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치이이익―!

구형 백업 서버 드라이브 랙의 제어반 틈새로 검붉은 불꽃이 이빨을 드러냈다. 뒤이어 뿜어져 나온 매캐한 회색 연기가 수술실의 멸균 공기를 순식간에 오염시켰다. 타들어 가는 유리섬유 기판과 납땜의 지독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원격 접속 백업 장부에 막 손을 대려던 강현의 손가락 끝에 정전기 같은 미세한 전류가 튀었다.

단순한 전력 과부하가 아니었다. 정전이 복구되는 타이밍에 맞추어 외부 메인 서버실에서 인위적으로 고전압 서지(Surge)를 인가한 흔적이었다. 강현의 망막 위로 붉은색 경고 박스가 점멸했다.

[위험: 백업 저장 장치 물리적 파괴 진행 중.] [데이터 손실율: 42%... 55%... 70%...]

"어, 어? 교수님! 연기가 나는데요? 이거 터지는 거 아닙니까?"

임민준이 수술용 포셉을 든 채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수술실 구석의 아날로그 모니터들이 일제히 지직거리며 백화 현상을 일으켰다.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서버 제어반의 우측 하단, 3년 전의 원본 로그가 저장된 하드디스크 슬롯에 고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모든 것은 다시 어둠 속으로 묻힌다. 송우진이 설계한 완벽한 덫에 갇혀, 평생 살인마라는 누명을 쓴 채 메스를 내려놓아야 할 터였다.

스르륵.

강현은 수술대 옆에 비치된 적색 CO2(이산화탄소) 소화기를 거칠게 낚아챘다. 안전핀을 뽑아내는 감각이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타고 서늘하게 전해졌다. 완벽하게 움직이는 손가락. 시스템 포인트로 일시 복구된 손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했다.

쉬이이이이익―!

액체 이산화탄소가 초고압으로 분사되며 제어반의 전면부를 뒤덮었다. 극저온의 백색 가스가 불꽃을 급격히 냉각시키며 진화해 나갔다. 연기가 억눌린 틈을 타 강현은 소화기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빛나던 멸균 수술 도구함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집어 든 것은 소독된 플라이어(Plier)와 대형 켈리 클램프(Kelly clamp)였다.

"민준아, 펜라이트 비춰."

"예? 예, 옛!"

임민준이 주머니에서 멸균 처리된 소형 펜라이트를 꺼내 서버 랙 내부를 비추었다. 열 변형으로 인해 플라스틱 걸쇠가 녹아내려 하드디스크 케이스와 들러붙어 있었다. 이대로 힘으로 잡아당겼다가는 내부의 마그네틱 디스크가 물리적으로 파손될 것이 분명했다.

강현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플라이어의 끝부분으로 녹아내린 플라스틱 걸쇠의 접합부를 정확히 물었다. 뚝, 하는 파열음과 함께 고정 핀이 부러져 나갔다. 이어 켈리 클램프의 끝을 디스크 모듈의 틈새에 밀어 넣고 지렛대의 원리로 밀어 올렸다.

치익, 하며 마지막 잔열이 고무 패킹을 태우는 소리가 났지만, 강현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대동맥 뒤편에 숨은 미세 종양을 박리하듯, 극도로 정밀한 힘의 안배였다.

철컥.

그을린 금속 케이스에 싸인 물리 데이터 포트가 서버 랙에서 분리되어 강현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하아…… 하아……."

임민준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가볍게 기침을 터뜨렸다. 자욱한 이산화탄소 가스 사이로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살렸…… 살린 건가요?"

"물리 디스크의 쉴드 캔은 손상되지 않았어. 포트 커넥터만 약간 녹았을 뿐이다."

강현이 그을린 디스크를 수술용 타월로 감싸며 차갑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임민준은 그제야 다리가 풀린 듯 수술실 보조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의 얼굴에는 안도와 경외감이 뒤섞인 미묘한 웃음이 번졌다.

