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뜨겁고 끈적한 선홍빛 혈액이 진태의 얼굴과 안경, 그리고 그의 시야를 완전히 뒤덮으며 사방으로 튀었다.

모든 것이 붉은 피로 물든 절대 암흑 속에서, 우진의 혈압이 바닥으로 처박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강 선생! 피가, 피가 안 멈춰요! 바이탈 떨어집니다! 60…… 50 밑으로 내려가요!”

채아의 다급한 비명이 어둠을 찢었다.

수동 앰부 백을 짜는 그녀의 손길이 가쁘게 떨렸다. 모니터마저 꺼진 암흑 속에서 환자의 생명력은 1초에 수개월씩 허공으로 증발하고 있었다.

진태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니들 홀더를 내려놓지 않았다. 안경 너머로 들어오는 시야는 이미 붉은 막에 가로막혀 암전 상태나 다름없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에 엉겨 붙은 피가 점막을 자극해 쓰라린 통증을 유발했다.

그는 안경을 거칠게 벗어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라이트 더 가까이 대.”

“보이지도 않는데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블라인드 클램핑(Blind clamping)이라도 하겠다는 건데? 그랬다간 대동맥 후벽까지 다 찢어져!”

“시끄러우니까 불이나 비춰.”

진태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왼손 검지손가락을 뻗어 뿜어져 나오는 혈류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뜨거운 고압의 혈액이 손가락 끝을 때렸다. 맥박의 진동, 조직의 찢어진 단면, 헐거워진 외막의 질감. 오직 끝이 무뎌진 촉각만이 어둠 속에서 유일한 나침반이 되었다.

[경고: 잔여 수명 1분 15초] [경고: 잔여 수명 1분 02초]

눈앞에 명멸하는 사신의 생명 장부가 미친 듯이 붉은 경고등을 뿜어냈다.

그와 동시에 진태의 가슴 깊은 곳에서 억눌린 통증이 치솟았다. 쿵, 콰광! 심장이 갈비를 뚫고 나올 것처럼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사신의 능력을 한계까지 쥐어짜 맹인 집도를 감행한 대가였다. 시야가 둘로, 셋으로 쪼개지는 복시 현상이 뇌를 난도질했다. 입안에서 비릿한 철분이 울컥 올라왔다. 각혈의 전조였다.

‘여기서 무너지면 끝이다.’

이빨을 악물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비정상적인 빈맥으로 폭주하며 뇌로 가는 산소를 차단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서늘하고 끈적한 손길이 진태의 뒷목을 덮쳤다.

착.

목덜미의 피부를 타고 얼음물 같은 서늘함이 혈관 속으로 빠르게 침투했다. 폭주하던 심장의 기외수축이 거짓말처럼 잦아들며 일정한 리듬을 찾기 시작했다. 흐릿해지던 시야의 잔상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정신 차려, 강진태.”

채아의 거친 숨소리가 귀밑에서 들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진태의 부착 부위를 꾹 누르고 있었다.

“네가 준 특수 부정맥 억제 패치야. 네 놈 심장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려서 붙였으니까, 뒈질 때 뒈지더라도 내 동생 숨통은 붙여 놓고 뒈져.”

2화에서 진태가 채아에게 건넸고, 채아가 만약을 대비해 늘 품고 다니던 그 패치였다. 심장의 폭주가 진정되자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고맙군.”

진태는 왼손 끝으로 찢어진 측부 동맥의 기부를 정확히 압박했다. 뿜어져 나오던 유혈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프롤렌 5-0, 다시.”

“여기.”

채아가 어둠 속에서 감각적으로 니들 홀더를 진태의 손바닥에 쥐여 주었다.

진태는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을 뜰 필요가 없었다. 머릿속 장부가 그려내는 3차원의 붉은 궤적이 혈관의 주행 경로를 실시간으로 뇌리에 직접 매핑하고 있었다.

사각, 사각.

어둠 속에서 실이 조직을 관통하는 마찰음만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진태의 손놀림은 기계적이고도 정밀했다. 0.1밀리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촉각의 지도가 그의 손끝에서 완성되고 있었다. 찢어진 측부 동맥의 내막을 잡아채어 펠트로 보강한 대동맥 벽에 한 땀 한 땀 고정했다.

이것은 눈으로 하는 수술이 아니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사신과의 경계선상에서 벌이는 처절한 무도였다.

