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일이 바닥을 기었다.
번들거리는 대리석 타일 위로 짓겨진 무릎이 미끄러졌다. 그의 손자국이 콘센트 벽면에 허옇게 묻어났다. 수백만 원짜리 맞춤 정장 바지 가랑이가 흙먼지로 더러워지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3년 전의 가해자이자, 현직 한국대병원 외과 과장이라는 권위는 전선 다발을 움켜쥔 그의 손가락 끝에서 볼품없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탁.
백강현은 조용히 마이크의 구동 스위치를 올렸다. 미세한 하울링이 회의실 가득 찬 공기를 찢고 번졌다.
"유상일 과장님."
낮게 깔린 강현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회의실 구석구석을 내리눌렀다. 전선 코드를 쥐고 헐떡이던 유상일의 어깨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었다.
"코드를 뽑아도 소용없습니다. 이 회의실의 모든 시스템은 이미 외부 서버와 동기화되어 실시간으로 복제되고 있으니까요."
강현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유상일을 지나, 단상 가장 높은 곳에서 굳어 버린 기획조정실장 송우진에게로 닿았다. 늘 우아한 미소를 짓던 송우진의 입꼬리가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눈동자 주변의 미세한 혈관들이 붉게 터져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묵인하고 승인한 배후가 누구인지, 이제 정확히 짚고 넘어갈 시간입니다."
강현이 주머니에서 또 다른 소형 컨트롤러를 꺼내 가볍게 두드렸다.
윙 하는 기계음과 함께 회의실 천장에 매달린 보조 빔프로젝터가 동시에 가동되었다. 유상일의 비명 섞인 저항을 무력화하듯, 반대편 벽면에 더 거대하고 선명한 비디오 파일의 파형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음성 녹음이 아니었다. 하이브리드 12층 특수 수술실 내부 구형 백업 서버 드라이브 안, 깊숙이 숨겨져 있던 3년 전 사고 당시의 원본 로그 데이터와 실시간 통화 녹취록이 결합된 사운드 비디오 파일이었다.
[수술실 백업 드라이브 경로: /dev/sdb2/backup_log_3years_ago] [검출 데이터: 환자 강태윤 심장 후벽 부동맥(Anomalous artery) 변이 이미지 원본]
화면 가득 기형적으로 휘어 자란 2밀리미터 두께의 기형 부동맥이 붉은색 선으로 표시되어 나타났다. 유상일이 3년 전 집도 중 인지하지 못하고 절단해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했던, 그리고 그 과실을 덮기 위해 백강현에게 누명을 씌웠던 바로 그 결정적 증거였다.
그리고 스피커를 찢고 나오는 유상일의 목소리는 한층 더 노골적이었다.
- "응고 인자 카트는 일단 대기시켜. 백강현이가 집도 끝낸 다음에 넘겨줘도 안 늦어. 알아들었어? 어차피 사고 나면 그 새끼 손가락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니까."
회의실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단순히 과거의 과실을 덮은 것을 넘어, 최근 수술에서조차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사법적 함정을 파고 약제 투여를 의도적으로 무산 통제하려 한 불법 행위가 만천하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살인미수에 가까운 직무 유기이자 고의적 태업의 증거였다.
"이건... 이건 조작이야! 전부 저 자식이 나를 끌어내리려고 꾸민 음모라고!"
유상일이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강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목대에 핏대가 시퍼렇게 솟구쳤고, 침방울이 허공으로 튀었다. 그러나 회의실에 배석한 그 누구도 그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때, 회의실 뒤편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전공의 임민준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
"와, 이 정도 면직 시나리오면 청문회가 아니라 골든글로브 각본상감인데요? 과장님, 아니 유상일 씨.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십니까?"
민준의 어조는 비아냥을 넘어 확신에 차 있었다. 과거 강현의 그늘 아래서 겁에 질려 숨죽이던 소심한 전공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빛에는 선배 써전을 향한 무한한 신뢰와, 부패한 권력을 향한 당당한 적개심이 가득했다.
"방금 송출된 IP 로그와 녹취 파일의 생성 시간, 그리고 기계실 백업 드라이브의 원본 해시값까지 전부 대조 마쳤습니다. 법원 제출용 공증까지 이미 한채은 교수님 측 법률단에서 끝내 놓은 상태고요. 조작이라고 우기기엔 디지털 포렌식 결과가 너무 정직하네요."
민준의 쐐기를 박는 발언에 유상일의 턱이 덜덜 떨렸다.
회의실 중앙에 앉아 있던 병원 최고 감사위원단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발이 성성한 감사위원장의 얼굴은 분노로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쿠웅 하는 둔탁한 파열음이 회의실을 울렸다.
"유상일 과장."
위원장의 목소리는 서리발처럼 차가웠다.
"이게 정녕 사실인가? 의사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어떻게 수술실에서 환자의 목숨을 조작의 도구로 쓸 생각을 한단 말인가!"
"위, 위원장님!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저건 백강현 저놈이 교묘하게 짜깁기한..."
"시끄럽소!"
위원장이 유상일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배석한 감사위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만장일치였다.
"현 시간부로 외과 과장 유상일의 모든 직무를 정지한다. 아울러 병원 이사회에 즉각적인 면직 처분 및 살인미수, 업무상 배임 혐의로 사법 기관에 정식 고발 조치할 것을 감사위원회의 이름으로 권고하겠다. 경비원들은 당장 이 자를 회의실 밖으로 끌어내시오!"
"위원장님! 송 실장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실장님!"
유상일이 송우진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애원했다. 그러나 송우진은 고개를 돌린 채 그의 시선을 철저히 외면했다. 쓸모를 다하고 썩어 문드러진 사냥개는 그에게 더 이상 파트너가 아니었다. 꼬리를 자르지 않으면 자신까지 삼켜질 판국이었다.
