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그 약을 먹으면서까지 나를 지우고 싶었어, 한여진?"

가죽 시트의 서늘한 감촉 위로 낮게 깔리는 세현의 목소리는 칼날 같았다.

여진은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숨을 들이켰다. 차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진공 상태처럼 희박해졌고, 에어컨의 찬 바람조차 뺨을 따갑게 긁어내렸다. 그의 질문은 단순한 다그침이 아니었다. 약효가 완전히 사그라진 육체가 강제로 연결되는 순간의 마찰음이었다.

여진의 시선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단단한 턱끝에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거칠게 일렁이는 그의 검은 눈동자로 초점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사정없이 흔들리는 자신의 눈동자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려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선의 3단계 회피. 그러나 공명은 시각을 우회해 뇌리를 직접 때렸다.

쿵. 쿵.

세현의 심장이 분노와 상실감으로 날뛰는 소리가 여진의 가슴속에서 공진했다. 그의 체온이, 그의 손끝에 맺힌 미세한 마비감이 여진의 말초신경을 타고 그대로 흘러들었다. 소름 끼치도록 가깝고, 끔찍하게 생생했다.

"대답해."

세현이 더 바짝 다가앉았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쌉싸름한 시더우드 향과 옅은 알코올 냄새가 좁은 리무진 뒷좌석의 공기를 완벽하게 점령했다.

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을 하기 위해 입술을 떼는 순간, 심장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이 기묘한 열망을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그를 향한 감정이 1밀리미터라도 선을 넘는 순간, 가슴을 찢는 통증이 시작된다는 것을 안다. 가문의 축복이자 저주인 계약 반사. 사랑이라는 단어는 이 지옥에서 파멸의 동의어일 뿐이었다.

"지우고 싶어서 먹은 게 아냐."

여진이 마침내 고개를 돌려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목소리는 얼음처럼 투명하게 정제되어 있었다.

"도구로 쓰이기 싫었을 뿐이지. 내 비즈니스에 네 감각 같은 불확실성을 개입시키고 싶지 않았어."

"불확실성?"

세현이 자조적으로 흘리듯 웃었다. 그의 눈길이 여진의 창백해진 입술에 머물렀다가,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 끝으로 내려앉았다.

"그 불확실성이 방금 전 네 정일그룹 딜을 성공시켰는데도?"

"오판하지 마, 강세현. 난 내 능력만으로 그들을 주저앉힌 거야. 네가 내 안에서 소리를 지르든 말든, 내 머리는 언제나 차갑게 작동하니까."

차가운 침묵이 다시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였다. 리무진은 미끄러지듯 소월재의 거대한 철문을 통과했다. 짙은 어둠에 잠긴 저택은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소월재의 거실은 기묘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고대의 마법진이 자아내는 압박으로 인해 공명의 강도가 세 배는 강해졌다. 사소한 발걸음 소리조차 귓가에서 천둥처럼 울렸다.

여진은 거실 한편에 서서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가슴뼈 안쪽이 바늘로 찌르는 듯 따끔거렸다. 세현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치며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멈춰 섰다.

"이거, 더는 숨길 필요 없겠지."

여진이 재킷 주머니에서 푸른빛이 도는 유리 약병을 꺼내 대리석 테이블 위에 쿵 소리가 나게 올려놓았다. 세현의 침실 서랍 깊숙한 곳에서 찾아냈던 바로 그 감각 과부하 완화제였다.

세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가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의 약병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좁혀졌다.

"내 방을 뒤진 건가?"

"뒤진 게 아니라 확인한 거야. 네가 왜 그렇게 여유로운 척 굴 수 있었는지 궁금했거든."

여진이 테이블로 다가가 약병을 손끝으로 톡 쳤다. 유리병이 자르르 굴러가며 대리석 표면과 마찰음을 냈다.

"통증을 속이고, 나한테 아무렇지 않은 척 혐오감을 가장하려고 이 약을 먹어왔던 거잖아. 강세현, 너도 결국 이 계약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약물에 의존하고 있었던 거지?"

세현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여진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걸음걸이마다 거실 바닥에 깔린 한태오의 도청 마진 장식들이 미세하게 반응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 벽면에 숨겨진 생체 감시 마진들이 지금 두 사람의 숨소리 하나까지 백령의 본가로 전송하고 있을 터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자, 세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여진의 피부에 닿았다.