***

같은 시각, 참관실의 유리에 이마를 맞대고 있던 서민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두컴컴한 수술실 내부. 스마트폰 조명 두 개가 비추는 희미한 실루엣 사이로, 피투성이가 된 강진태의 손끝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서민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불이 꺼진 상태에서, 그것도 대동맥과 측부 동맥이 동시 파열된 초응급 상황에서 저토록 침착하게 지혈 봉합을 해내고 있다니. 손끝의 감각만으로 혈관의 주행을 완벽히 파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신기(神技)였다.

그의 시선이 참관실 간이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는 차트 더미로 향했다.

그것은 강진태가 수술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서민수의 발밑에 내던지듯 던져두고 간 과거 VIP 의뢰 차트였다. 서민수는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고 그 차트를 비추었다.

차트의 환자 명명란에는 낯익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자신이 6개월 전, 명인대 병원 VIP 병동에서 집도하려다 돌연 수술 불가를 선언하고 회송 처리했던 대기업 임원의 기록이었다.

[진단명: 대동맥 박리 (Aortic Dissection Type A)] [특이사항: 기형적 분지 의증. 수술 중 박리 진행 위험으로 보존적 치료 권장.]

서민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당시 자신은 그 환자의 대동맥 하부에서 발견된 기형 혈관을 ‘단순한 선천적 기형 분지’로 판단했다. 건드리면 터질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수술을 포기했었다.

그러나 차트의 공란 위에 진태의 날카로운 필체로 적힌 붉은색 글씨가 그의 안구를 찔렀다.

‘오진. 단순 기형 분지가 아님. 하행 대동맥의 압력을 분산하는 유일한 측부 순환 혈관(Collateral vessel)임. 본 혈관을 차단하거나 방치할 시, 혈업 상승으로 인한 상행 대동맥의 급격한 파열 유발 가능성 100%. 집도의 서민수의 해부학적 이해 부족으로 인한 수술 포기.’

“아…….”

서민수의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머릿속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지금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한우진의 상태와 정확히 일치했다.

자신은 한우진의 흉부를 열었을 때도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 혈관을 쓸모없는 기형 분지라 여겨 방치했고, 결국 그 방치가 이 끔찍한 파열과 대출혈을 불러온 것이다.

자신이 늘 자랑하던 ‘정석’과 ‘원칙’은 그저 무지와 나태를 포장하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했다.

“내가……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어.”

서민수는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자신이 천재라고 믿었던 오만이, 의학의 정점에 서 있다고 자부하던 엘리트 의식이 강진태가 던져놓은 단 몇 장의 차트와 어둠 속의 집도 앞에서 처참하게 구겨져 먼지가 되었다.

***

“서민수.”

수술실 인터컴을 통해 흘러나온 진태의 차가운 목소리가 참관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서민수는 멍한 눈으로 인터컴 스피커를 바라보았다.

“거기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네 눈으로 똑똑히 봐라.”

진태는 피로 물든 손가락을 움직여 마지막 노트를 묶었다. 타이(Tie)를 세 번 연속으로 돌리며 매듭을 완벽하게 고정했다.

“네가 기형 분지라고 무시하며 방치했던 그 혈관이, 이 환자의 대동맥을 지탱하던 마지막 생명줄이었다. 네 그 얄팍한 정석이라는 잣대가 환자의 목숨을 낭떠러지로 밀어 넣은 거야.”

“강, 강 선생…….”

“의사 면허가 아깝군.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변이는 모두 기형이라 부르며 도망치는 게 네가 말한 정석인가? 수술대 위에서 도망친 놈은 의사가 아니라 방관자일 뿐이다.”

서민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온몸이 수치심과 절망감으로 사정없이 떨렸다. 강진태의 독설은 칼날보다 예리하게 그의 심장에 박혔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지금 어둠 속에서 환자를 살려내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고 의심했던 변칙의 천재, 강진태였으니까.

위이이이잉——!

그때,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무거운 진동음이 울려 퍼지며 수술실 천장의 적색 비상등이 꺼졌다.

탁! 탁! 탁!

백색의 무영등이 차례대로 불을 밝히며 수술실 내부를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었다. 비상 발전기가 마침내 가동을 시작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광명에 채아는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내 빛 속에서 드러난 우진의 가슴팍을 바라본 그녀의 입술이 경련하듯 벌어졌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던 지옥의 광경은 온데간데없었다.

완벽하게 재건된 상행 대동맥과, 그 아래로 매끄럽게 연결되어 튼튼하게 요동치고 있는 측부 순환 혈관이 보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박힌 프롤렌 실들은 마치 기계가 꿰맨 것처럼 정교했다.