"진짜 귀신이십니다, 교수님. 저는 수술실 통째로 날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기조실장 그 인간들, 정말 미친 거 아닙니까? 수술 도중에 전기를 끊는 것도 모자라 서버를 통째로 태우려고 들다니요."

"증거가 무서운 거겠지."

강현이 수술 타월에 감싼 디스크를 수술대 아래의 개인 사물 보관함으로 밀어 넣었다.

"그들이 숨기려 했던 진짜 증거 말입니다…… 정말로 3년 전 사건의 원본 로그가 저기 들어 있습니까? 유상일 교수가 저지른 일이라는 증거가?"

임민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3년 전, 백강현이라는 천재 써전이 한순간에 몰락했던 그 사건. 병원 내에서는 금기시되는 기형적인 의료 사고였다.

강현은 수술 장갑을 벗어 쓰레기통에 던지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3년 전 사망한 환자의 공식 사인은 우심방 파열로 인한 심정지였다. 유상일은 자신이 완벽하게 혈관을 결찰했다고 주장했고, 내가 사후 처치 과정에서 무리한 심장 마사지로 우심방을 터뜨렸다고 누명을 씌웠지."

"하지만 방금 수술한 환자도 우심방 파열이었지 않습니까?"

"그래. 그리고 방금 수술에서 확인했지. 우상대정맥과 우심방 사이를 관통하는 2밀리미터 두께의 기형 부동맥(Anomalous artery) 변이."

강현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3년 전 유상일이 집도했던 환자의 부검 기록과 해부학적 특이성은 완벽히 일치한다. 유상일은 그 2밀리미터짜리 변이 혈관을 인지하지 못하고 박리 과정에서 절단해 버렸어. 시야가 피로 가득 차자 당황해서 엉뚱한 결찰을 해놓고 수술을 끝낸 거다. 환자는 수술실을 나가기도 전에 흉강 내 대량 출혈로 사망했고."

"그걸 가리기 위해…… 교수님께 덮어씌운 거군요."

임민준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의사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추악한 배신이자 범죄였다.

"이 드라이브 내부의 아카이브 데이터에는 당시 마취과 장비와 체외순환기(CPB)의 실시간 압력 로그가 그대로 남아 있을 거다. 유상일이 혈관을 자른 순간 급격히 하락했던 관류압 수치. 그것만 있으면 유상일이 메스를 잡고 있던 순간에 이미 치명적인 출혈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

바로 그 순간, 강현의 시야에 푸른색의 시스템 메시지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시나리오 퀘스트: '과거의 장막을 걷는 자' 단계적 성공.] [과거 은폐 탐색 성공 보너스 포인트: 500 포인트 획득.] [현재 가용 구조 포인트: 1,350 포인트] [오른손 마비 가역 지침 확장: 마비 수치 회복 한계가 30% 추가 완화됩니다.]

귀를 찢는 듯한 이명이 지나간 자리, 시야 좌측 하단에 머물던 미세한 암점(Scotoma)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오른손 끝으로 전해지는 감각이 이전보다 훨씬 더 예리하고 묵직하게 고정되었다. 뇌압 상승으로 인한 두통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1,350 포인트.

이 정도의 포인트라면 앞으로 닥칠 어떤 초고난도 수술에서도 오른손 마비의 위험 없이 완벽한 집도가 가능했다. 리스크를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얻어낸 최고의 전리품이었다.

스륵―.

수술실 외부와 연결된 에어샤워실의 슬라이딩 도어가 조용히 열렸다.

방진복을 입은 날렵한 체구의 여성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차갑고 지적인 눈매. 한채은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뒹구는 소화기와 서버 랙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상황이 생각보다 더 다이내믹하네요, 백 교수님."

채은이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말했다.

"기조실장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방금 지하 기계실 전력 복구팀을 철수시키고, 행정처 직원들을 소집하는 걸 확인했습니다. 수술실 정전이 단순 사고가 아니라는 뜻이죠."

