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독약의 알싸한 냄새가 서재의 가라앉은 공기를 찢고 번졌다.
여진은 제 손목을 움켜쥔 세현의 손가락을 응시했다. 단단하게 박힌 마디와 굳은살, 그리고 손등을 타고 완만하게 솟아오른 푸른 정맥의 줄기.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의 손목뼈를 지나, 상처를 내려다보는 고요하고 깊은 눈매로 옮겨갔다.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굳게 다물린 그의 얇은 입술이었다. 그의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여진은 미세하게 호흡을 멈췄다.
"이거 놓으라고 했을 텐데."
"말했잖아. 가만히 있으라고."
세현의 목소리는 낮고 낮아서, 서재의 바닥재를 타고 흐르는 미동 없는 진동 같았다. 소독약을 적신 거즈가 손가락 끝의 붉은 상처에 닿는 순간, 여진은 턱 끝을 바르르 떨었다.
단순한 상처의 쓰라림이 아니었다. 그의 손끝이 닿은 부위로부터 시작된 기묘한 파동이 척추를 타고 빠르게 상승했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흉골 안쪽이 뜨거운 쇠꼬챙이로 쑤시는 것처럼 옥죄어 왔다. 붉은 경고등이 뇌리 속에서 점멸하는 감각.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위험할 정도로 좁혀졌을 때 찾아오는, 계약의 잔혹한 반사 작용이었다.
서로를 증오해야만 가문의 번영을 보장하는 행운의 계약.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세현의 정밀하고도 조심스러운 손길은 증오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
여진의 입술 틈새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상체가 세현의 가슴팍 쪽으로 꺾이듯 휘청였다.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압박감에 눈앞이 일순 아득해졌다.
세현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목을 쥔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넓은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되었고, 이마에 얇은 핏대가 도드라졌다. 통증을 공유하는 계약의 룰에 따라, 여진이 느끼는 심장의 파열감이 그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되고 있었다.
"강세현, 너……."
"참아."
그가 이빨 사이로 숨을 들이쉬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여진의 얼굴을 담아냈다. 고통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여진의 눈꺼풀과 찌푸려진 미간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서로를 무너뜨려야 하는 숙적. 그러나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호흡은 기이할 정도로 뜨겁고 끈적였다. 세현은 끝내 손가락 끝에 밴드를 정교하게 붙인 후에야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물리적 접촉이 끊기자마자, 거짓말처럼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여진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지독한 갈망과 적의가 뒤섞인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 * *
사흘 뒤 오전.
소월재를 나선 세단은 백령그룹 사옥으로 향하는 간선도로 위에 있었다. 차 안은 가죽 시트의 냄새와 에어컨에서 흘러나오는 건조한 바람으로 채워져 있었다.
여진은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회색빛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며 왼쪽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사흘 전 소월재 서재에서의 접촉 이후, 심장을 짓누르는 은근한 압박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공조를 이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이 통증은 시한폭탄과 다름없었다.
옆자리에 앉은 세현은 태블릿 PC의 화면을 무심히 넘기고 있었다. 말끔한 수트 차림에 흐트러짐 없는 태도였지만, 여진은 그의 호흡이 평소보다 약간 무겁다는 것을 공명된 초감각으로 눈치채고 있었다.
"안색이 안 좋네, 여보."
세현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지막이 속삭였다. '여보'라는 인위적인 호칭이 그의 입술 사이로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쓸데없는 걱정 할 시간에 오늘 발표할 우주항공 감축안이나 검토해. 당신 가문에서 태클 걸지 못하게."
여진의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다.
"태성 원로들이 순순히 물러서진 않겠지만, 내 아내가 준비한 기획서라면 군말 없이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겠지. 행운은 언제나 우리 편이니까."
세현이 피식 웃으며 태블릿을 껐다. 그의 손가락이 가볍게 허벅지를 두드렸다.
그때였다.
차가 교차로를 향해 진입하며 속도를 줄여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세단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엔진이 굉음을 내며 전방의 대형 덤프트럭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어? 어…… 상무님! 브레이크가……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운전기사의 다급하고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끼이이이익-!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차체가 좌우로 심하게 요동쳤다. 급박하게 꺾이는 핸들 조작에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여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차 문 옆의 손잡이를 잡으려 했지만, 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에서 제어력을 잃은 차량 내부에서 몸을 가누기란 불가능했다. 전방의 트럭과 가드레일이 유리의 비명과 함께 시야를 가득 메웠다.
'한태오.'
머릿속에 불꽃처럼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여진의 아버지이자 백령의 절대 권력자. 사흘 전 입찰 건으로 타격을 입은 그가 움직인 것이 분명했다. 딸의 목숨줄을 쥐고 흔들어서라도 경고를 보내겠다는 잔인한 수법이었다.
충돌까지 남은 시간은 단 2초.
그 찰나의 순간, 여진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죽음의 공포가 전신을 지배하려던 그때, 거친 손길이 여진의 어깨를 낚아챘다.
"강세현……!"
