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현 선생, 입실해 주십시오."
행정처 직원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 건조한 음성이 귓전을 때리는 순간, 백강현의 관자놀이를 관통하는 통증은 극점에 달했다.
두개골 내부의 압력이 팽창하여 뇌 조직을 사정없이 짓누르고 있었다. 뇌척수액의 흐름이 막힌 것처럼 머릿속이 터질 듯 끓어올랐다.
[경고: 두개 내압(ICP) 23 mmHg 돌파.] [뇌 신경 과부하 경보. 시각 피질 영역의 산소 포화도 급감.]
망막을 가득 채운 붉은색 경고 창이 주식 호가창처럼 빠르게 깜빡이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단순한 수치가 아니었다. 왼쪽 눈 시야의 바깥쪽 모서리부터 시작된 어둠은 이미 부채꼴 모양으로 번져 나와 전체 시야의 3분의 1을 먹먹하게 지워버린 상태였다. 일시적 암점(Scotoma)이었다. 어둠에 침식된 영역은 초점조차 잡히지 않아, 대기실 바닥의 대리석 문양이 마치 녹아내린 잉크처럼 일그러져 보였다.
‘가라앉혀라.’
강현은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가 맞물리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뇌막을 타고 전해졌다.
후우, 후우.
그는 호흡의 주기를 극도로 늘렸다. 폐부 깊숙이 차가운 공기를 불어넣고, 고압으로 날뛰는 뇌의 전기 신호를 강제로 억눌렀다. 시스템의 경고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지만, 강현은 그 소음을 의식의 지평 너머로 밀어냈다. 마치 수술실에서 대량 출혈이 발생했을 때 바이탈 모니터의 경보음을 배경음으로 흘려보내듯, 오직 눈앞의 '정적'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움직이지 않는 오른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비 진행률 95%. 손끝의 감각은 이미 얼어붙은 지 오래였다.
스스슥.
그럼에도 강현은 무릎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왼손으로 고정하고, 마비가 오지 않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 중지만을 이용해 종이의 모서리를 쓸어내렸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질감이 세 손가락 끝에 선명하게 닿았다. 검은 암점이 시야 왼쪽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남은 오른쪽 시야를 이용해 서류 표지에 적힌 단어를 정확히 읽어 내려갔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겉보기에는 극심한 통증과 시야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그의 태도는 고요하고 정교했다.
그때, 등 뒤에서 서늘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낮고 이지적인 목소리. 한채은이었다.
그녀는 소파 뒤편으로 자연스럽게 걸어와 강현의 어깨 너머로 몸을 굽혔다.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각도를 확보한 채, 그녀의 손길바닥이 강현의 목덜미와 어깨 경계면에 가볍게 안착했다. 손바닥 안에는 얇은 부직포로 감싼 소형 얼음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키토산 성분의 냉각 팩이 강현의 경동맥 부근에 닿자, 혈관이 수축하며 머리로 치솟던 열감이 일시적으로 잦아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청문회장에 눕게 될 거예요. 잠깐만 참아요."
채은의 손가락 사이로 은밀하게 가려진 소형 주사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회용 프리필드 시린지(Pre-filled syringe)였다. 그녀는 정장 깃에 가려진 강현의 승모근 부위에 주사침을 망설임 없이 찔러 넣었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고농축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NSAIDs)와 뇌압 저하를 돕는 약물이 근육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고마워요."
강현이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인사는 나중에 해요. 안쪽에 송 기조실장과 유 과장이 아주 칼을 갈고 대기 중이니까."
채은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행정동 회의실의 굳게 닫힌 참나무 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들이 준비한 서류를 대충 훑어봤어요. 3년 전 사고의 책임을 완전히 백 선생에게 종신 전가하고, 이번 하이브리드 수술실에서의 무단 집도 건을 엮어서 의사 면허 자격 취소 처분을 보건복지부에 즉각 의뢰할 생각이에요. 법무팀까지 대동했더군요."
"예상했던 범위입니다."
"유상일 과장이 며칠 전에 수술실 간호사에게 특정 응고 인자 약제를 의도적으로 누락해서 전달하라고 지시했던 녹취록, 내가 확인해서 우리 가문 법률단에 넘겼어요. 그건 기소 단계에서 유용한 카드가 될 거예요."
