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아귀는 단단한 족쇄와 같았다.
링거 바늘이 살갗을 파고든 세현의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병실 내부를 가득 채운 인공적인 소독약 냄새와 그 너머로 얇게 배어 나오는 그의 체취가 여진의 호흡을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석양이 창살 같은 블라인드 틈새로 들이쳐 그의 젖은 머리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여진은 굳어버린 손목 위로 전해지는 심장박동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혈류의 흐름이 아니었다. 공명 계약의 끈을 타고 뇌리로 곧장 꽂히는, 날것 그대로의 집착이자 소유욕이었다.
세현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먼저 여진의 흐트러진 셔츠 깃에 머물렀던 그의 눈길이, 가녀린 목덜미를 지나, 마침내 흔들림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진의 검은 눈동자에 못 박혔다. 3단계로 이어지는 그 집요한 시선의 이동 속에, 감출 수 없는 열망이 서려 있었다.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세현이 여진의 손목을 제 가슴팍으로 더욱 바짝 잡아당겼다. 갈비뼈 미세 골절의 통증을 알리는 그의 미세한 신음이 오감 공유를 통해 여진의 가슴속으로도 고스란히 복제되어 들어왔다. 지독하게 아팠고, 지독하게 뜨거웠다.
"하지만 내 몸에 새겨진 이 고통이 증명해. 당신은 절대 나한테서 벗어날 수 없어, 한여진."
"놓아, 강세현."
여진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그러나 가슴 안쪽에서 찌릿하게 울리는 경고음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계약 반사. 그를 향해 싹트기 시작한 미세한 감정의 싹이 심장을 물리적으로 쥐어짜는 통증으로 화해 돌아오고 있었다. 이대로 그의 소유욕에 휩쓸려 마음을 열어주는 순간, 가문의 행운은 소멸하고 자신의 심장은 영원히 붕괴할 것이다.
감정은 파멸의 지름길이다. 여진은 마음속으로 그 주문을 되뇌며 강제로 시선을 꺾었다.
"환자 주제에 힘자랑할 여유는 있나 보네."
여진이 가차 없이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붉게 손자국이 남은 손목을 소매 속에 감추며,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장 내일 정일그룹과의 합병 프레젠테이션이 있어. 당신이 여기서 앓아누워 있는 동안, 나는 내 몫을 하러 가야 해."
세현은 허공에 남겨진 자신의 손가락을 천천히 굽히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여전하네, 한여진. 이 상황에서도 일 걱정뿐이라니."
"그게 우리가 쇼윈도 부부로 맺어진 유일한 이유니까."
여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세현의 시선이 그녀의 등 뒤에 집요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
그날 밤, 소월재의 공기는 유독 무겁고 차가웠다.
여진은 자신의 서재에 서서 책상 서랍 깊숙한 곳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세현의 침실 서랍에서 몰래 가져온, 파란색 유리병에 담긴 약을 손에 쥐고 있었다.
감각 과부하 완화제.
공명 계약으로 인한 초감각과 고통을 억제하기 위해 세현이 숨겨두었던 약이었다. 여진은 약병의 마개를 열었다. 투명하고 푸른빛이 도는 액체에서 서늘한 박하 향과 알 수 없는 금속성 체취가 풍겼다.
심장이 또다시 쿵, 하고 내려앉으며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을 보냈다. 세현의 병실에서 느꼈던 그 미묘한 정서적 이끌림이 잔인한 억제 메커니즘을 자극한 탓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내일 정일그룹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터였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통증을 강제로 잠재워야만 했다.
여진은 망설임 없이 약을 입안에 쏟아부었다.
차가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마자,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소음이 일순간에 씻겨 내려갔다. 세현의 불규칙한 심장박동, 그의 상처에서 비롯된 미세한 통증, 그리고 소월재 전체를 흐르던 그 끈적하고 관능적인 공명의 파동이 거짓말처럼 얼어붙었다.
온몸의 감각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가슴을 쥐어짜던 통증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오직 서늘한 공허감만이 남았다.
"……완벽해."
여진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핏기 없이 창백하지만, 그 어떤 감정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얼음 가면이 그곳에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소월재의 거실에서 세현은 여진을 마주했다.