세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여진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강인한 팔이 그녀의 머리와 가슴을 완벽히 감싸 안았다. 세현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이 파묻히며, 그의 체온과 짙은 침엽수 향이 코끝을 찔렀다.
동시에 세현의 입술이 여진의 귓가에 닿았다.
"연결해."
짧고 단호한 명령.
세현은 공명 계약의 '오감 및 통증 공유'를 역방향으로 강제로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보통은 고통을 서로 나누거나 증폭시키는 룰이지만, 세현은 자신의 모든 정신력을 집중해 여진에게 가해질 물리적인 충격 에너지를 자신의 감각 경로로 고스란히 '흡수'하는 경로를 열었다.
쿠구구궁-!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세단이 가드레일을 들이받으며 전복되듯 멈춰 섰다. 쇠붙이가 처참하게 찌그러지고 유리가 사방으로 비산하는 충격이 차체를 관통했다.
하지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세현의 품에 안긴 여진은 충돌의 물리적인 충격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마치 중력이 사라진 공간에 떠 있는 것처럼, 그녀의 몸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머리가 흔들리지도, 갈비뼈가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완벽한 무풍지대였다.
대신, 여진의 영혼을 흔드는 엄청난 고통의 파동이 들이닥쳤다.
"끄윽……!"
세현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공명 계약을 통해 여진에게 전해진 것은 세현의 육체가 겪고 있는 대리 파열의 고통이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압박감, 내부 장기가 뒤틀리는 듯한 충격, 그리고 머리를 강타당한 듯한 극심한 두통이 여진의 신경망을 타고 그대로 전송되었다.
그것은 세현이 여진의 몫까지 모든 타격을 홀로 짊어졌음을 의미했다.
차 안을 메운 매캐한 연기 속에서, 여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세현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의 잘생긴 미간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그의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콧등을 타고 흘러내린 선혈이 여진의 하얀 실크 셔츠 깃을 붉게 적셨다.
"너…… 미쳤어? 왜 이런……."
여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타인의 호의를 믿지 않는 그녀에게, 세현의 이 무모한 희생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행위였다.
그러나 그 순간, 여진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했다. 사흘 동안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계약 반사의 붉은 통증 지표가, 세현이 충격을 대리 흡수함과 동시에 마법처럼 가라앉고 있었다. 저주의 압박이 가라앉으며 신체의 안전 지표가 완벽한 녹색으로 원복되는 기이한 현상.
세현이 고통을 대신 짊어짐으로써, 계약의 가혹한 질서가 일시적으로 중화된 것이었다.
세현은 피 묻은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호흡을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는 흐려지고 있었지만, 여진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집요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말했잖아……. 내 허락 없이…… 다치지 말라고."
그의 목소리가 힘없이 가라앉더니, 이내 그의 고개가 여진의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여진의 손이 세현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그의 몸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지만, 공명을 통해 느껴지는 그의 심장박동은 여전히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그때, 세현의 정장 안주머니에서 작은 갈색 약병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지난번 그의 서재에서 보았던 감각 과부하 완화제였다. 약병의 라벨은 마모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그가 오감 공명의 가혹한 통증을 억누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용해 온 도구임이 명백히 드러났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통증의 무게를 혼자 감당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슬픔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다만 그녀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은, 자신들의 목숨을 도구로 여겨 짓밟으려 한 배후를 향한 극도의 분노와 살기였다.
"강세현, 정신 차려."
여진은 세현을 조심스럽게 시트 안쪽에 눕힌 뒤, 찌그러진 차 문을 발로 밀어 열었다. 유리 파편이 아스팔트 바닥에 흩뿌려지는 소리가 적막한 도로 위에 울려 퍼졌다.
* * *
사고 발생 후 10분 뒤.
사고 현장은 백령그룹 본사 사옥에서 불과 두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이미 백령의 경호팀과 감사팀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었고,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어지럽게 터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군중의 중심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백령그룹 개발본부의 임 전무. 한태오 회장의 충직한 사냥개이자, 이번 차량 정비 조작을 현장에서 지휘한 인물이었다. 그는 짐짓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비서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상무님의 차량 관리를 전담하는 정비팀을 당장 구속 수사하도록 해! 한 회장님께서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은밀한 안도감과 가증스러운 위선이 섞여 있었다.
그때, 찌그러진 세단의 문을 열고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머리칼은 흐트러졌고, 하얀 셔츠 깃에는 붉은 피가 선명하게 묻어 있었지만,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걸어오는 한여진의 모습에, 현장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임 전무는 여진이 멀쩡한 모습을 보자 눈동자를 미세하게 떨었다. 하지만 이내 안면을 바꾸고 다급하게 다가왔다.
"상무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차량 브레이크에 문제가 생겼던 모양입니다. 당장 정밀 조사를……."
"정밀 조사?"
여진이 가던 길을 멈추고 임 전무의 앞에 섰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가 그를 관통하듯 쏘아보았다. 시선의 이동은 정교했다. 그의 초조하게 비벼대는 손끝에서 시작해, 땀이 맺힌 이마를 거쳐,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입술에 머물렀다.
