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그들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스쳐 지나간 순간, 연회장의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여진의 망막 위에서 잔인하게 부서졌다.

귀를 찢을 듯한 박수갈채와 가식적인 환호성이 사방에서 쏟아졌지만, 여진에게는 그 어떤 소리도 가닿지 않았다. 오직 눈앞에 있는 사내, 강세현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만이 시야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세현의 눈동자는 평소의 냉소적인 빛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 안에는 연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열망이 불꽃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여진을 온전히 제 아래 두고 움켜쥐려는 지독한 소유욕. 그것은 비즈니스 파트너에게 어울리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 찰나의 눈맞춤이 일어난 직후였다.

쿵-!

심장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무거운 쇠말뚝이 박히는 듯한 압박감이 휘몰아쳤다. 사흘 전에 겪었던 통증과는 궤를 달리하는, 영혼까지 잘게 찢어발기는 물리적 고통이었다. 가슴뼈 안쪽이 순식간에 타들어 가며 재가 되어 흩어지는 감각에 여진의 턱끝이 잘게 떨렸다.

여진은 무의식적으로 세현의 어깨를 짚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손톱이 세현의 고급 실크 슈트 원단을 뚫고 들어가 그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세현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의 탄탄한 상체가 눈에 띄게 경직되더니, 여진의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귀에 핏줄이 터질 듯 돋아났다. 그의 턱관절이 거칠게 맞물리며 잇새로 나지막한 신음이 샜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여진의 눈동자가 고통으로 가늘게 떨리며 세현의 시선을 피하려 아래로 향했고, 세현은 일그러진 미간을 숨기지 못한 채 그녀의 흔들리는 눈꺼풀을 집요하게 쫓았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 닿았을 때, 그곳에는 서로를 향한 경계와 억누를 수 없는 경고가 동시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것은 가문이 심어둔 잔혹한 억제 메커니즘, 즉 계약 반사였다. 서로를 증오해야만 가문이 번영하는 이 기괴한 공명 속에서, 방금 전 그들의 내면에 싹튼 찰나의 진심이 심장 붕괴의 저주를 작동시킨 것이다.

"……비켜."

여진은 가까스로 목구멍을 뚫고 나오는 비정상적인 목소리를 뱉어냈다.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 때문에 숨을 쉴 때마다 비린 피 냄새가 혀끝에 맴돌았다.

세현은 대답 대신 그녀의 허리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그의 손길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피부를 타고 흐르던 온기가 서늘한 연회장의 공기로 대체되었다. 세현의 입술이 가볍게 호선을 그렸지만, 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은 감출 수 없었다.

여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가식적인 미소로 가득 찬 한태오 회장의 시선을 피하는 것은 물론, 이 지옥 같은 통증으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소월재 깊숙한 곳에 위치한 원로원의 비밀 서재였다.

소월재의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여진은 벽면에 장식된 거대한 청동 부조들을 응시했다. 벽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한태오의 생체 감시 마진이 자신들의 미세한 생체 에너지 변화를 실시간으로 측정하고 있을 터였다. 심장의 박동이 흐트러진 것을 들키는 순간, 가문의 사냥개들이 목덜미를 물어뜯으러 올 것이다.

여진은 가슴을 움켜쥐고 비밀 서재의 무거운 목재 문을 밀어 열었다.

서재 내부는 퀴퀴한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허파로 들어오자 통증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이곳은 백령과 태성의 원로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수집해 온 고서들이 보관된 밀실이었다.

여진은 서재 가장 안쪽, 자물쇠가 채워진 철제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가락 끝을 날카로운 책장 모서리에 그었다.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여진의 피가 책장 전면에 새겨진 문양에 닿자,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비밀 수납공간이 열렸다. 그 안에는 가죽이 다 헤진 고대 계약 사본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가죽 표지의 뒷면을 거칠게 뒤집었다.

그곳에는 붉은색 인장으로 찍힌 기묘한 예외 조항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일종의 기하학적인 문양이었는데, 마치 심장이 사슬에 묶여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여진은 그 문양을 손가락으로 거칠게 쓸어내렸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서늘한 감각이 뇌리를 찔렀다.

"역시…… 그냥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어."

여진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바람을 타고 익숙한 향이 밀려들어 왔다. 묵직한 시더우드 향과 섞인, 미세하게 타들어 가는 듯한 체취. 강세현이었다.

여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고서를 덮었다. 탁, 하는 무거운 소리가 적막한 서재 안을 울렸다.

"남의 사유지에 쥐새끼처럼 드나드는 버릇은 여전하네, 강세현."

"쥐새끼라니. 합법적인 남편의 권리로 아내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러 온 거지."

세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능청스러웠지만,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한번 얽혔다. 여진은 경계가 가득 찬 차가운 눈빛으로 세현의 미간을 쏘아보았고, 세현은 그녀의 창백하게 질린 입술과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 끝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윽고 세현의 눈길이 그녀의 가슴팍, 심장 부근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여진의 눈동자에 머물렀다.

"안색이 엉망이야, 한여진. 춤을 너무 격렬하게 췄나 봐?"

세현이 비스듬히 벽에 기대며 물었다. 그의 손은 바지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 안에서 작은 유리병들이 부딪치는 달그락 소리가 미세하게 울렸다.

여진은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지난번 발견했던 감각 과부하 완화제 약병일 것이다. 그 역시 저주의 고통을 억누르기 위해 약물에 의존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가면을 쓰고 있었다.