그는 퇴원하자마자 깁스도 하지 않은 채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여진을 발견한 세현의 눈빛이 본능적으로 빛났다. 그는 어제 병실에서의 열기를 이어가려는 듯 여진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세현의 시선이 여진의 눈가에 닿았다가, 그녀의 굳게 다문 입술을 거쳐, 이내 미동도 없는 그녀의 어깨선으로 내려앉았다. 평소라면 이 정도 거리에서 두 사람 사이의 적대감과 긴장감이 공명하며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라야 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세현이 미간을 좁히며 여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여진."
"비켜, 강세현. 출발해야 해."
여진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가시마저 사라져 있었다. 오직 극도로 정제된, 기계적인 평온함만이 흘렀다.
세현은 이상함을 감지하고 손을 뻗어 여진의 팔을 잡았다. 손끝이 닿는 순간, 그는 감전된 듯한 충격을 기대했다. 늘 그들의 살결이 닿을 때마다 뇌리를 지배하던 그 강렬한 직감과 행운의 스파크, 혹은 미세한 통증의 공유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절대적인 영도(0度)의 심연. 얼어붙은 빙벽을 만지는 듯한 철저한 무감각이었다.
세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의 시선이 여진의 무표정한 얼굴에 고정되었다.
"지금 당신…… 왜 이래?"
"뭐가?"
"내 안에서 당신이 느껴지지 않아. 아무것도."
세현의 목목한 배신감과 깊은 상실감이 그의 목소리에 묻어났다. 늘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삼킬 듯 대치하던 동맹의 끈이 통째로 끊겨 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여진은 그의 손을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뿌리쳤다.
"쓸데없는 노이즈가 사라졌을 뿐이야. 집중해, 강세현. 오늘은 백령과 태성의 미래가 걸린 날이니까."
그녀의 말투는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세현은 텅 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가슴 안쪽에서 묵직한 균열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오감 동맹의 상실감은 생각보다 훨씬 더 그를 깊게 파고들었다.
***
백령그룹 본사 귀빈실.
윤지은 비서가 여진의 곁으로 다가와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실시간으로 측정되는 두 가문의 비즈니스 독점 행운지수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래프는 완만한 하강 곡선을 그리며 경고 영역에 근접하고 있었다.
"원로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은이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두 분의 공명 상태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냐며 극도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태오 회장님 측에서 소월재의 생체 반응 수치가 평소와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여진은 서재 벽면에 장식된 고풍스러운 문양들을 떠올렸다. 한태오가 심어둔 고대마법 도청 및 생체 감시 마진. 그 음험한 눈과 귀가 여전히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상관없어. 결과로 증명하면 원로회도 입을 닫을 테니까."
여진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강세현 대표와의 교감선이 차가워진 상태에서 정일그룹의 공세를 막아내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이미 우리의 불화설을 흘리며 특허 소송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행운 같은 우연에 기대는 건 오늘로 끝이야."
여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수트 재킷의 단추를 채웠다.
"내 진짜 실력이 어떤지 똑똑히 보여주지."
***
컨퍼런스 룸은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백령과 태성의 공동 인수 합병 대상인 바이오테크 기업 '셀리온'의 최종 프레젠테이션 현장. 맞은편에는 라이벌사인 정일그룹의 대표단이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정일그룹의 프레젠터가 단상에 올랐다. 그는 빔프로젝터 화면에 백령과 태성이 공동으로 보유한 원천 기술의 맹점을 조목조목 짚어내기 시작했다.
"백령과 태성이 자랑하는 '바이오 융합 플랫폼'은 치명적인 특허 침해 소지가 있습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연구소의 선행 특허와 구조가 87% 유사합니다. 만약 두 가문이 인수를 강행한다면, 정일그룹은 즉각 글로벌 특허 소송을 제기할 것입니다. 인수하자마자 빈껍데기 회사가 될 리스크를 감수하시겠습니까?"
장내가 술렁였다. 백령과 태성 측 임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세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태블릿을 두드렸다. 평소라면 공명 계약을 통해 상대방의 숨겨진 패나 협상 전략이 직감적으로 뇌리에 스쳐 지나갔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머릿속은 지독할 정도로 고요했다. 행운의 지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정일의 대표가 승리를 확신한 듯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여진을 바라보았다.