강현은 대답 대신 사물함에서 타월에 감싼 물리 드라이브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미리 준비해 둔 소형 외장 복제 기기에 연결했다. 기기 표면의 파란색 LED가 빠르게 점멸하며 데이터를 암호화된 USB 메모리로 이관하기 시작했다.

"이걸 받아."

강현이 복제가 완료된 소형 USB 메모리를 한채은에게 건넼다.

"이게 뭡니까?"

"3년 전 나를 나락으로 보냈던 수술의 원본 로그 데이터, 그리고 유상일의 의료 과실을 입증할 유일한 물리적 증거다."

채은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주저 없이 USB를 받아 자신의 방진복 안쪽, 깊숙한 개인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기조실장 라인이 닿지 않는 내 개인 철통 안전 금고(Safe box)에 보관해 두죠. 그곳은 병원 행정 권한이나 법무팀의 압수수색 영장으로도 함부로 열 수 없는 사적 영역이니까요. 다음 청문회 때 이 카드를 어떻게 터뜨릴지는 제가 설계하겠습니다."

"부탁하지."

강현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수술실 외부 대기실의 두꺼운 철제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정밀한 하이브리드 수술실의 정적을 깨뜨리는, 극도로 무례하고 폭력적인 소음이었다.

이어 대리석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때리는 구두 굽 소리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수술실 안쪽을 향해 다가왔다.

"백강현! 안에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당장 문 열어!"

외과 과장 유상일의 격앙된 목소리가 인터폰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스르륵―.

통제 권한을 강제로 우회한 듯, 수술실 격리 구역의 자동문이 좌우로 거칠게 열렸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단정한 수트 차림에 안경을 쓸어 올리며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기획조정실장 송우진이었다. 그의 뒤편으로 유상일과 병원 행정 사법 위원회 소속의 법무팀 변호사들, 그리고 원무팀 직원 서넛이 험악한 표정으로 도열해 있었다.

송우진의 손에는 붉은색 직인이 찍힌 두꺼운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백강현 선생."

송우진이 한 걸음 걸어 나오며 영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길이 바닥의 소화기와 검게 그을린 서버 랙에 머물렀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강현의 얼굴로 향했다.

"의료원 행정 가이드라인 제32조 및 특별 징계위원회 의결에 의거하여 통보합니다."

송우진이 서류 봉투에서 백색의 공식 문서를 꺼내 들어 올렸다. 문서의 헤드라인에는 굵은 고딕체로 쓰인 문구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집도권 영구 박탈 및 하이브리드 수술실 강제 퇴거 명령서]

"이 시간부로 백강현 선생의 모든 집도 권한을 정지하며, 본 하이브리드 특수 수술실에서의 즉각적인 퇴거를 명령합니다. 만약 불응할 시, 의료법 위반 및 무단 침입으로 사법 기관에 고발 조치할 예정입니다."

송우진의 미소 뒤로, 유상일이 승리감에 도취된 눈빛으로 강현을 쏘아보았다.

지옥의 족쇄가 강현의 발목을 향해 옥죄어 오고 있었다.

유상일의 입술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렸다. 그의 시선은 강현의 발밑에 뒹굴고 있는 이산화탄소 소화기와, 그을린 채 침묵하고 있는 서버 랙을 번갈아 가며 훑었다. 본능적인 불안감이 그의 좁은 미간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너…… 너 지금 여기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수술실 기자재를 고의로 파손하고, 권한도 없는 수술을 강행해? 이거 완전히 미친놈 아니야!"

유상일이 삿대질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가 격앙될수록 뒤에 선 법무팀 변호사들의 펜 끝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피 묻은 수술 가운의 끈을 풀었다. 바스락거리는 일회용 부직포 가운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안, 수술실 안에는 오직 바이탈 모니터의 일정한 기계음만이 울려 퍼졌다.

띡, 띡, 띡, 띡-.

