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무광 검은색 봉투의 표면은 기묘할 정도로 서늘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은 종이라기보다 정교하게 가공된 가죽에 가까웠다. 봉투 중앙에 압인된 아르카디아의 황금빛 왁스 실이 복도의 형광등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이사장님께서 직접 전하라고 하신 은밀한 제안입니다. 다음 주 예정된 대기업 후계자의 수술에 대한... 진짜 '조건'이 담겨 있습니다."
실장의 목소리는 낮고 정제되어 있었다. 기계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진태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진태는 대답 대신 봉투의 실을 뜯었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왁스가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빳빳한 영문 계약서와 한 장의 무기명 보증 수표였다. 수표 표면에 인쇄된 숫자가 진태의 시야에 박혔다.
일시불 십억 원. 그리고 수술 성공 시 지급될 추가 인센티브 삼십억 원.
대학병원의 정교한 연봉 체계나 건강보험 수가의 범주를 아득히 초월한, 오직 법망의 바깥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비즈니스급 액수였다.
"이 수술의 집도의가 되어 주십시오. 강 교수님께서 응급실에서 푼돈을 만지며 썩기에는 그 손기술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실장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다.
"이 금액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아르카디아의 정식 일원이 되신다면, 명인대 병원 이사회는 교수님께 부와 명예, 그리고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초법적인 권한을 보장할 것입니다."
옆에 서 있던 한채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수표와 진태의 옆얼굴을 번갈아 오갔다. 그녀의 눈동자에 당혹감과 배신감이 뒤섞인 채 일렁였다.
진태는 표정을 지웠다. 수표를 가볍게 튕기며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액수가 제법 그럴듯하군요."
"진태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채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평소의 걸걸한 입담은 간데없고, 날 선 경악만이 복도를 채웠다.
진태는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실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이사장님의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수술방의 모든 통제권은 제가 가집니다. 어설픈 이사회의 간섭이나 권세윤 과장 같은 자들의 훈수는 사절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 수술 전에 아르카디아의 설비와 환자 상태를 직접 점검해야겠습니다."
실장의 눈에 만족스러운 빛이 스쳤다. 돈과 권력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인간은 없다는 확신이 그의 얼굴에 가득 피어올랐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강 교수님. 아르카디아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내일부터 바로 출입 권한을 등록해 드리지요."
실장이 가볍게 묵례를 하고 돌아섰다. 구두 굽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복도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실장의 모습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채아가 진태의 멱살을 잡을 듯이 다가왔다. 그녀의 눈에 실망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너 미쳤어? 저 인간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몰라서 그래? 아르카디아에서 벌어지는 수술이 어떤 건지 뻔히 알면서 그걸 덥석 물어?"
"돈을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진태의 목소리는 철저히 건조했다.
"뭐? 돈? 강진태, 너 진짜 돈독 올랐냐? 환자 목숨을 수치로 보면서 사신이랑 계약까지 한 인간이, 고작 저 이사회 놈들이 던져주는 푼돈에 영혼을 팔겠다고?"
"비켜."
진태가 냉정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순간, 진태의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발생했다. 사신의 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한 대가인 부정맥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야가 겹쳐 보이고,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각혈의 기운을 억누르며 진태가 비틀거리자, 채아의 눈이 매섭게 가늘어졌다. 그녀는 진태가 걸치고 있던 수술복 단추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진태의 왼쪽 가슴팍, 심장 바로 윗부분에 살을 파고들 듯 붙어 있는 특수 부정맥 억제 패치가 보였다. 채아가 지난번 그의 급사를 막기 위해 직접 조제해 붙여준 약물 패치였다. 패치는 진태의 불규칙한 심박에 반응하여 실시간으로 녹색 빛을 깜빡이며 미세 약물을 주입하고 있었다.
"이딴 거 붙이고 목숨 구걸하면서, 결국 저 쓰레기들 밑으로 기어들어 가겠다고?"
채아의 손끝이 패치 모서리에 닿았다. 당장이라도 뜯어낼 기세였다. 이 패치가 떨어지는 순간, 진태의 심장은 치명적인 세동을 일으키며 멈출 것이 틀림없었다.
"뜯어봐."
진태가 피가 섞인 침을 삼키며 낮게 읊조렸다.
"그럼 내 수술은 여기서 끝이고, 저 안에서 죽어가는 환자들도 전부 끝이겠지. 네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마음대로 해."
채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진태의 눈빛에는 흔들림 없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비열하게 돈을 쫓는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진태의 본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사회의 더러운 수술을 맡겠다는 선언은 그 자체로 배신이었다.
"더러운 자식."
채아가 손을 거두며 차갑게 내뱉었다.
"더는 내 패치로 네 그 잘난 목숨 연명할 생각 마. 다음부턴 심장이 터지든 말든 신경 안 쓸 테니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락커룸 복도를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발소리가 진태의 불규칙한 심장 박동 소리와 겹쳐 들렸다.
진태는 가슴 움켜쥐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패치에서 흘러나오는 약물이 혈관을 타고 돌며 터질 것 같던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시야의 복시 현상이 서서히 걷히고 초점이 돌아왔다.
진태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오해하는 편이 낫지.'
이사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권세윤과 윤태형이 구축해 놓은 아르카디아의 철옹성을 깨부수려면,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 내부의 치명적인 비밀을 손에 쥐는 수밖에 없었다. 돈에 눈이 먼 천재 의사. 이사회에게 이보다 더 이용하기 좋은 사냥개는 없을 터였다.
***
사흘 뒤, 21층 VIP 전용 병동 '아르카디아'.
