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를 쥐어짜는 듯한 세현의 악력이 얇은 실크 셔츠를 넘어 살결을 짓눌렀다.
단 1초.
그 찰나의 지체가 불러온 대가는 가혹했다. 뇌수를 통째로 끓여 올리는 듯한 극심한 열감이 두 사람의 신경망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여진은 비명을 집어삼키며 세현의 깃을 움켜쥐었고, 세현의 턱밑 근육 역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서로를 향한 기묘한 온기가 닿는 순간 작동하는 계약 반사의 저주.
"놓으라고 했을 텐데."
여진이 이빨 사이로 불꽃 같은 목소리를 뱉어내며 그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맞닿았던 피부가 떨어져 나가자 머리를 쪼개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세현은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여진을 응시하다가, 비릿한 실소를 흘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길고 곧은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현은 자연스럽게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지만, 여진은 보았다. 그의 주머니 실루엣 너머로 둥근 약병의 윤곽이 도드라지는 것을. 세현의 침실 깊숙한 곳에서 보았던, 감각 과부하를 억제하는 푸른 유리병의 차가운 감촉이 여진의 망막에 잔상처럼 스쳤다. 저 남자는 이미 저주의 무게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속이기 위해 매일 밤 약을 삼키고 있었다.
서로를 삼키지 않으면 스스로가 타 죽는 지옥. 그 지옥의 문턱에서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에게서 등을 돌렸다.
***
사흘 뒤.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그랜드 볼룸은 거대한 유리 요새 같았다. 백령그룹과 태성그룹의 글로벌 제휴를 기념하는 갈라쇼. 사방을 채운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빙판 같은 대리석 바닥 위로 날카로운 빛을 반사했다.
"숨 막히네."
대기실 거울 앞에 선 여진이 붉은 립스틱을 입술 산에 덧바르며 중얼거렸다. 거울 속 그녀는 어깨를 대담하게 드러낸 루비빛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핏빛에 가까운 고혹적인 색채가 그녀의 하얗고 매끄러운 쇄골을 더욱 시리게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문이 열리며 세현이 걸어 들어왔다. 드레스의 색감과 완벽하게 맞춘 다크 차콜 수트에 버건디 빛 포켓치프를 꽂은 모습이었다. 단정하게 뒤로 넘긴 검은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이마와 짙은 눈썹이 오늘따라 유난히 날카로웠다.
"부부치고는 대기실 공기가 너무 시베리아 같은데, 와이프."
세현이 여진의 등 뒤로 다가와 거울 속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시선이 거울을 매개로 얽혔다.
"쇼윈도 안의 마네킹에게 온기를 바라는 건 멍청한 짓이야, 강세현 씨."
여진은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뒤를 돌아섰다. 그녀의 양손이 세현의 잘 닦인 수트 깃을 잡고 매만졌다. 겉으로는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는 다정한 아내의 모습이었으나, 손끝에는 깃을 찢어발길 듯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오늘 갈라쇼의 메인은 우리 춤이야. 잊지 마. 한태오 회장과 원로회의 눈이 사방에 깔려 있어."
"잊을 리가."
세현이 여진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얇은 드레스 원단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체온에 여진의 척추가 꼿꼿하게 굳었다.
"당신을 안고 춤출 생각에 사흘 동안 잠도 안 오더군. 밟아 죽이고 싶어서."
"기대에 부응해 주지. 발가락뼈가 부러질 준비나 해."
서로를 향한 차가운 적의가 대기실의 온도를 급격히 떨어뜨렸다. 하지만 그 적의가 깊어질수록, 여진의 머릿속은 놀라울 정도로 맑아졌다. 오감 공명의 법칙. 서로를 향한 증오가 극에 달할 때, 비즈니스적 직감과 행운은 신의 영역에 닿는다. 지금 두 사람의 신경은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예리하게 벼려져 있었다.
대기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태성그룹의 골칫거리이자 세현의 이복동생, 강선우였다.
"아, 보기 좋은 부부 납시었네."
선우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샴페인 잔이 들려 있었다.
"형, 그리고 형수님. 밖에서는 두 사람이 소월재에서 밥도 따로 먹고 침대도 따로 쓴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오늘 갈라쇼에서 춤추다가 서로 밀쳐내는 거 아닌지 몰라. 원로원 영감님들이 눈을 부릅뜨고 보고 계시거든."
선우의 눈빛에는 열등감과 탐욕이 뒤섞여 있었다. 어떻게든 두 사람의 균열을 찾아내어 후계자 자리를 찬탈하려는 얄팍한 수작질.
여진은 세현의 품에 더 깊숙이 밀착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세현의 가슴팍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도련님."
여진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고도 우아하게 울렸다.
"사생활과 비즈니스를 구분 못 하는 건 도련님 수준에서나 일어나는 참사죠. 우리 두 사람의 결합이 태성과 백령에 어떤 가치를 가져오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되시나 봐요?"
세현이 여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선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먹잇감을 보는 맹수의 그것처럼 잔인했다.
"선우야. 형수가 너더러 멍청하다고 돌려서 말하잖아. 들어왔으면 인사나 하고 꺼져."
"형……!"
선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여진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세현의 팔짱을 꼈다.
"가요, 여보. 아랫사람의 재롱을 받아주기엔 시간이 아까우니까."
두 사람은 선우를 완벽하게 무시한 채 대기실을 나섰다. 등 뒤로 선우가 잔을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그들의 안중에는 없었다.
***
그랜드 볼룸의 문이 열리자, 수백 개의 카메라 플래시가 폭죽처럼 터졌다.