피 한 방울 새어 나오지 않는 완벽한 무결성.

“바이탈…… 바이탈 올라옵니다!”

순환기 간호사가 울음 섞인 소리로 소리쳤다.

“혈압 110에 70, 맥박 82회 정형(Normal Sinus Rhythm)입니다! 가스 분석 결과도 정상 범위로 복귀하고 있어요!”

동시에 진태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사신의 생명 장부가 요동치며 색을 바꾸었다. 붉은 피의 경고등이 사라지고, 편안하고 투명한 녹색의 활자가 허공에 매핑되었다.

[환자 한우진 수술 성공] [잔여 수명: 52년 08개월 (안정)] [누적 보너스 조건 분석 완료: 사신의 계약 페널티 일부 상쇄]

쿵. 쿵. 쿵.

진태의 가슴 속에서 요동치던 부정맥의 통증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복시 현상도 사라지고 선명한 수술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온몸이 피와 땀으로 젖어 가운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진태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진태는 손에 쥔 타이 기구를 트레이 위에 툭 던져 놓았다.

“스킨 클로저(Skin closure)는 서민수 선생에게 맡기지.”

그가 참관실 유리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가서 네가 저지른 오진의 흔적을 제 손으로 꿰매며 속죄해라. 그게 네가 그나마 의사로서 남길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일 테니까.”

참관실 안에서 유리에 손을 얹은 채 서 있던 서민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자만심으로 가득 찼던 그의 어깨가 무력하게 꺾였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는 듯, 무거운 걸음으로 수술실 입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

수술실의 문이 열리고, 진태는 피투성이가 된 가운을 벗어 던지며 복도로 걸어 나왔다.

채아가 그 뒤를 따랐다. 그녀의 얼굴에는 동생을 살려냈다는 안도감과 진태를 향한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강진태. 너 진짜…….”

채아가 말을 잇지 못하고 진태의 팔을 붙잡으려던 바로 그 순간.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차가운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렸다.

탁, 탁, 탁, 탁.

정교하게 다듬어진 쓰리피스 수트를 입은 사내와, 그 뒤를 호위하듯 따르는 건장한 체구의 병원 보안요원 대여섯 명이 진태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기획조정실장, 윤태형이었다.

그의 안경 너머로 비치는 눈빛은 뱀처럼 차갑고 가혹했다. 가식적인 미소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오직 포식자의 살기만이 복도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수술이 아주 감동적으로 끝난 모양이군, 강진태 선생.”

윤태형이 걸음을 멈추며 비아냥거렸다.

진태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비켜라. 피곤하다.”

“그럴 수는 없지. 이제부터 자네가 가야 할 곳은 당직실이 아니라 다른 곳이니까.”

윤태형이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였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보안요원들이 일제히 진태와 채아의 주위를 포위하듯 좁혀왔다.

채아가 앞을 가로막으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윤 실장! 이게 무슨 짓이야? 방금 사람 목숨 살리고 나온 의사한테 무슨 행패냐고!”

“의사?”

윤태형이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품 안에서 붉은색 직인이 찍힌 두꺼운 서류 한 장을 꺼내 진태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명인대학교 병원 이사회 결의서: 무단 장비 반출, 병원 자산 횡령 및 불법 무면허 사기 집도 혐의에 따른 구금 및 형사 고발 처분서]

“강진태. 자네는 오늘 이사회의 허가 없이 VIP 병동의 특수 이식 장비를 무단으로 반출했고, 미인가 약물을 사용해 환자를 생체 실험대 위에 올렸다. 이는 명백한 병원 자산 횡령이자 사기 집도 행위다.”

윤태형의 목소리가 복도 벽을 타고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이사장님의 직인이 찍힌 정식 처분서다. 자네는 이 시간부로 명인대 병원의 모든 진료 및 집도 권한을 박탈당하며, 관할 경찰서로 이송되기 전까지 병원 보안구역에 구금 처분된다.”

보안요원들이 진태의 양팔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사방이 꽉 막힌 복도, 그리고 윤태형의 손에 들린 붉은 직인의 서류.

마치 거대한 덫이 이빨을 드러내며 진태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는 순간이었다.

진태는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그의 무미건조한 입꼬리가 서서히 비틀려 올라갔다. 시야 우측 하단에서, 사신의 생명 장부가 다시 한 번 기괴한 빛을 발하며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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