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송우진 기조실장의 손에 들린 태블릿 단말기가 붉은 빛을 토해내며 요란하게 울렸다. 액정 위로 선명하게 각인된 긴급 의료 서신. 대기업 태성그룹의 후계자 이진우의 바이탈은 이미 파멸을 가리키고 있었다. 3년 전 백강현을 나락으로 보냈던 그 오만하고 우아하던 송우진은 온데간데없었다. 허옇게 질린 얼굴로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겨우 놀리는 사내만이 강현의 앞에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백강현, 제발... 제발 한 번만 도와다오."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송우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징계위원회 회의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방을 가득 채운 침묵 속에서 송우진의 거친 호흡 소리만이 고막을 긁었다.

"무슨 일입니까."

강현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폭풍의 한가운데 서 있음에도 미동조차 없는 바위 같았다.

"태성그룹... 우리 병원 최대 대주주이자 의료원장 인사권을 쥐고 있는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다."

송우진이 침을 삼키며 제 손을 꽉 쥐었다.

"헬기 안에서 이미 두 번이나 심정지가 왔어. 뇌와 심장이 동시에 터져서... 지금 국내의 그 어떤 써전도 손을 대지 못하겠다고 고개를 젓고 있어. 이 환자가 죽으면... 병원뿐만 아니라 나도, 우리 모두가 끝장이다."

송우진이 강현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을 듯이 손을 뻗어왔다.

"이 환자를 살려라, 백강현.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주마. 3년 전의 일도, 기조실의 지위도, 네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다 들어줄 테니... 제발 이 수술을 맡아다오!"

그 순간, 강현의 뒤에 서 있던 한채은이 급히 걸어 나와 강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팽팽한 경계심이 서렸다.

"안 됩니다, 백 선생. 이건 함정이에요."

한채은이 송우진을 매섭게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미 사망 판정이나 다름없는 환자예요. 대량 골반강 손상에 대정맥 전면 단절입니다. 생존율이 제로에 수렴하는 환자를 굳이 백 선생에게 떠넘기려는 겁니다. 수술방에서 테이블 데스(Table Death)가 일어나는 순간, 송 실장은 모든 책임을 백 선생에게 전가할 거예요. 3년 전처럼 또다시 살인 누명을 뒤집어씌우려는 악성 킬링 트랩이라고요!"

한채은의 지적은 정확했다. 송우진이라는 인간은 본래 그런 자였다. 위기에 몰리면 타인을 밟고 올라서서 제 목숨을 부지하는 뱀 같은 존재.

유상일 외과 과장은 이미 직무가 정지되고 사법 고발이 결정되어 파멸했다. 하지만 송우진은 여전히 기조실장이라는 권력의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이 절망적인 수술을 성공하면 제 자리를 유지할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백강현의 무리한 집도로 인한 과실'로 꼬리를 자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강현은 뒤러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겁에 질린 송우진을 향해, 강현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포식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송 실장님."

강현의 목소리가 징계위원회실의 콘크리트 벽면에 부딪혀 낮게 공명했다.

"거래를 하려면, 판돈을 전부 걸어야지 않겠습니까?"

"판... 돈이라니?"

"제가 그냥 이 독이 든 성배를 마실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강현이 품 안에서 묵직한 USB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회의실 중앙 테이블 위에 툭,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송우진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유상일은 이미 넋이 나간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건 하이브리드 12층 특수 수술실 내부 구형 백업 서버 드라이브에서 적출해낸 3년 전 원본 로그 데이터 파일입니다. 당신들이 영구 삭제했다고 믿었던, 바로 그 원본 파일이지요."

강현의 손가락이 USB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에 뭐가 기록되어 있는지 말씀드릴까요? 3년 전 유상일 과장이 어설픈 가위질로 잘라먹었던 우심방 후벽의 미세한 '부동맥(Anomalous artery)' 변이 기록물. 유 과장은 환자의 해부학적 변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메스를 들이댔고, 대량 출혈이 발생하자 당황해서 수술방을 도망치듯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과실을 전부 대진의였던 나에게 덮어씌웠지."

송우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갔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강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더 낮아졌다. 서늘한 한기가 회의실을 감쌌다.

"유상일 과장이 수술실 수석 간호사에게 특정 응고 인자 약제를 의도적으로 누락 인도하도록 지시한 음성 녹취록도 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당신들이 합작해서 만든 완벽한 살인극의 전말이 이 작은 칩 하나에 다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백... 백강현..."

"이 증거들이 언론과 검찰에 넘어가는 순간, 한국대병원 카르텔은 공중분해됩니다. 송 실장님, 당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기조실장 자리는 물론이고, 평생 쌓아 올린 모든 명예가 시궁창에 처박히게 된다는 소리입니다."

송우진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강현이 제시한 팩트들은 그 어떤 법률적 방어막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물리적 증거들이었다. 완벽한 체크메이트였다.

"선택하십시오."

강현이 주머니에서 만년필 한 자루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서류 한 장을 꺼내 송우진의 코앞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태성그룹 후계자의 수술을 제가 집도하는 대가입니다. '한국대병원 카르텔의 모든 행정 지분 포기 각서'와 '하이브리드 수술실의 무기한 특수 집도권 영속 계약서'입니다. 여기에 서명하십시오. 내 손가락을 묶으려 했던 모든 행정 규정을 무력화하고, 앞으로 병원 내부의 그 어떤 세력도 내 집도 권한에 간섭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이건..."

"서명하지 않겠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나가겠습니다. 헬기 포트에 내릴 환자는 그대로 사망할 것이고, 당신은 의료원장 자리는커녕 교도소 독방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겠지요."

