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채은의 하얀 의사 가운 오른쪽 주머니 속으로 차가운 금속 재질의 USB 메모리가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지익, 지익.
가운 주머니의 지퍼가 닫히는 미세한 마찰음이 수술실의 기계식 환풍기 소음에 묻혔다. 강현은 손끝에 남은 차가운 감각을 지워내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쿵!
하이브리드 특수 수술실의 두꺼운 납 유리 자동문이 거칠게 양옆으로 갈라졌다. 정적을 깨뜨리며 들이닥친 것은 구두 굽 소리였다. 대리석 타일을 짓밟으며 다가오는 발소리는 불길할 정도로 규칙적이었다.
"백강현 선생."
가장 앞장선 이는 기획조정실장 송우진이었다. 늘 흐트러짐 없던 그의 이마에 얇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지만, 입꼬리만큼은 기괴할 정도로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는 병원 행정사법위원회 소속 직원 네 명이 검은색 서류 가방을 든 채 사냥개처럼 버티고 섰다.
송우진이 손에 든 두 장의 서류를 강현의 눈앞에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붉은색 의료원장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서류였다.
"행정사법위원회 의결에 따른 무단 집도 중지 및 즉각 퇴거 명령서입니다. 그리고 하이브리드 수술실을 포함한 서관 전 구역에 대한 임시 출입 무기한 제한 조치 서류도 함께 지참했습니다."
송우진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는 뼈를 깎는 듯한 독기가 서려 있었다. 대강그룹의 후계자 강태윤을 살려냈다는 사실에 잠시 흔들렸던 눈동자는, 이제 행정 권력이라는 완벽한 방패를 쥐자 다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단 집도라니요."
강현의 뒤편에서 모니터를 감시하던 임민준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한 걸음 나섰다.
"이 환자는 우심방 파열로 당장 1분 1초가 급한 상태였습니다! 정전 상황에서 교수님이 아니었다면……!"
"임민준 선생."
유상일 외과 과장이 민준의 말을 날카롭게 자르고 들어왔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는 시기심과 분노가 뒤섞여 침이 튀었다.
"전공의 주제에 어디서 감히 기조실장님 말씀에 토를 달아? 정전 가이드라인 제12조를 위반하고 예비 전력조차 확보되지 않은 밀실에서 독단으로 수술을 강행한 건 명백한 불법 행위다. 환자가 살았든 죽었든, 절차를 무시한 칼잡이는 더 이상 의사가 아니야. 당장 그 손 떼고 나가!"
수술실 벽면에 걸린 바이탈 모니터가 무심하게 숫자를 뱉어냈다.
[BPM: 74, BP: 115/75, SpO2: 99%]
환자의 생체 신호는 더없이 안정적이었다. 대강그룹 막내아들의 심장은 강현이 정교하게 재건해 놓은 우심방 벽 안에서 규칙적으로 고동치고 있었다.
강현은 유상일의 핏대 선 목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유상일의 손끝으로 향했다. 가늘게 떨리는 유상일의 손가락. 3년 전, 바로 저 손가락이 가리켰던 해부학적 오진이 한 인간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 죄를 강현에게 뒤집어씌웠다.
'우상대정맥과 우심방 사이를 관통하는 2밀리미터 두께의 기형 부동맥(Anomalous artery).'
3년 전 유상일이 수술 중 건드려 대량 출혈을 유발했던 바로 그 변이 혈관을, 강현은 방금 전 구형 백업 서버의 데이터 속에서 완벽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방금 수술한 강태윤 환자에게서도 동일한 변이를 발견해 완벽히 우회 봉합해 냈다. 유상일이 평생 숨기려 했던 치명적인 무능의 증거가, 방금 강현이 한채은의 주머니에 넣은 USB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알겠습니다."
강현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지극히 나지막했다.
"……뭐?"
유상일이 예상치 못한 순순한 태도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당장 고함을 지르거나 억울하다고 발악할 줄 알았던 상대가 지나치게 차분하자, 오히려 당혹감이 역력하게 스쳤다.