"의존이라."

세현이 약병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약병을 가볍게 돌리며, 그가 여진의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내가 이 약을 먹은 건, 내 통증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냐."

"뭐?"

"내가 아프면, 너도 아프니까."

낮게 깔리는 그의 음성이 여진의 고막을 진동시켰다.

"네가 그 잘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느라 신음 한 번 안 지르고 버틸 때, 네 몸이 느끼는 고통이 나한테 고스란히 넘어와. 그걸 차단하지 않으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아서 먹은 거야. 한여진, 넌 참 잔인해. 자신을 학대하면서까지 이기려고 들지."

여진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타인의 호의를 믿지 않는 그녀의 방어기제가 본능적으로 경고음을 울렸다. 거짓말이다. 이건 나를 흔들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이다. 하지만 그의 진심 어린 목소리와 함께, 공명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내면의 통증은 너무나 순수하고 깊어서 부정할 수 없었다.

여진은 벽면의 화려한 문양을 힐끗 응시했다. 한태오의 도청 마진이 움직이고 있다. 감정을 드러내선 안 된다.

"쓸데없는 동정은 사양하겠어. 내일 태성 테크솔루션 출범 연회가 있어. 네 동생 강선우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알잖아. 정신 똑바로 차려."

여진은 차갑게 돌아서며 세현의 시선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세현은 손에 쥔 약병을 꽉 쥐었다. 힘없이 으스러질 듯한 유리병의 감촉이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

다음 날 저녁, 태성 테크솔루션 출범 기념 연회장은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과 사교계 명사들의 가식적인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백령과 태성의 결합을 축하하는 자리였지만, 실상은 서로의 목구멍에 칼을 겨누고 있는 살얼음판이었다.

"형수님, 오늘도 눈부시게 아름다우십니다."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것은 세현의 동생, 강선우였다. 그의 등 뒤로는 몇몇 외신 기자들과 태성 외가 측의 유력 정계 인사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여진은 샴페인 잔을 든 채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서론은 치우죠, 도련님. 눈이 부신 게 아니라 눈꼴시려운 거겠죠."

"하하, 여전하십니다. 형이랑 그렇게 매일 밤 뜨겁게 지내신다면서요? 소월재의 방음이 아무리 좋아도 소문은 새어 나오기 마련이니까요."

선우의 눈빛에 뱀 같은 집요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오늘 두 사람의 신체적 불화, 즉 쇼윈도 부부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덫을 놓은 상태였다. 이미 쓰레기 언론들을 섭외해 가짜 스캔들 기사를 배포할 준비를 마쳤고, 결정적인 한 방을 위해 음모를 실행하려 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웨이터 한 명이 은반지 위에 두 잔의 음료를 얹고 다가왔다.

"태성 테크솔루션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형님과 형수님께 특별히 준비한 음료입니다. 무알코올이니 부담 없이 드시지요."

선우가 음료 잔을 들어 세현에게 권했다.

세현은 아무런 의심 없이 잔을 받아들었다. 입술에 잔을 대려는 찰나.

쿵!

여진의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거칠게 울렸다.

오감 공명이 세현의 손끝을 타고 여진의 뇌로 기괴한 신호를 송신했다. 세현이 쥔 잔에서 풍기는 미세한 화학 물질의 냄새, 그리고 그의 신경계가 일시적으로 마비되며 환각 성분에 반응하려는 전조 증상이 여진의 감각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환각 성분이 든 음료다. 강선우가 세현의 이성을 흐려놓고, 준비된 대역 배우와의 불륜 스캔들을 현장에서 터뜨리려는 수작이었다.

세현의 눈동자가 순간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여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세현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챘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리잔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붉은빛의 음료가 사방으로 튀며 강선우의 값비싼 구두와 바짓단을 적셨다.

연회장의 모든 시선이 순식간에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사교계 명사들이 속닥거리기 시작했고,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형수님?"

강선우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계획이 틀어진 것에 대한 당혹감이 역력했다.

여진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유리 파편을 우아하게 밟고 서서, 오히려 세현의 가슴팍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접촉을 통해 세현의 흔들리는 신경을 강제로 진정시키는 공명 제어였다.

