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일의 손끝이 보기 좋게 떨렸다. 한채은이 내민 정식 임용 계약서를 움켜쥔 그의 손가락톱날 끝에서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수술실의 무거운 정적을 깼다.
그의 시선이 계약서의 붉은 직인과 백강현의 얼굴을 번갈아 오가는 순간, 강현의 망막 위로 푸른색 시스템 경고창이 무자비하게 명멸하기 시작했다.
[위험: 십이지장(Duodenum) 인접 장기 내 지연성 파열(Delayed rupture) 징후 감지.] [장막 하 출혈(Subserosal hemorrhage) 급증.] [환자 생존율: 42% -> 38%]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이명이 고막을 긁었다. 뇌압이 가파르게 상승하며 좌측 시야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흐려졌다. 등가교환의 대가였다. 환자의 생체 신호가 요동칠 때마다 강현의 뇌 신경은 과부하를 견뎌내야 했다.
강현은 오른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굳어 들어가는 손가락 끝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어금니를 사려 물며 시스템 연산 장치를 강제로 붙잡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유상일이 계약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기획조정실장 송우진의 승인 없이는 결코 발행될 수 없는 서류가 그의 눈앞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식 발령입니다, 유 과장님.”
한채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명확했다.
“백강현 선생은 이 시간부로 한국대병원 외상외과 소속 임상조교수입니다. 집도 자격을 논할 행정적 명분은 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상일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법적, 행정적 절차를 무기로 강현을 쫓아내려던 그의 계획이 첫 단계부터 완전히 일그러진 것이다.
하지만 유상일은 쉽게 물러설 인간이 아니었다. 시기심과 독기로 가득 찬 그의 눈동자가 수술대 위의 환자에게로 향했다.
“임용? 좋아. 하지만 임용 절차와 수술실에서의 지휘권은 별개의 문제야! 내가 이 병원 외과 과장이고, 이 환자는 일반외과에서 인계받아야 할 케이스다. 백 조교수, 당장 메스 내려놓고 이 수술실에서 퇴실해.”
그의 목소리에는 악의적인 독촉이 묻어났다. 어떻게든 강현의 손에서 환자를 빼앗아 가고, 자신이 수술을 마무리해 공적을 가로채려는 속셈이 뻔히 보였다.
“당장 나가라고 하지 않고 뭐 해! 들리지 않아?”
강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했다.
수술실을 가득 채운 것은 오직 환자의 바이탈 모니터 음뿐이었다.
*삐. 삐. 삐. 삐.*
BPM 105. 혈압 90/55 mmHg.
강현의 무거운 침묵이 흐를수록, 수술실 안의 공기는 기묘하게 왜곡되며 압박감을 더해갔다. 아무런 대꾸도, 반박도 하지 않는 강현의 무표정한 태도에 오히려 초조해진 것은 유상일이었다. 침묵은 때로 그 어떤 실언보다 강력한 심리적 올가미가 된다.
유상일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왜 말이 없어? 꿀 먹은 벙어리야? 과장의 지시가 우스워? 봐라, 지금 환자 바이탈이 이렇게 안정적인데 네놈이 여기서 시간 끌 이유가 뭐가 있어! 그까짓 마이너한 수치 흔들리는 거 가지고 유난 떨지 마라. 바이탈 모니터 따위 기계 덩어리가 삑삑대는 거에 일희일비하는 건 실력 없는 삼류 의사들이나 하는 짓이야!”
그의 입에서 기어코 실언이 터져 나왔다.
환자의 생명선인 바이탈 모니터를 ‘기계 덩어리’로 비하하고, 불안정한 수치를 방치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는 발언이었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채은의 손가락이 태블릿 PC의 녹음 중지 버튼을 조용히 눌렀다. 유상일의 신경질적인 목소리는 고스란히 디지털 파일로 박제되었다. 징계 청문회에서 그의 목줄을 죌 또 하나의 완벽한 덫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과장님.”
그때, 수술대 맞은편에서 조용히 리트랙터(Retractor)를 잡고 있던 임민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강현을 향한 깊은 신뢰로 빛나고 있었다.
“행정 안전 가이드라인 제3조에 따르면, 활동성 출혈이 의심되는 응급 손상 통제 수술(Damage Control Surgery) 중에는 집도의의 동의 없이 수술팀을 교체할 수 없습니다. 저는…… 백강현 교수님의 세컨드 어시스트로서 끝까지 이 수술을 보조하겠습니다.”
소심하고 겁 많던 전공의의 입에서 나온 예기치 못한 반발에 유상일의 눈이 뒤집혔다.
“임민준! 너 지금 감히 누굴 가르치려 들어?”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는 것뿐입니다.”
임민준은 침을 꿀꺽 삼키며 강현의 곁을 든든하게 지켰다. 강현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흔들림 없는 태도가, 나약했던 임민준마저 변화시키고 있었다.
강현이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유상일을 관통해 그 너머의 허공을 향하는 듯 차가웠다.