강현은 손에 쥐고 있던 메스를 정갈하게 트레이 위에 내려놓았다. 챙강, 하는 금속음이 수술실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그는 수술 장갑을 천천히 벗겨 내며 송우진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지시하신 대로 퇴거하겠습니다. 환자의 포스트 오피(Post-op) 관리는 유상일 과장님께서 직접 전담해 주십시오. 아시겠지만, 이 환자는 우심방 후벽에 아주 특이한 '해부학적 변이'가 있어서 일반적인 승압제 투여 방식으로는 혈압 제어가 불가능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용량을 잘못 조절하면…… 3년 전처럼 우심방이 다시 터질지도 모르니까요."
유상일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며 송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너, 너 지금 무슨 소리를……!"
"가시죠."
강현은 유상일의 비명을 가볍게 무시한 채 한채은과 임민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송우진은 강현의 담담한 태도 뒤에 숨겨진 서늘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미 법적으로 완벽한 퇴거 명령을 집행한 이상, 더는 그를 이 수술실에 머물게 할 명분은 없었다. 송우진의 입가에 다시 가증스러운 승리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백강현 선생. 내일 오전 9시, 행정동 제1회의실에서 열릴 특별 징계위원회에서 뵙도록 하죠. 그때는 의사 면허 자격 정지 처분서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강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라커룸으로 걸어 들어갔다.
라커룸의 낡은 철제 사물함 문이 열렸다. 강현은 안에 넣어두었던 푸른색 수술복을 꺼내 가방에 담았다.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는 정갈한 손길이었다.
라커룸 모퉁이, 송우진의 사냥개들이 감시의 눈초리를 빛내며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강현은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캐비닛 음영 속에서 한채은과 바짝 마주 섰다.
한채은이 자신의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어 USB의 촉감을 확인하더니, 목소리를 극도로 낮췄다.
"확보한 로그 파일, 정말 확실한 건가요?"
"확실합니다."
강현의 음성은 차가운 얼음 송곳 같았다.
"3년 전 사고 당시, 유상일 과장의 집도 기록이 실시간으로 삭제된 시각과 기조실장 송우진의 개인 관리자 ID 로그인 타임스탬프가 초 단위로 일치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은폐하려 했던 환자의 심장 후벽 부동맥 변이 이미지 원본 데이터도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유 과장이 수술 도중 혈관을 손상시키고 당황해 클램프를 잘못 채웠던 흔적까지 전부 백업 로그에 기록되어 있더군요."
하이브리드 수술실 12층의 구형 백업 서버 드라이브. 병원 정보전산처조차 노후 장비라 방치해 두었던 그 장치 속에, 3년 전 송우진과 유상일이 완벽하게 지웠다고 믿었던 살인의 증거가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한채은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병원 행정 규정을 무기 삼아 우리를 옭아매려 했지만, 이 자료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들이 만든 가이드라인은 스스로의 목을 죄는 밧줄이 될 거예요. 법적 효력을 갖추기 위한 가공은 제가 맡을게요."
"부탁드립니다."
강현은 가방 지퍼를 채우고 어깨에멨다.
라커룸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쫓겨나는 패배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냥을 끝내고 영지를 잠시 비우는 야수의 걸음걸이에 가까웠다. 뒤에서 그를 감시하던 행정처 직원들은 강현의 뒷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압도감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서관 정문을 나서자 검푸른 새벽 공기가 가슴속 깊숙이 밀려들었다. 병원 로비의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붉은 해가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터벅, 터벅.
강현의 옆으로 임민준이 바짝 따라붙었다. 그의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지만, 강현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교수님."
"왜."
민준이 가방끈을 꽉 쥐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일 징계위원회 갈 때, 저 보타이 하고 갈까요?"
강현이 걸음을 멈추고 민준을 돌아보았다. 민준의 입가에 씁쓸하면서도 단단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장례식 상복이 더 어울리는 자리가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송 실장이랑 유 과장, 그 양반들 내일 아주 제대로 묻어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늘 소심하고 겁 많던 전공의가 이제는 제법 써전의 깡다구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상복은 우리가 입는 게 아니다, 임 선생."
강현이 민준의 어깨를 툭 쳤다.
"우리는 그저 팩트라는 메스로 그들의 썩은 부위를 도려내기만 하면 돼. 옷은 평소대로 차려입고 와라."
"예, 교수님!"