"한여진 부사장님, 이에 대한 명확한 해명이 없다면 셀리온의 대주주들은 정일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세는 기울었군요."
세현이 입을 열려던 찰나, 여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가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얼음으로 조각된 것처럼 차갑고 투명했다.
"특허 침해라."
여진이 나지막하게 읊조리며 정일그룹 측 대표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정일그룹의 정보력이 고작 그 정도 수준일 줄은 몰랐군요."
그녀가 포인터를 들어 화면을 전환했다. 화면에는 정일그룹이 제시한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특허 명세서와 또 다른 영문 문서들이 나란히 대조되어 나타났다.
"귀사에서 제시한 선행 특허는 3년 전 'A-201' 조항의 개정으로 인해 이미 효력이 상실된 무효 특허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령과 태성이 공동 출원한 기술은 단순한 물리적 구조의 배치가 아닙니다. 우리는 2주 전, 유럽 특허청에 독자적인 '유전자 가위 전달체'에 대한 우선권을 이미 확보해 둔 상태입니다."
정일그룹 대표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그, 그것은 아직 비공개 정보일 텐데……!"
"비공개 정보를 파악하지도 못하고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것이 정일의 방식입니까?"
여진의 목소리가 컨퍼런스 룸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 차갑게 내리꽂혔다.
"더불어, 정일그룹이 최근 무리하게 추진한 '시노 바이오' 인수 건으로 인해 현재 가용할 수 있는 현금성 자산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줄 알았습니까? 귀사는 셀리온을 인수할 자금력 자체가 없습니다. 오직 언론 플레이와 허위 특허 소송 위협으로 우리의 눈을 가리려 한 것에 불과하죠."
여진은 정일그룹 측 배후의 자금 흐름과 재무제표의 맹점을 소수점 단위까지 정확하게 읊어내며 그들의 목줄을 죄어갔다. 오감의 행운이나 직감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직 그녀가 밤을 새워 분석한 철저한 데이터와, 상대의 심리적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냥꾼 같은 통찰력만으로 충분했다.
"이것이 백령과 태성의 대답입니다. 정일그룹은 이 시간부로 셀리온 인수전에서 완전히 퇴장해 주시길 바랍니다. 더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군요."
여진이 포인터를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완벽한 침묵.
이내 백령과 태성 측 임원석에서 터져 나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셀리온의 대주주들이 여진을 향해 기립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정일그룹의 대표단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서둘러 서류 가방을 챙겨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압도적인 장악력이었다. 공명의 도움 없이, 오직 한여진이라는 인간 본연의 능력만으로 이뤄낸 완벽한 승리였다.
세현은 박수갈채 속에서 홀로 단상에 서 있는 여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맞춤은 여전히 차가웠고, 세현의 존재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 비즈니스는 성공했으나,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은하수만큼이나 아득하게 멀어져 있었다.
***
모든 일정이 끝나고, 소월재로 돌아가는 길.
리무진의 뒷좌석은 질식할 것 같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화려한 야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차 안의 온도는 영하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여진은 창밖을 응시하며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툭.
갑자기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여진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온몸의 신경이 불타오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약효가…… 벌써 떨어진 건가?'
완화제의 지속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짧았다. 억눌려 있던 감각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며 온몸의 세포를 자극했다.
동시에 옆자리에 앉은 세현의 존재감이 폭발적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의 거친 심장박동, 어깨의 미세한 통증,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내면에 도사린 깊은 상실감과 자괴감이 공명을 타고 여진의 뇌리를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흡……!"
여진은 신음을 삼키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붕괴할 것 같은 통증에 시야가 흐려졌다. 숨이 가빠오고,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포커페이스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때, 세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여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진의 고통을 고스란히 공유하며 느끼는 아픔과, 그보다 더 깊은 슬픔이 얽혀 있었다. 그는 여진이 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세현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 약을 먹으면서까지 나를 지우고 싶었어, 한여진?"
그의 목소리가 어두운 차 안의 공기를 가르며 여진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여진은 고통으로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려 입을 여는 순간, 그를 향한 진심이 폭발해 심장이 완전히 바스러질 것만 같았기에.
두 사람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팽팽하게 엉킨 채, 차는 소월재의 어두운 입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