극도의 침묵. 강현의 무표정한 얼굴과 미동조차 없는 눈동자가 송우진을 향했다. 송우진의 입꼬리가 가볍게 비틀렸다. 아무리 날고 기는 천재 외과의라도 법과 제도의 그물 앞에서는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오만한 미소였다.

"백강현 선생. 침묵으로 일관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송우진이 안경을 지켜올리며 서류를 내밀었다.

"이 수술실은 병원의 자산이며, 선생은 현재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신분입니다. 비인가 자의 무단 집도 및 수술실 무단 점거. 이것만으로도 의사 면허 정지는 물론이고 형사 처벌까지 가능합니다. 당장 환자에게서 손 떼고 나오십시오. 후속 처치는 외과 과장이신 유상일 교수께서 맡을 겁니다."

"……."

강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시스템 포인트 1,350점의 가호 아래, 마비 수치가 40%로 경감된 손가락들은 그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강현이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송우진을 지나 뒤에 버티고 선 법무팀 수석 변호사에게 꽂혔다.

"의료법 제15조 1항."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수술실의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의료인은 진료나 조산 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한다. 또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르면 응급환자에게 필요한 응급처치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즉시 응급처치를 시행해야 한다. 이를 위반할 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법무팀 변호사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또한, 한국대병원 행정 가이드라인 제47조 3항."

강현의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마치 교과서의 문구를 그대로 읊는 듯한 건조함이었다.

"재난 및 정전 등 극단적 상황 발생 시, 환자의 바이탈이 불안정하여 이송이 불가능한 경우, 현장 집도의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최우선적으로 생명 유지 조치를 완료할 의무를 지닌다. 그리고 그 집도의의 권한은 환자의 바이탈이 완전히 안정화되어 post-op 관리가 가능할 때까지 임시 보존된다."

"그, 그건……!"

유상일이 말문이 막힌 듯 헛숨을 들이켰다.

"내가 이 수술실에 들어왔을 때, 환자의 생존율은 19%였습니다. 우심방 파열과 대량 혈흉으로 인한 심정지 직전 단계. 유상일 과장님은 당시 어디 계셨습니까?"

강현의 시선이 유상일의 얼굴로 옮겨갔다.

"외과 과장 전용 대기실에서 행정 지침을 검토 중이셨다는 기록이 메인 스테이션 로그에 고스란히 남아 있더군요. 장비 캐비닛을 비표준 자물쇠로 폐쇄해 소방법을 위반한 시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백강현!"

"질문하겠습니다."

강현이 유상일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한 걸음 다가섰다. 유상일의 어깨가 움찔하며 뒤로 밀려났다.

"우상대정맥과 우심방 사이를 관통하는 2밀리미터 두께의 기형 부동맥(Anomalous artery). 이 환자가 가진 해부학적 변이입니다. 만약 제가 수술을 중단하고 과장님께 이 환자를 인계했다면, 과장님은 이 2밀리미터짜리 변이 혈관을 어떻게 처리하셨겠습니까?"

유상일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 그딴 기형 혈관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모르셨겠지요."

강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더 낮아졌다.

"3년 전, 환자 김민우 씨의 수술 때처럼 말입니다."

수술실 내부의 온도가 순간적으로 영하로 떨어지는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송우진의 미소 짓던 얼굴이 굳어졌고, 뒤에 서 있던 법무팀 직원들은 서로 의아한 눈빛을 교환했다. 3년 전 사건은 병원 내에서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금기'였기 때문이다.

"너,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유상일의 목발을 짚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3년 전 유상일 과장님이 집도하셨던 환자의 부검 기록지 상 우심방 후벽 손상 부위는, 방금 제가 결찰한 이 환자의 부동맥 변이 위치와 해부학적으로 정확히 100% 일치합니다. 당시 과장님은 변이 혈관을 시야에서 확보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박리하다가 절단하셨고, 발생한 대량 출혈을 통제하지 못해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실을 제 무리한 심장 마사지 탓으로 돌렸죠."