민준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날 오후, 강현은 서초동의 한 한적한 카페에서 한채은을 다시 만났다. 가죽 시트로 된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창밖을 바라보는 강현의 앞으로, 한채은이 두꺼운 서류 봉투를 내려놓았다.
"준비는 끝났어요."
채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저희 가문 법률 자문단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친할아버님께서 전 대법관 출신이신 건 아시죠? 삼촌들이 대형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로 계시고요. 이 로그 파일과 3년 전 은폐된 부검 기록의 모순점을 분석한 법률 의견서를 이미 완성했습니다."
그녀가 서류 봉투에서 몇 장의 문서를 꺼내 보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법률가들이 작성한, 한 치의 허점도 없는 형사 고소장과 행정처분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서였다.
"송우진이 내세운 '정전 시 무단 수술 가이드라인 위반'은 긴급피난(형법 제22조) 조항에 의해 완벽하게 무력화됩니다. 환자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대체 의료 수단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집도 결과 환자가 합병증 없이 생존했다는 통계적 수치가 그 증거예요. 오히려 수술을 방해하고 퇴거를 명령한 송우진 실장과 유상일 과장에게 '업무상 과실치사상 방조 및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해 형사 고소할 겁니다."
한채은의 냉철한 분석은 송우진이 쳐놓은 법적 그물을 역으로 찢어발기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대강그룹 측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자신들의 유일한 후계자를 살려낸 의사를 병원이 정치적 이유로 징계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대강그룹 법무팀이 한국대병원을 상대로 어떤 소송을 제기할지 안 봐도 비디오죠."
강현은 서류에 적힌 글자들을 가만히 훑어내려 갔다.
완벽했다.
송우진이 합법이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 뒤에 숨어 자신을 압박하려 했다면, 이제는 진짜 '법의 칼날'이 그들의 목덜미를 겨누게 될 차례였다.
"고맙습니다, 한 선생."
"고마울 것 없어요. 저 역시 이 병원의 썩은 관행을 도려내고 싶을 뿐이니까요."
채은이 커피 잔을 들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시간은 쉼 없이 흘러, 마침내 징계위원회 당일 아침이 밝았다.
오전 8시. 행정동 3층 대기실.
회의실 문틈 너머로 징계위원들의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간간이 흘러나왔다. 송우진의 뜻대로 강현의 목줄을 죄기 위해 소집된 위원들은 이미 행정적 절차를 마칠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대기실 가죽 소파에 홀로 앉아 있던 강현이 정장 안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우웅―.
뇌 깊은 곳에서부터 정체모를 진동이 시작되었다.
"……!"
강현의 미간이 급격히 찌그러졌다. 귓가를 찢는 듯한 고주파의 이명이 고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삐이이이― 하는 비명 같은 소음과 함께, 눈앞의 시야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경고: 시스템 연산 과부하 발생.] [두개 내압(ICP) 지수 급상승 중.] [현재 ICP: 22 mmHg (정상: 5-15 mmHg)]
망막 위에 붉은색 시스템 경고 창이 주식 호가창처럼 어지럽게 명멸하기 시작했다.
최근 며칠 동안 하이브리드 수술실에서 연이어 감행했던 초고난도 집도와 뇌 신경의 등가교환 제약이 마침내 임계점에 달한 것이었다. 머릿속이 끓는 기름을 부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흡……."
강현은 저도 모르게 책상 모서리를 꽉 움켜쥐었다.
오른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또다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들어가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손가락이 아니었다.
스으으으…….
강현의 왼쪽 눈 시야의 가장자리, 모서리 주변이 마치 먹물을 떨어뜨린 것처럼 완연히 검게 바래 얼룩지기 시작했다. 미세한 일시적 암점(Scotoma) 징후였다. 시야의 거의 3분의 1이 어둠 속으로 잠겨 들며, 사물의 윤곽이 일그러져 보였다.
"백강현 선생, 입실해 주십시오."
행정처 직원이 대기실 문을 열며 차가운 목소리로 강현을 불렀다.
검게 물든 시야 너머로, 승리의 확신에 가득 찬 미소를 짓고 있을 송우진과 유상일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였다. 강현은 굳어가는 손가락을 쥐어짜며, 어둠이 침식해 들어오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사투의 2막이 열리는 문턱에서, 그의 몸이 먼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