"도련님."

여진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맑고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우리 그이가 최근 태성 신규 프로젝트 때문에 심각한 알레르기 약을 복용 중인 걸 모르셨나 보군요. 이 음료에 들어간 특정 허브 성분은 그이에게 치명적입니다. 동생이 되어서 형의 건강 상태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이런 무책임한 음료를 권하다니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건 도련님의 가벼운 처신이죠."

여진이 서늘하게 웃으며 등 뒤에 대기하고 있던 윤지은 비서에게 눈짓을 보냈다. 윤 비서가 즉각 태블릿 PC를 들고 외신 기자들 앞으로 나섰다.

"여기에 계신 외신 언론인 여러분."

여진이 선우를 매섭게 쏘아붙였다.

"강선우 전무가 최근 불법 브로커를 통해 입수한 환각성 의약품의 구매 내역과, 오늘 이 연회장에 잠입시킨 사설 파파라치들의 명단입니다. 또한, 방금 바닥에 쏟아진 음료의 성분 분석을 위해 이미 샘플을 채취해 제3의 감정 기관에 의뢰해 둔 상태입니다."

연회장이 발칵 뒤집혔다. 기자들이 앞다투어 태블릿 화면을 촬영하기 시작했고, 강선우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갔다.

"이, 이건 모함입니다! 형수님이 절 매장하려고 꾸민 짓이라고요!"

선우가 소리쳤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여진은 한 걸음 더 다가가 선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외가 측의 정략 네트워크를 통해 태성의 지분을 확보하려던 네 계획, 오늘부로 끝이야. 불법 약물 투여 및 후계자 음해 혐의로 네가 가진 모든 직위는 박탈될 테니까. 내 남편을 건드린 대가란다, 도련님."

여진의 완벽한 쇼와 철저한 증거 제시 앞에 선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경호원들에 의해 연회장 밖으로 끌려 나갔다. 완벽한 파멸이었다.

여진은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현의 손을 잡았다.

"가자, 세현아."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쇼윈도 부부의 완벽한 연출이었지만, 그 순간 두 사람의 맞잡은 손바닥을 통해 흐르는 전류는 가짜가 아니었다.

*

소월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의 끈이 툭 끊어졌다. 여진은 신발을 벗어 던지고 거실 소파로 향하려 했다. 극도로 긴장했던 탓에 온몸의 뼈마디가 쑤셔왔다.

그때였다.

뒤에서 뻗어 나온 단단한 팔이 여진의 허리를 거칠게 감싸 안았다.

"앗……!"

여진의 등에 세현의 단단한 가슴이 밀착되었다. 소월재의 공기가 그들의 접촉에 반응해 격렬하게 요동쳤다. 세현의 뜨거운 체온과 가쁜 숨결이 여진의 목덜미를 적셨다.

동시에, 심장 안쪽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쿠구궁.

계약 반사였다. 서로에게 이끌리는 정서적 깊이가 깊어질수록 심장을 조여드는 저주가 작동한 것이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여진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세현 역시 고통스러운 듯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거…… 놔, 강세현……."

여진이 그의 팔을 밀어내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세현은 오히려 그녀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고통을 공유하며, 그들의 심장박동이 완벽한 하나의 박자로 포개어졌다.

"싫어."

세현의 목소리가 고통과 열망으로 뒤섞여 젖어 있었다.

"언제까지 이 지옥 같은 규칙에 놀아나야 하지? 서로를 증오해야만 살 수 있고, 사랑하면 죽어야 하는 이 따위 계약에."

그의 손가락이 여진의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깍지를 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심장까지, 전율과 통증이 동시에 몰아쳤다.

"한여진. 나랑 같이 이 가문을 찢어버리자."

세현이 그녀의 귀밑샘에 입술을 묻으며 낮게 속삭였다.

"그 계약의 원본이든, 우리를 옭아매는 원로원이든, 전부 내 손으로 부숴버릴 테니까. 그러니까 너도…… 도망치지 마."

그의 절박한 결의 요청이 여진의 심장에 균열을 일으켰다. 가슴속 저주가 더욱 붉게 타오르며 통증을 더해가는 가운데, 여진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어둠 속의 벽면을 바라보았다. 한태오의 도청 마진이 그들의 이 위험한 반역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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