채은이 강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오늘 저 안에서 그들을 완전히 침묵시키려면, 더 확실한 치명타가 필요해요. 준비는 됐겠죠?"
강현은 대답 대신 정장 안주머니를 슬며시 짚었다. 그곳에는 묵직한 금속 재질의 USB 메모리가 들어 있었다. 하이브리드 12층 특수 수술실의 저 깊은 구석, 먼지가 자욱하게 쌓여 있던 구형 백업 서버 드라이브 안에서 임민준과 함께 사투 끝에 추출해 낸 3년 전 사고 원본 로그 파일이 담긴 물건이었다.
"가시죠."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각 팩과 주사제의 효과 덕분인지, 두개 내압 수치가 19 mmHg 선으로 내려앉으며 시야를 가리던 검은 암점이 조금씩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여전히 왼쪽 시야 모서리는 흐릿했지만, 사물을 분간하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회의실 문이 열렸다.
웅장한 마호가니 원탁을 중심으로 십여 명의 징계위원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중앙에는 기획조정실장 송우진이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강현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바로 옆자리에는 외과 과장 유상일이 잔뜩 독이 오른 표정으로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강현은 위원회 한가운데 마련된 피심의인 석에 조용히 좌정했다.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굳어 있었지만, 그는 두 손을 책상 아래로 내리는 대신 당당하게 원탁 위에 올려놓았다.
"백강현 선생."
송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벼려진 칼날 같은 서늘함이 깃들어 있었다.
"본 위원회는 백강현 선생의 최근 행적, 특히 하이브리드 수술실에서의 독단적인 집도와 병원 규정 위반 행위에 대해 심의하고자 소집되었습니다. 아울러 3년 전 발생했던 중대한 의료 과실 건에 대한 재조사 청구도 포함되어 있지요."
송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상일이 기다렸다는 듯 마이크를 앞으로 당겼다.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희열과 비열한 미소가 일렁이고 있었다.
"백강현! 네가 감히 병원의 행정 명령을 무시하고 수술실을 점거해? 그것도 정전으로 인해 시스템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에서 조명도 없이 임의로 환자의 뇌를 열었다며! 그건 메스를 쥔 써전이 아니라, 메스를 든 살인 미수범이나 다름없는 짓이야!"
유상일이 서류 뭉치를 탁 소리 나게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위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현에게 쏠렸다. 몇몇 위원들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는 이미 유상일이 설계한 프레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강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유상일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감정의 동요는커녕, 심박수조차 변하지 않는 고요함이었다.
"말씀해 보십시오, 백강현 선생. 그 위급한 정전 상황에서, 병원의 가이드라인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집도를 강행한 이유가 뭡니까?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영웅놀이라도 하고 싶었던 겁니까?"
유상일이 이죽거렸다.
강현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회의실 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10초, 20초. 침묵이 길어질수록 유상일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강현의 무반응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말이 없어? 본인의 행동이 법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전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건가?"
유상일이 다시금 언성을 높였다.
그제야 강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지극히 차분했다.
"정전 상황에서의 집도는 병원 응급 의료 행정 규칙 제47조 3항, '재난 및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발생 시, 환자의 생명 보존을 위해 집도인의 재량 하에 대체 장비 및 수동 처치를 시행할 수 있다'는 조항에 의거한 합법적 의료 행위였습니다. 당시 환자의 뇌압은 35 mmHg를 넘어서고 있었고, 5분 이내에 감압술을 시행하지 않았다면 영구적인 뇌사 상태에 빠졌을 것입니다."
강현은 품 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원탁 중앙으로 밀어 보냈다.
"당시 환자의 실시간 바이탈 기록과 수술 후 예후 데이터입니다. 환자는 현재 아무런 신경학적 결손 없이 의식을 회복해 일반 병실로 이송되었습니다. 살인 미수라는 단어는, 결과적으로 환자를 완벽히 살려낸 의사에게 붙일 수 있는 학술적 용어가 아닙니다."
"이, 이게……!"
유상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가 서류를 낚아채듯 가져가 훑어보았지만,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수치들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었다.
"좋아, 그 건은 법무팀에서 규정 해석을 다시 하겠지! 하지만 3년 전 사건은 어찌 설명할 건가? 우심방 파열 환자의 수술 중 발생한 대량 출혈 사고! 당시 집도의였던 네 과실로 환자가 사망했고, 그 책임으로 인해 병원을 떠났던 것 아닌가? 그런 중대한 결격 사유를 가진 자가 다시 메스를 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야!"