“유 과장님.”
강현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수술실의 소음을 일순간에 집어삼켰다.
“환자의 바이탈이 기계의 장난으로 보이십니까?”
“뭐, 뭐라고?”
“눈이 있으시면 직접 보시죠.”
강현은 한채은에게 손짓했다. 채은이 즉각 포터블 확대경과 수술용 카메라의 초점을 십이지장 후벽 깊은 곳으로 맞추며 모니터 화면을 전환했다.
화면에 비친 것은 십이지장 장막의 미세한 틈새였다. 일반적인 육안으로는 그저 젖어 있는 조직처럼 보이는 부위였다.
강현이 끝이 무딘 겸자(Forceps)로 그 틈새를 아주 살짝, 단 1밀리미터만큼 벌렸다.
그 순간.
조직의 미세한 균열 사이로 투명하고 끈적한 황갈색 액체가 아주 미세하게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담즙(Bile)이었다.
“……!”
유상일의 눈동자가 대번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렸다.
“이건…….”
“담즙성 괴사 삼출물(Biliary necrotic exudate)입니다.”
강현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통계적인 분석만이 흘러나왔다.
“십이지장 후벽의 장막 하 괴사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3년 전, 과장님이 놓치셨던 그 환자의 케이스와 정확히 일치하는 진행 양상입니다. 당시 과장님은 이 미세한 담즙 유출을 간과하고 봉합하셨죠. 그리고 환자는 이틀 뒤 복막염(Peritonitis)과 패혈성 쇼크(Septic shock)로 사망했습니다.”
“그, 그것은……!”
“지금 이 환자 역시 동일한 동맥 변이로 인해 십이지장 혈류가 차단된 상태입니다. 광범위 절제(Extensive resection)와 재건술을 즉각 시행하지 않으면, 이 환자 또한 12시간 안에 사망합니다.”
강현이 유상일의 면전에 대고 명확한 의학적 팩트를 폭격하듯 쏟아냈다.
유상일이 3년 전 저질렀던 치명적인 의료 사고의 원인과, 지금 눈앞의 환자가 처한 위기가 완벽하게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유상일의 무능함과 과거의 과실이 수술방에 모인 모든 의료진 앞에서 잔인하게 발가벗겨졌다.
수술방의 간호사들과 마취과 의사의 시선이 일제히 유상일에게 쏠렸다. 경멸과 불신이 가득 담긴 눈빛들이었다.
유상일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고, 얼굴은 붉다 못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단 한 번의 단서로 적의 숨통을 완벽하게 끊어놓은, 침묵 뒤의 일격이었다.
[알림: 정확한 병소 진단 완료.] [구조 포인트 500포인트 획득.] [오른손 신경 마비 수치 일시적 완화: 35% -> 20%]
손가락 끝으로 짜릿한 전류와 함께 힘이 되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강현은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메스.”
수술 간호사가 10번 메스를 강현의 손바닥에 정확히 밀착시켰다.
강현의 눈동자에 시스템의 궤적이 정교하게 그려졌다. 절제해야 할 십이지장 괴사 부위의 경계선이 붉은 가이드라인으로 망막 위에 투영되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신의 손길이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메스 끝이 환자의 조직에 닿기 직전.
*비--------*
마취기 모니터에서 들어본 적 없는 기괴하고 날카로운 금속성 경보음이 수술실 전체를 찢어발기듯 울려 퍼졌다.
[경고!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한 급격한 혈압 저하!] [BP: 90/55 -> 50/30 mmHg] [BPM: 105 -> 145 (Supraventricular Tachycardia)] [위험: 심정지(Cardiac Arrest) 임박!]
강현의 눈앞에 붉은색 경고창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갑작스러운 미지의 혈압 급락. 환자의 생명선이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에피네프린 1앰플 인젝! 셀 세이버(Autotransfuser) 라인 빨리 잡아요!”
마취과 의사의 날카로운 고함이 수술실 벽을 때렸다. 어시스트를 서던 전공의들의 손길이 거칠게 엉켰다. 수술실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진공 상태처럼 희박해졌다.
*비--- 비--- 비---*
경고음의 간격이 포화 지방처럼 끈적하고 빠르게 좁혀졌다.
[BPM: 145 -> 152] [BP: 50/30 -> 42/25 mmHg] [위험: 저혈량성 쇼크(Hypovolemic Shock) 및 심박출량 급감.]
“이, 이건 내 과실이 아니야!”
유상일이 뒷걸음질을 치며 수술대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등 뒤로 차가운 타일 벽이 닿았다.
“백강현 네놈이 십이지장 후벽을 무리하게 박리하다가 주요 혈관을 건드린 거다! 기어코 사고를 치는군!”
비겁한 책임 회피였지만, 그의 동공은 공포로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3년 전, 자신이 떨어뜨렸던 그 어둠의 심연이 다시 눈앞에 아가리를 벌린 것을 직감한 탓이다.
강현은 유상일의 비명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온 신경은 망막 위에 띄워진 붉은색 시스템 패널에 집중되어 있었다.