"예, 그렇습니다. 정비업체의 과실이 분명합니다. 제가 직접……."
"임 전무."
여진이 그의 말을 가차 없이 잘랐다.
공명 계약으로 극대화된 여진의 초감각과 행운의 직감이 머릿속에서 경고음을 울렸다. 임 전무의 오른쪽 안주머니가 유독 무겁게 처져 있었다. 그 안에는 정비 일지를 원격으로 조작하고 센서를 무력화하는 데 사용된 마스터 태블릿과, 한태오의 비서실과 접촉한 대포폰이 들어 있을 터였다.
"당신 주머니에 있는 그 태블릿, 꺼내지 그래?"
"예? 그,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임 전무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정비업체의 과실로 몰아가기 위해 오늘 아침 8시 40분, 백령 사옥 지하 주차장에서 차량의 제어 센서를 해킹한 기록. 그리고 그 조작을 명령한 발신 번호. 전부 그 태블릿과 대포폰에 남아 있을 텐데."
여진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고, 현장에 모인 기자들의 마이크가 일제히 그녀의 입가로 향했다.
"상무님, 그것은 억측이십니다! 저는 가문을 위해……."
"가문을 위해 내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했다?"
여진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독기에 임 전무는 이마의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백령의 법무팀과 감사팀은 들어."
여진이 뒤에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들을 향해 서늘하게 명령했다.
"개발본부 임 전무를 자본시장법 위반 및 살인미수 교사 혐의로 즉각 현행범 체포하도록 경찰에 인계해. 또한 대주주 권한으로 임 전무의 모든 직위를 이 시간부로 영구 해임한다. 백령 계열사 전반에 걸친 그의 자산은 동결될 것이며, 이사회에 소집장을 발송해 그의 해임안을 즉시 상정하라."
"상무님! 아무리 상무님이라 하셔도 회장님의 결재 없이 저를 이렇게……!"
임 전무가 악을 쓰며 반발했다. 한태오라는 거대한 뒷배를 믿고 부리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여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 내 아버지가 당신에게 물려줄 자리는 이제 없어, 임 전무. 당신이 가진 모든 비밀 장부와 이 사고의 증거는 내 손을 거쳐 검찰로 갈 테니까. 아버지 역시 꼬리를 자르기 위해 당신을 가장 먼저 진흙탕에 처박겠지."
여진의 단호하고도 주체적인 결단에 현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남편의 희생에 눈물 흘리며 주저앉는 약한 여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이 위기를 역이용해, 자신을 위협하던 한태오의 가장 강력한 수하를 단숨에 사회적으로 매장해 버렸다.
"끌고 가."
여진의 짧은 명령과 함께, 감사팀 직원들이 새파랗게 질린 임 전무의 양팔을 붙잡았다.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며 그의 몰락을 기록했다.
* * *
서울의 한 대학병원 VIP 병동.
백색의 소독약 냄새와 인공적인 기계음만이 가득한 병실 안은 고요했다. 창밖으로 노을이 붉게 물들어가며 병실 안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여진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셔츠에 묻은 세현의 피는 이미 거뭇하게 굳어 있었다.
침대 위에는 여러 개의 링거와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달고 있는 세현이 누워 있었다. 대리 파열로 인한 충격으로 갈비뼈 미세 골절과 가벼운 뇌진탕 판정을 받았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진단이었다.
공명 계약의 끈은 여전히 두 사람을 잇고 있었다. 세현의 불규칙한 심장박동과 미세한 통증이 여진의 뇌리에 은밀하게 전달되었다. 그것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신호였다.
스스스…….
세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의 감겨 있던 눈꺼풀이 무겁게 떨리더니, 이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초점이 흐릿하던 그의 눈동자가 이윽고 허공을 헤매다, 침대 곁에 앉아 있는 여진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의식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여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요하게 얽혀들었다.
"……살아 있네."
세현이 산소마스크 너머로 갈라진 목소리를 뱉어냈다.
"당신 덕분에 멀쩡해.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누워 있어."
여진이 짐짓 차갑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석-!
그 순간, 세현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나와 여진의 손목을 낚아챘다. 링거 바늘이 꽂힌 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귀힘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여진의 상체가 다시 한번 그의 쪽으로 쏠렸다.
"이거 놓으라고 했을 텐데, 강세현."
"못 놓아."
세현이 마스크를 벗어 던지며 낮게 읊조렸다. 그의 입술 끝에 맺힌 핏자국이 붉은 노을빛을 받아 기이하게 빛났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평소의 가면 같은 장난기나 여유로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한 여자를 온전히 제 품에 가두고 지배하겠다는, 날것 그대로의 소유욕과 집요한 집념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세현이 여진의 손목을 제 가슴팍으로 잡아당겼다.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진동이 여진의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지만 내 몸에 새겨진 이 고통이 증명해. 당신은 절대 나한테서 벗어날 수 없어, 한여진."
그의 뜨거운 숨결이 여진의 얼굴에 닿는 순간, 다시 한번 심장 안쪽에서 찌릿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여진은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집착 어린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텐션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