유상일이 기세등등하게 3년 전 카드를 꺼내 들었다. 송우진 역시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자신들이 완벽하게 조작하고 은폐했던 3년 전의 사건. 그것은 강현을 영원히 매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족쇄이자 덫이었다.
강현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가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3년 전, 강태윤 환자의 우심방 외상성 파열 수술 말씀이십니까."
강현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래! 네 미숙한 봉합으로 인해 우심방 후벽에서 재출혈이 일어나 사망한 사건 말이다!"
"틀렸습니다."
강현의 목소리에 서리가 내렸다.
"당시 환자의 사망 원인은 미숙한 봉합이 아니라, 우상대정맥과 우심방 사이를 관통하는 2밀리미터 두께의 기형 '부동맥(Anomalous artery)' 변이 때문이었습니다. 해부학적으로 극히 드문 변이 혈관이었고, 당시 1차 집도를 맡았던 유상일 과장님께서 이 변이 혈관을 인지하지 못하고 박리(Dissection)하는 과정에서 해당 동맥을 손상시켰습니다. 그것이 대량 출혈의 시작이었습니다."
회의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송우진의 찻잔이 공중에서 멈추었다.
"무슨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건가! 당시 수술 기록 어디에도 그런 변이 혈관에 대한 언급은 없었어!"
유상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의 눈빛에 극도의 불안감과 당혹감이 스쳤다.
"기록이 없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상일 과장님께서 본인의 과실을 감추기 위해, 수술 아카이브에서 해당 변이 혈관의 이미지와 집도 기록을 고의로 누락하고 삭제하셨기 때문입니다."
강현은 오른손으로 주머니 속의 USB를 꺼내 원탁 위에 툭 내려놓았다.
"하지만 기록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하이브리드 12층 특수 수술실 내부의 구형 백업 서버 드라이브. 그 노후 장비의 백업 로그에는 3년 전 사고 당일의 원본 데이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유상일 과장님이 집도 기록을 삭제한 구체적인 시각, 그리고 그 삭제를 승인하기 위해 송우진 기조실장님의 관리자 ID로 로그인한 IP 기록까지 전부 말입니다."
강현의 시선이 유상일을 지나 송우진에게 닿았다. 송우진의 우아하던 미소가 마침내 완전히 굳어버렸다.
"이 USB 내부에 담긴 파일들이 바로 그 원본 로그와, 당시 환자의 심장 후벽 부동맥 변이 이미지 원본입니다. 이미 이 자료는 한채은 선생의 가문 법률 자문단을 통해 보건복지부 및 검찰청에 증거 보전 신청과 함께 제출되었습니다."
강현은 한 치의 흐려짐도 없는 눈빛으로 유상일을 응시했다.
"3년 전, 제가 뒤집어썼던 누명의 실체이자. 당신들이 은폐하려 했던 진짜 의료 사고의 증거입니다."
회의실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징계위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유상일의 안색은 흙빛으로 변해갔다. 송우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완벽한 형세의 역전이었다.
유상일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움켜쥐었다. 그의 이마에 핏대가 굵게 솟아올랐다. 이대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자신의 커리어는 물론, 의사 인생 자체가 끝장나는 길이었다.
"구, 구라치지 마! 이 따위 위조된 파일 몇 개로 나를 모함할 수 있을 것 같아?!"
유상일이 마이크에 대고 광분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의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듯했다.
"네놈은 그저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사기극을 벌이는 사기꾼일 뿐이야! 정전 상황에서 조명도 없이 임의로 살인 집도 미수를 저지른 폐기물 써전 주제에, 어디서 감히 법을 논하고 정당성을 논해!"
쾅!
유상일이 단상을 대대적으로 내리치며 마이크가 찢어지는 듯한 하울링 소음이 회의실 전체를 강타했다.
"오늘부로 네놈의 의사 면허를 영구히 말소시키고, 다시는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 주마!"
짐승 같은 포효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백강현은 조용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왼쪽 눈 가장자리에 드리워졌던 어둠이 완전히 걷히고, 서늘하게 가라앉은 두 눈동자가 유상일의 심장을 꿰뚫을 듯 차갑게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