"이새끼가 소설을 쓰고 있네!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유상일이 악을 쓰며 달려들려 했지만, 그의 다리는 긴장으로 인해 굳어 있었다.

강현은 대답 대신 자신의 사물함 깊숙한 곳에 보관된 복제 장치를 턱끝으로 가리켰다. 이미 원본 로그는 한채은의 주머니 속 USB로 옮겨간 뒤였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유상일의 시선은 그을린 서버 랙과 강현의 손끝에 머물렀다.

"이 서버 랙 안에 보관되어 있던 3년 전 정밀 기기 관류압 로그와 마취 기록 원본에 모든 답이 나와 있습니다. 과장님이 메스를 쥐고 계시던 순간에 이미 혈압이 급격히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통계적 증거가 말입니다."

송우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상황이 자신들이 설계한 행정 가이드라인의 궤도를 벗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강현은 감정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의학적 팩트와 법률 조항, 그리고 통계적 수치를 무기로 역압박을 가해 오고 있었다.

"백 선생."

송우진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지했다.

"과거의 일을 끌어들여 본인의 불법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 문서는 병원 이사회의 결재를 받은 공식 행정 명령입니다. 당장 집도권을 내려놓고 퇴거하지 않으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수술실 벽면에 설치된 비상 인터폰이 찢어지는 듯한 경보음과 함께 울려 퍼졌다.

비비비비빅―!

"기조실장님! 과장님! 지금 하이브리드 수술실에 계십니까?"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응급의학과 안 교수의 목소리는 거의 실성에 가까운 비명이었다.

"무슨 일이야? 지금 집행 중이니까 방해하지 마!"

유상일이 신경질적으로 인터폰을 향해 쏘아붙였다.

"그게 아니라……! 지금 방금 수술 끝난 환자 말입니다! 신원 확인이 됐어요! 연쇄 추돌 사고 차량 조회 결과가 방금 경찰에서 넘어왔는데…… 환자 이름이 강태윤입니다!"

강태윤.

그 이름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 순간, 송우진의 손에 들려 있던 하얀색 퇴거 명령서 서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전혀 동요하지 않던 그의 이마에 굵은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강…… 태윤? 설마 대강그룹 강 회장의 막내아들……?"

"예! 맞습니다! 대강그룹에서 지금 병원장님께 직접 연락이 가고 난리가 났습니다! 회장님이 헬기 타고 지금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처치에 문제가 생기면 한국대병원 전체 지원금을 회수하겠다고……!"

수술실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유상일의 다리가 완전히 풀려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대강그룹은 한국대병원의 신축 Cardiovascular Center(심혈관 센터) 건립 기금의 80%를 후원하는 최대 스폰서이자, 병원 이사회의 실권을 쥔 절대적인 존재였다.

만약 유상일의 주장대로 수술을 중단시키고 강현을 쫓아냈다면, 혹은 유상일이 이 수술을 맡아 3년 전처럼 변이 혈관을 터뜨려 환자가 사망했다면―.

그 결과는 한국대병원의 파멸이었다.

송우진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가 가증스럽게 유지해 오던 우아한 미소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강현은 바닥에 떨어진 퇴거 명령서를 무심하게 밟으며 지나갔다. 그리고 바이탈 모니터 옆에 조용히 서서, 떨고 있는 송우진과 유상일을 내려다보았다.

"송 실장님."

강현의 목소리가 수술실의 기계음 사이로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이 환자의 post-op(수술 후) 집중 관리는 극도로 까다롭습니다. 미세 부동맥의 압력을 실시간으로 체크하며 승압제를 미세 조절해야 하죠. 이 퇴거 명령서대로…… 제가 지금 이 방에서 나가면 되겠습니까?"

송우진의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갔다. 그의 손끝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강현이 던진 거대한 덫에, 그들이 완벽하게 걸려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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