이곳은 지하 1층의 응급외과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소독약 냄새 대신 은은한 아로마 향이 복도를 채우고 있었고, 바닥은 이탈리아산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발소리조차 흡수했다. 사설 보안요원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강 교수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실장이 진태를 맞이했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진태는 아르카디아의 깊숙한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이 다음 주에 교수님께서 집도하실 특별 수술실입니다. 모든 장비는 세계 최고 사양으로 세팅되어 있습니다."
실장이 가리킨 수술실은 대학병원 표준 규격을 아득히 뛰어넘는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이브리드 수술대와 실시간 3D 혈관 조영 장비가 위용을 자랑했다.
진태는 무표정한 얼굴로 수술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장비가 아닌, 구석에 배치된 서버 연동 컴퓨터와 캐비닛으로 향했다.
"수술 전에 환자의 이전 차트와 정밀 검사 데이터를 완벽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아르카디아 내부 서버의 접근 권한을 열어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이미 이사장님의 재가가 떨어졌습니다."
실장이 태블릿을 건넸다. 아르카디아의 핵심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는 마스터 보안 카드가 내장된 기기였다.
"필요하신 정보는 무엇이든 확인하십시오. 저희는 교수님의 완벽한 수술만을 바랍니다."
실장이 다른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수술실에는 오직 진태 혼자만이 남았다.
진태는 즉시 태블릿을 켜고 보안 코드를 입력했다. 화면에 아르카디아의 비공개 환자 명단과 수술 이력이 쏟아져 나왔다.
진태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동시에 그의 시야에 '사신의 생명 장부'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뇌리를 찌르는 듯한 두통과 함께 눈앞의 텍스트들이 붉은색 숫자로 치환되어 매핑되었다.
[장기 적출 및 이식 대기자 매칭 데이터베이스]
단순한 VIP 치료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사회가 암암리에 운영해 온 불법 장기 밀매 및 이식 수술의 거대한 장부였다.
"이 미친 인간들..."
진태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장부에는 대한민국 정재계의 핵심 기득권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현직 국회의원, 대기업 회장, 사법부의 고위 인사들까지. 그들의 이름 옆에는 붉은색으로 그들의 잔여 수명과 필요한 장기 목록이 계량화되어 표시되어 있었다.
[이식 수혜자: 국회의원 김창선 / 잔여 수명: 03개월 / 이식 필요 장기: 신장] [이식 수혜자: 대성그룹 부회장 이진우 / 잔여 수명: 05개월 / 이식 필요 장기: 심장]
그 아래에는 그들에게 장기를 기증하기로 예정된 '공여자'들의 목록이 있었다. 하지만 기증자들의 신원은 정상적인 기증 절차를 거친 이들이 아니었다. 행려병자, 불법 체류자, 혹은 병원의 막대한 빚을 감당하지 못해 장기 포기 각서에 서명한 채무자들이었다.
이사회의 추악한 민낯이 고스란히 담긴 디지털 장부였다. 이들은 아르카디아라는 초법적 공간을 활용해,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약자들의 목숨을 도축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진태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사신의 페널티로 인한 부정맥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
'윽...'
복시 현상이 심해지며 태블릿의 글자들이 겹쳐 보였다. 진태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팍의 패치에서 미세한 진동과 함께 시원한 약물이 퍼져나가지 않았다면, 이미 뇌출혈로 쓰러졌을 압박감이었다. 채아가 준 패치 덕분에 그는 뇌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 속에서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진태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태블릿 화면을 아래로 쓸어내렸다. 이사회의 목줄을 쥘 치명적인 증거들을 자신의 개인 보안 드라이브로 복사해 전송하기 시작했다. 데이터 전송률을 나타내는 게이지가 빠르게 올라갔다.
[전송 완료: 100%]
병원 기득권의 가장 깊고 어두운 비밀을 손에 넣은 순간이었다. 이 자료만 있으면 윤태형 실장과 권세윤 과장, 그리고 이사장까지 단번에 단두대로 보낼 수 있었다. 가슴 속에서 차가운 흥분이 치밀어 올랐다. 돈에 눈이 먼 척 적진의 심장부에 들어온 보람이 있었다.
그때, 다음 주 예정된 불법 수술 대기자 명단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가 자동으로 열렸다.
[수술 예정일: 10월 14일] [수혜자: 태성그룹 후계자 이진우 (심장 이식)] [공여자 코드: DH-9042]
진태는 무심코 공여자 코드의 상세 정보를 클릭했다. 공여자의 신상 명세와 함께 첨부된 정밀 심전도 그래프, 그리고 인적 사항이 화면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옆에 첨부된 환자의 사진을 본 순간, 진태의 손가락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소년이 환자복을 입은 채 맑게 웃고 있었다. 심각한 확장성 심근병증을 앓고 있는 듯, 입술이 퍼렇게 질려 있었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는 아이였다.
그 소년의 얼굴은 진태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채아의 락커룸 사물함 안쪽에 소중하게 붙어 있던 사진 속 주인공.
진태의 시선이 빠르게 아래로 향했다. 공여자의 법정 대리인이자 보증인 란에 적힌 이름이 그의 시야를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보호자 관계: 누나] [보호자 성명: 한채아]
진태의 심박수가 한계를 넘어 치솟기 시작했다. 패치조차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폭발적인 부정맥이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그녀의 불치병을 앓는 남동생이, 다음 주 자신이 집도해야 하는 아르카디아의 불법 심장 이식 수술의 '심장 공여자'로 등록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태블릿 화면의 붉은색 생명 장부 숫자가 진태의 눈앞에서 피처럼 붉게 타올랐다.
[공여자 잔여 수명: 07일 12시간 24분]
소년의 심장을 적출해 대기업 후계자에게 이식하는 수술. 그 수술의 집도의가 바로 자신, 강진태였다.
진태의 손에서 태블릿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어둠 속에서 사신의 서늘한 비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