"당신 안색이나 신경 쓰시지. 거울이라도 보여줄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건 그쪽이야."

여진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서로 아픈 처지에 날을 세우기는. 조금 전 연회장에서 나한테 매달릴 때는 언제고."

"매달린 게 아니라 연출을 한 거야. 착각이 심하네, 강세현. 내 눈에 비친 당신은 그저 백령을 집어삼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해."

"도구라……."

세현이 천천히 벽에서 몸을 떼며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카펫이 깔리지 않은 대리석 바닥에 무겁게 울렸다.

"그 도구를 보는 눈빛이 그렇게 뜨거웠단 말이지. 덕분에 내 심장이 아주 가루가 될 뻔했는데."

"그건 계약의 오작동일 뿐이야. 내 이성은 당신 같은 남자를 단 한 순간도 마음에 품은 적 없으니까."

여진은 턱을 치켜들며 매몰차게 대꾸했다. 심장의 통증이 다시금 욱신거리며 그녀의 신경을 긁어댔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가문에게 도구로 길러진 그녀였다. 약점을 보이는 순간 승계 구도에서 탈락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세현은 여진의 코앞까지 다가와 멈춰 섰다. 그의 숨결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여진의 뺨에 닿았다.

"오작동이라기엔 너무 정확한 경고였어. 우리가 서로에게 '적의' 이외의 것을 품는 순간, 이 계약은 우리 목을 조른다."

세현의 시선이 여진이 들고 있는 고서로 향했다.

여진은 고서를 품에 안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책장 위에 고서를 펼쳐 보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고대 라틴어로 기록된 문장들을 가리켰다.

"이걸 봐. 원로원의 고대 기록이야."

세현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역시 고서 쪽으로 상체를 굽혔다.

여진은 떨리는 숨을 고르며 고서의 내용을 나지막이 해독해 내려갔다.

"‘두 가문의 결합은 오직 증오의 불꽃 위에서만 번영하리라. 만약 후계자들이 서로를 향해 사사로운 연정을 품거나, 이성을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을 갖는 즉시…….’"

여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의 심장은 안쪽에서부터 붕괴할 것이며, 가문의 번영을 지탱하던 모든 상업적 행운은 바닥을 드러내고 연쇄적인 파멸에 이를 것이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 무겁게 침묵했다.

가문이 그들에게 채운 족쇄의 실체였다. 그들은 서로를 죽도록 미워해야만 가문을 지킬 수 있고, 서로를 사랑하는 순간 목숨과 가문 전체를 잃게 되는 잔혹한 운명에 처해 있었다.

세현은 고서의 붉은 문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깊은 어둠이 내리앉았다.

"진심을 품는 즉시 파멸이라. 아주 지독한 장치를 해뒀군, 늙은이들이."

"지독한 게 아니라 효율적인 거지. 사사로운 감정 따위로 가문의 이익을 해치지 못하게 만드는 완벽한 통제 수단이야."

여진이 냉소적으로 웃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서늘한 투지가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틀렸어. 원로원 늙은이들도, 우리 아버님도."

여진이 세현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거칠게 밀어내며 선언했다.

"난 이 구차한 저주 따위에 내 운명을 맡기지 않아. 강세현, 똑똑히 들어. 난 당신을 향한 감정 따위로 심장이 무너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오히려 이 계약의 규칙을 내가 통제하겠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가문이 선사한 구속의 사슬을 제 손으로 끊어내고, 백령과 태성 두 거대 가문의 왕좌를 모두 독점하겠다는 거대한 야망이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남주의 구원이나 동정 따위에 기대어 살아남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세현은 그런 여진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주체적인 독기와 거침없는 투지가 그의 심장을 묘하게 자극했다.

"역시 내 아내답네. 그 오만함이 아주 마음에 들어."

세현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투지를 불태우는 건 좋은데, 몸 상태부터 챙기지 그래?"

"무슨 소리야……."

여진이 반박하려던 찰나였다.

석-!

세현이 거칠게 여진의 손목을 낚아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거 놓으라고 했을 텐데!"

여진이 반발하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세현의 아귀힘은 완강했다. 세현은 이미 주머니에서 소독약과 거즈를 꺼낸 상태였다. 아까 책장 모서리에 긁혀 피가 흘러내린 그녀의 손가락 끝을 치료하려는 속셈이었다.

"가만히 있어. 덧나면 비즈니스 미팅 때 포커페이스 유지하기 힘들 텐데."

세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여진의 손가락을 단단히 움켜쥐고, 상처 부위를 정밀하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 끝이 여진의 상처 난 피부에 닿았다.

그 순간.

쿠구궁-!

두 사람의 신체가 긴밀하게 접촉하자, 억눌려 있던 공명 계약이 다시 한번 발작적으로 요동쳤다.

단순히 물리적인 아픔이 아니었다. 세현의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그의 미세한 체온, 그의 흐트러진 호흡, 그리고 잔인할 정도로 정교하게 가해지는 심장의 압박감이 여진의 전신을 관통했다.

"아……!"

여진의 상체가 크게 휘청였다. 가슴뼈 속 심장이 격한 경고 수준으로 강하게 수축하며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 눈앞이 다시 한번 붉은 빛으로 번뜩였다.

세현 역시 이를 악물며 그녀의 손목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여진의 얼굴을 담아냈다.

고통이 깊어질수록, 역설적이게도 서로를 향한 갈망이 심장 깊은 곳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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