터벅터벅.
경비원들이 유상일의 양팔을 붙잡아 바닥에서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질질 끌려 나가는 그의 다리가 대리석 바닥에 흉측한 마찰음을 남겼다.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상일의 비명과 오열이 복도 너머로 메아리쳤다.
회의실 내부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갔다.
강현은 피폐해진 유상일의 마지막 모습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삐이이-
[시스템 경고: 두개 내압(ICP) 24mmHg 돌파.] [뇌 신경 과부하 발생. 좌측 시야 영역의 암점(Black spot) 범위 확산 중.]
강현의 왼쪽 시야 한구석이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야의 3분의 1이 어둠 속으로 잠겼다.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신체적 제약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단 한 터럭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오른손의 세 번째 손가락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하며, 감각이 완전히 죽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마비 진행률은 여전히 95%의 위험 수준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멈출 때가 아니었다.
강현은 단상 위에서 유령처럼 서 있는 송우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송 실장님."
강현의 목소리가 다시금 회의실의 공기를 가르고 나아갔다.
"3년 전, 당신들이 덮었던 진실은 이제 완전히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저를 옭아매려던 그 모든 행정적 가이드라인과 징계안은, 이제 당신들의 목을 죄는 밧줄이 될 겁니다."
송우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잘 정돈된 이마 위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흘러내렸다.
감사위원장이 강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백강현 선생. 그동안 병원의 조직적인 은폐와 부조리로 인해 겪었을 고통에 대해, 감사위원회를 대표해 깊은 사과의 뜻을 전하오. 백 선생의 의사 자격 제한 및 징계 논의는 이 시간부로 전부 철회하며, 즉각적인 복권을 명령하겠소."
"감사합니다."
강현은 짤막하게 목례를 건넸다.
그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회의실의 육중한 유리문이 열리고, 눈 부신 복도의 인공조명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
백강현은 당당하게 정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가 내딛는 걸음걸이마다, 3년 동안 그를 짓눌렀던 무거운 사슬이 하나씩 풀려나가는 듯한 해방감이 복도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의 뒤를 따르는 임민준과 한채은의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완연했다.
"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유상일 그 인간, 완전히 끝났어요. 의사 면허 취소는 물론이고 실형도 면치 못할 겁니다."
민준이 상기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채은 역시 냉철한 눈빛 속에 감출 수 없는 희열을 담은 채 강현의 곁에 섰다.
"이제 시작이에요, 백 선생님. 송우진의 법적 방어선도 무너뜨릴 기반이 마련됐어요. 우리 법률단이 기조실의 자금 흐름까지 추적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래."
강현이 조용히 답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흐릿한 왼쪽 시야와 싸우고 있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카르텔의 한 축을 완전히 뽑아냈고, 잃어버렸던 자신의 명예와 의사로서의 권리를 되찾았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을 만끽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쿵!
뒤편에서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강현의 눈에, 비틀거리며 복도로 뛰어 나오는 송우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붉은색 비상 연락용 무선 단말기가 들려 있었고, 얼굴은 핏기가 완전히 가셔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었다.
"백... 백강현...!"
송우진이 숨을 헐떡이며 강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우아했던 자태는 온데간데없고, 절박함과 공포가 뒤섞인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백강현, 제발... 제발 한 번만 도와다오."
강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무슨 일입니까."
송우진이 떨리는 손으로 단말기 화면에 뜬 긴급 의료 서신을 강현의 눈앞에 내밀었다. 단말기 위로 붉은색 경고등이 요란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긴급 상황 상신 - 대기업 태성그룹 핵심 후계자 이진우 (남/28)] [진단명: 외상성 대동맥 박리(TAAD) 및 복합 장기 파열, 두개 내 출혈(ICH)] [환자 상태: 바이탈 붕괴 직전. 심장 및 뇌 동시 손상으로 생존율 0% 봉착] [이송 수단: 닥터헬기 이송 중. 10분 후 한국대병원 옥상 헬리포트 도착 예정]
"태성그룹... 우리 병원 최대 대주주이자 의료원장 인사권을 쥐고 있는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다."
송우진이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거의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헬기 안에서 이미 두 번이나 심정지가 왔어. 뇌와 심장이 동시에 터져서... 지금 국내의 그 어떤 써전도 손을 대지 못하겠다고 고개를 젓고 있어. 이 환자가 죽으면... 병원뿐만 아니라 나도, 우리 모두가 끝장이다."
송우진이 강현의 멱살을 잡을 듯이 다가왔다.
"이 환자를 살려라, 백강현.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주마. 3년 전의 일도, 기조실의 지위도, 네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다 들어줄 테니... 제발 이 수술을 맡아다오!"
그 순간, 강현의 시야 속에서 기이한 빛의 파형이 소용돌이쳤다.
파아앗!
[돌발 제난 퀘스트 가동: 심장·뇌 복합 파열 환자의 생명을 구하라.] [환자 생존율: 1.2%] [수술 난이도: SSS (극악)] [집도 조건: 시야 차단 한계 돌입 상태에서의 미세 제어 요구.] [실패 시 패널티: 오른손 마비 수치 100% 도달. 영구적 써전 생명 종말.]
강현의 왼쪽 눈을 찌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과 함께, 시야의 어둠이 절반 이상을 덮쳐왔다. 시야가 거의 보이지 않는 실명 상태와 다름없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강현의 오른손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림을 멈추고 강하게 수축했다. 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생존율 1.2%.
그것은 신조차 포기해야 할 숫자였지만, 동시에 그가 증명해야 할 신의 영역이었다.
강현이 송우진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수술실 준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