"태성그룹 강세현 부사장, 백령그룹 한여진 전무 입장하십니다!"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장내를 가득 채운 정재계 거물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홀 한쪽 끝, 귀빈석에는 백령의 지배자 한태오가 얼음 조각 같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태성의 원로들이 매서운 눈초리로 감시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완벽한 먹잇감들이 널렸군."
세현이 여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지만, 여진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한태오 회장의 눈빛을 봐. 우리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바로 사냥개가 달려들 거야."
"그 사냥개 이빨을 다 뽑아버리면 되지."
오케스트라의 연향이 멈추고, 무대 중앙에 핀 조명이 떨어졌다. 쇼스타코비치의 격정적인 왈츠 2번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애잔하면서도 날카로운 바이올린 선율이 공기를 가르며 흘러나왔다.
세현이 여진을 향해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여진은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탁.
살결이 맞닿는 순간, 전율이 등뼈를 타고 흘러내렸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세현의 맥박은 빠르고 강렬했다.
그가 여진의 허리를 감싸 안고 무대 중앙으로 이끌었다. 왈츠의 부드러움 속에 탱고의 날카롭고 매혹적인 스텝을 가미한 그들만의 춤이 시작되었다.
스텝이 엉키는 듯하면서도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두 사람은 회전했다. 드레스의 붉은 자락이 반사판처럼 대리석 바닥을 쓸며 붉은 궤적을 그렸다.
"너무 굳어 있어, 한여진."
세현이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가슴이 밀착되었다.
"당신 품이 너무 딱딱해서 그래, 강세현. 마치 시체 안치실에 누워 있는 기분이야."
여진이 지지 않고 맞받아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녀의 목선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드러났다. 세현의 시선이 그녀의 목덜미를 집요하게 쫓았다.
"그 시체한테 목덜미를 물리지 않게 조심해."
두 사람의 대화는 칼날 같았으나, 겉보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뜨겁게 사랑을 속삭이는 부부의 몸짓이었다. 관객석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불화설을 지피던 이들의 입이 순식간에 다물어졌다. 우아하고 도도한 왕실의 커플이 무대를 지배하듯, 그들의 춤사위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것 봐. 두 사람이 저렇게 완벽하게 호흡을 맞추는데 불화설이라니."
"백령과 태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군. 저 눈빛들을 봐. 서로를 집어삼킬 것 같잖아."
주변의 웅성거림이 초감각을 통해 여진의 귀에 선명하게 꽂혔다.
스핀을 돌며 접촉 면적이 넓어졌다. 세현의 허벅지가 여진의 다리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고, 여진의 팔은 세현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 순간이었다.
여진의 머릿속에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는 정보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 [백령-태성 컨소시엄, 부산 신항만 제5부두 독점 라이선스 취득율 98.7% 돌파] - [해양수산부 최종 심사 지표 급상승] - [경쟁사 서해해운, 입찰 포기 의사 타진]
실시간으로 뇌리에 내리꽂히는 행운의 수치들. 가문의 비즈니스 지표가 폭발적으로 치솟고 있었다. 세현 역시 그것을 느낀 듯, 그의 눈동자가 기이한 안광으로 빛났다.
"느껴져?"
세현이 여진의 허리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며 낮게 읊조렸다.
"어. 당신을 증오할수록, 가문의 금고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
"그럼 더 증오해 봐. 백령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야."
두 사람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춤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바이올린의 독주가 광포하게 울려 퍼지고, 세현은 여진을 품에 안고 빠르게 회전했다.
그들의 스킨십을 깎아내리려던 강선우와 한태오의 하수인들은 이제 완전히 질린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완벽한 압도. 그 누구도 이 결합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두 거대 가문의 행운이 하나로 뭉쳐 세상을 지배하는 순간을, 그들은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었다.
마지막 피날레.
현악기의 날카로운 비명이 멈추고, 세현이 여진의 허리를 꺾어 안으며 춤을 끝마쳤다.
여진의 상체가 낮게 기울어지고, 세현의 얼굴이 그녀의 코앞까지 내려왔다. 터질 듯한 숨결이 서로의 입술 사이를 오갔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장내에는 터질 듯한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한태오 회장마저도 천천히 가식적인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방해 세력의 이간질은 흔적도 없이 파멸했다.
하지만 여진은 박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현의 깊고 짙은 검은 눈동자 안에 일렁이는 무언가를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연출된 적의가 아니었다.
가면 뒤에 숨겨두었던, 억누를 길 없이 터져 나온 순수한 열망. 자신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어 하는 한 남자의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세현."
여진이 미처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쿠우웅-!
사흘 전의 고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가공할 만한 충격파가 여진의 심장을 관통했다.
가슴뼈 안쪽이 통째로 으스러지는 듯한 물리적 고통. 심장이 타들어 가다 못해 재가 되어 흩어지는 듯한 저주가 그녀의 온 신경을 마비시켰다.
"아……!"
여진의 입술 틈새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눈앞이 핏빛으로 점멸했다.
동시에 세현의 몸 역시 돌처럼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고통으로 잘게 흔들렸다. 그의 손아귀가 여진의 허리를 부러뜨릴 듯이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것은 경고였다.
이 우아한 춤의 마지막 스텝에서, 그들의 내면에 존재해서는 안 될 진심이, 그 파멸의 씨앗이 기어이 싹을 틔웠다는 잔혹한 증거였다.
수많은 군중의 환호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이 허물어지는 지옥 같은 통증을 공유하며 잔인하게 얽힌 시선을 떼지 못했다.