송우진의 눈에 절망과 공포가 교차했다. 이진우가 죽으면 자신은 끝장이다. 하지만 서명을 하면 백강현에게 병원의 심장부를 송두리째 내주는 꼴이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뱀의 목덜미를 움켜쥔 포식자의 손아귀는 단호했다.

바르르 떨리는 손이 만년필을 쥐었다. 송우진은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서류 하단에 자신의 서명과 기조실장 직인을 거칠게 찍어 눌렀다.

스윽.

서명이 완료되는 순간, 강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계약 성립이군요."

강현이 서류를 거두어 한채은에게 건넸다. 한채은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강현을 바라보았으나,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품에 넣었다.

바로 그 순간.

두구두구두구두구!

건물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한국대병원 서관 옥상 헬리포트에 닥터헬기가 착륙하는 진동이 벽면을 타고 전해졌다. 수술실의 붉은 경고등이 더욱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환자 들어옵니다!"

수술실 자동문이 열리며 이동식 침대가 거칠게 밀려 들어왔다. 침대 위에 누운 사내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골반강은 거대한 압착 사고로 인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져 있었고, 복부는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환자 바이탈! BP 50/30! HR 140! 산소포화도 측정 불가입니다!"

전공의 임민준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Ambu-bag을 짜내고 있었다.

"대정맥 전면 단절입니다! 헬기 안에서 이미 수혈용 팩 10개를 쏟아부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 어레스트(심정지) 오기 직전입니다!"

강현의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쿠우우웅!

머릿속을 직격하는 극심한 이명과 함께 두개 내압이 치솟았다. 좌측 시야의 절반 이상을 뒤덮은 어두운 암점이 강현의 안구를 옥죄어왔다. 뇌압 상승 지표가 머릿속에서 경고음을 울렸다.

[경고: 두개 내압(ICP) 25mmHg 돌파. 뇌 신경 과부하 발생.] [좌측 시야 차단율 60% 진행 중.]

지독한 통증이 관자놀이를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강현은 신음 한 자락조차 밖으로 내지 않았다. 오직 차가운 이성만이 그의 뇌리를 지배했다.

파아앗!

강현의 망막 위로 생명 구조 시스템의 계기판이 거대하게 펼쳐졌다. 환자의 신체 스캔 데이터가 붉은색 호가창처럼 실시간으로 갱신되기 시작했다.

[환자: 이진우 (남/28)] [진단: 외상성 대동맥 박리(TAAD Type A), 복합 장기 파열, 골반강 압착 골절 및 하대정맥(IVC) 전면 파열] [실시간 생존율: 0%]

이 수치. 소수점 아래의 가능성마저 완전히 거세된, 완벽한 죽음의 숫자 '0%'가 붉은 낙인처럼 강현의 시야 중앙에 박혔다.

"생존율 0%라..."

강현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메스를 쥐었다. 오른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의 마비 진행률은 이미 95%에 도달해 있었다. 손가락 끝이 단단하게 굳어 메스의 감각조차 희미했다.

하지만 강현은 주저하지 않았다. 시스템 포인트를 소모해 마비를 억제하는 연산을 강제로 구동시켰다.

[시스템 포인트 5,000pt 소모. 오른손 일시적 신경 동기화 집행.] [잔여 신경 유지 시간: 15분.]

"인투베이션 유지하고, 가온 수혈기 최고 속도로 올려."

강현의 목소리가 수술실 안의 소음을 단숨에 잠재웠다. 겁에 질려 있던 간호사들과 임민준이 그의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선생, 바이패스(Bypass) 준비해. 대동맥 박리 부위 먼저 잡고 바로 하대정맥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백 선생, 시야가... 좌측 눈 상태가 정상이 아니잖아요!"

한채은이 강현의 붉게 충혈되다 못해 실핏줄이 터져나가는 왼쪽 눈을 보며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상관없어."

강현이 수술용 헤드라이트를 고정하며 차갑게 대꾸했다.

"눈이 안 보이면, 손끝으로 보면 된다."

그것은 오만한 천재의 허세가 아니었다. 3년 동안 어둠 속에서 칼을 갈아온 써전의 집념이자, 시스템이 부여한 기회비용을 온전히 제 육체로 감당해 내겠다는 사투의 선언이었다.

강현이 환자의 흉부 위에 메스를 올렸다.

서늘한 쇠붙이의 감각이 굳어 있던 손가락 끝을 타고 짜릿하게 전해졌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박동했다. 좌측 시야는 이미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그의 오른손은 그 어떤 자보다 정교하게 길을 찾고 있었다.

"톱."

강현이 손을 뻗었다. 간호사가 멸균된 흉골 절개용 전기톱(Sternum Saw)을 그의 손바닥에 쥐여주었다.

위이이이이잉!

수술실을 찢어발길 듯한 날카로운 기계음이 고막을 때렸다. 이진우의 흉골 중앙에 톱날이 닿는 순간, 붉은 피가 강현의 마스크와 페이스 쉴드 위로 사정없이 튀었다.

치이이이익!

뼈가 갈려 나가는 매캐한 냄새가 수술실 안을 가득 채웠다. 강현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톱날을 밀어 넣었다. 환자의 가슴이 좌우로 열리며,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대동맥과 피바다가 된 흉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그 찰나였다.

강현의 망막 우측 하단에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깜빡이는 경고등이 켜졌다.

[위기: 시스템 내부 잔여 활성 지속 게이지 급감!] [사용자의 뇌 신경 과부하가 임계치를 초과했습니다. 시스템 유지 시간이 단축됩니다.] [14분... 12분... 9분...]

정밀한 연산을 실행하기도 전에, 시스템을 지탱하던 생명선이 미친 듯이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강현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시야의 어둠이 번져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골반강의 대출혈을 잡기도 전에, 시간이라는 가장 가혹한 적이 그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