[알림: 돌발 위험 요인 분석 중……] [원인: 우측 부간동맥(Anomalous right hepatic artery)의 기각부(Origin) 박리(Dissection) 발생.] [원인 상세: 만성적인 담즙 노출로 인해 혈관벽이 극도로 약화된 상태에서, 혈압 변동으로 인한 내막 파열(Intimal tear) 유발.] [환자 생존율: 14%] [경고: 실패 시 등가교환 적용. 오른손 약지 및 새끼손가락 영구 마비 수치 20% 가산 (현재 누적 마비 수치 백업 중).]
‘동맥 박리…….’
단순한 출혈이 아니었다. 혈관 내부의 벽이 찢어지며 피가 혈관 외벽 사이로 밀고 들어가 통로를 막아버리는 최악의 초응급 상황이었다. 이대로 두면 간으로 가는 혈류가 100% 차단되는 것은 물론, 박리가 복강동맥(Celiac trunk) 본태까지 타고 올라가 복강 내 모든 장기가 괴사하게 된다.
“웅-”하는 고주파 이명이 강현의 귓전을 때렸다.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관자놀이의 혈관이 터질 듯 요동쳤다. 좌측 시야의 가장자리에 먹지를 흘린 듯한 미세한 암점(Scotoma)이 생겼다 흩어졌다. 뇌 신경이 시스템의 초고속 연산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신호였다.
강현은 왼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지 않았다. 흔들리는 시야를 억지로 고정하며, 오른손 끝에 잔존한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임 선생.”
강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예, 예! 교수님!”
“지금부터 복강동맥 기시부를 확보한다. 시야가 가려지면 환자는 즉사해. 리트랙터를 잡은 손, 단 1밀리미터도 흔들리지 마.”
“알겠습니다!”
임민준은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긴장했으면서도, 온 힘을 다해 리트랙터를 거머쥐었다.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겁쟁이 전공의의 눈에는 이제 두려움 대신, 집도의를 향한 맹목적인 신뢰가 들어차 있었다.
강현의 손가락이 십이지장 상부의 소망(Lesser omentum)을 가르고 들어갔다.
서전의 손끝 감각만으로 보이지 않는 후복막의 대동맥 분지점을 찾아내야 하는 신의 영역이었다. 일반적인 속도로는 불가능했다. 심장이 멈추기 전, 대동맥을 겸자(Clamp)로 막아 혈류를 차단해야만 박리를 막을 수 있었다.
[남은 시간: 45초.] [연산 가이드라인 활성화: 대동맥 분지점 투영율 95%]
강현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긴장으로 굳어지려던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시스템의 일시 복구 효과 덕에 기적처럼 부드럽게 꺾이며 깊은 복강 구석을 파고들었다.
서걱.
조직을 가르는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강현의 겸자가 환자의 대동맥 기시부를 정확히 포착했다.
“인테스티날 클램프(Intestinal clamp).”
간호사의 손에서 건네받은 클램프가 대동맥을 조여들었다. 순간, 솟구치던 혈류가 딱딱하게 굳어지며 출혈의 기세가 꺾였다.
“혈압 잡힙니다! BP 75/45로 소폭 반등!”
마취과 의사의 외침에 수술실 안의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였다.
강현의 망막에 떠오른 푸른색 수치들이 갑자기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경고! 환자의 심전도(ECG) 패턴 이상 감지.] [알림: 관상동맥(Coronary artery)으로의 급격한 혈류 역류 및 과부하 발생.]
*삐- 삐- 삐- 삐비비비비비비-*
경고음이 불규칙한 비명으로 바뀌었다. 모니터의 규칙적이던 파형이 뾰족하고 거친 톱날 모양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심실세동(Ventricular Fibrillation)이었다.
“V-fib입니다! 어레스트(Cardiac Arrest)!”
마취과 의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수술대 위의 환자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대동맥을 클램핑하면서 발생한 급격한 후부하(Afterload) 증가를 환자의 약해진 심장이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배가 완전히 열린 상태에서 발생한 심정지.
“디피브릴레이터(Defibrillator) 준비해! 당장 제세동기 가져와!”
유상일이 비명을 지르며 수술실 문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수술실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강현은 메스를 쥔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요동치는 모니터와 붉게 물든 복강 내부를 번갈아 응시했다.
여기서 클램프를 풀면 동맥 박리로 즉사하고, 클램프를 유지한 채 제세동을 치면 심장이 터져 나간다.
막다른 길이었다. 시야의 절반을 가린 검은 암점 너머로, 시스템의 생존율 수치가 잔인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환자 생존율: 3% -> 1%]
강현이 피로 물든 오른손을 환자의 흉골 아래, 횡격막 경계선 쪽으로 밀어 넣었다.
“백 교수! 지금 뭐 하려는 거야!”
한채은의 외침이 수술실을 울린 순간, 강현의 손끝이 거침없이 횡격막을 뚫고 심장 기저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