금 마취과 전문의로서의 날카로운 투지가 깃들었다.
***
우진의 이송용 베드를 밀며 진태와 채아는 급히 지하 응급수술실로 향했다. 복도는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진태는 알고 있었다. 이사회가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리 없다는 것을.
수술실 입구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파란색 수술실 자동문 위에 붉은색 ‘수술 중’ 표시등이 꺼져 있었다.
그러나 그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차가운 안경테 너머로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는 외과 과장 권세윤이었다. 그의 뒤에는 보안요원 대여섯 명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권세윤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 한 장을 진태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서류 상단에는 빨간색 국새 모양의 병원 이사회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여기까지 아주 잘 뛰어왔군, 강진태 선생.”
권세윤이 조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술은 불가능해. 방금 전 이사회 긴급 결의로, 이 시간부로 본관 지하 응급수술실 전체를 ‘설비 노후화 및 긴급 방역’을 이유로 영구 폐쇄 조치했다. 여기 공문 보이지?”
그는 공문을 진태의 가슴팍에 툭툭 치며 비아냥거렸다.
“이 방 안의 모든 의료 장비의 전원은 차단되었고, 가스 라인도 잠겼어. 들어가 봐 짜증만 날 거다. 환자를 살리고 싶으면 다른 병원으로 전원 알아보시지? 물론 가는 길에 이 아이의 심장이 버텨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권세윤의 눈동자가 승리감으로 잔인하게 빛났다. 수술실 자체를 폐쇄해 버리는 극단적인 조치. 이사회가 내놓은 최악의 악수이자, 진태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한 마지막 바리케이드였다.
진태의 시선이 권세윤의 손에 들린 공문에서, 굳게 닫힌 수술실 문으로 향했다.
과연 진태는 이 닫힌 문을 열고 한우진을 살려낼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